"천재라고 부르지 마세요" 천정배의 '뼛속까지 소신론'

[the300][의원사용설명서 2.0]

심재현 기자 l 2016.06.29 05:30


천정배 국민의당 공동대표는 선수나 경력에 비해 이미지가 젊다. 당내 최다선 의원(6선)인 데다 참여정부에서 법무부 장관을 지내 '원로'로 분류될만도 한데 여전히 '야전'의 느낌이 짙다. 나이는 1954년생으로 환갑에서 이제 두해 됐다. 학번으로는 참여정부에서 국무총리를 지낸 이해찬 무소속 의원과 같다. 같은당 정동영 의원,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전 대표와도 학번이 같다.

[키워드1] "뼛속까지 야당"

21년차 정치 노장의 야전 이미지는 사안마다 에둘러 말하지 않고 정면승부하는 버릇과 관련이 깊다. "사람으로 태어나서 어떻게 한나라당(현 새누리당) 하나 생각한다"(2011년 9월 민주당 서울시장 합동토론회), "재산은 상속이 있지만 정치에는 상속이 없다"(2016년 1월 김대중 전 대통령의 3남 홍걸씨의 더불어민주당 입당에 대한 언론인터뷰) 등이 천 대표의 어록이다.

1996년 정계입문 후 6선까지 정치역정이 변화무쌍한 것도 이 때문이다. 고비마다 자리를 걸고 돌파구를 찾으며 여야 중앙무대를 누볐다. 2002년 새천년민주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현역의원 중 유일하게 노무현 당시 후보에게 베팅한 것은 유명한 일화다. 열린우리당 창당을 이끌며 제1여당의 원내대표로 당선돼 국가보안법 폐지를 추진했던 것이나 법무부 장관 시절 김종빈 검찰총장의 사의 표명으로 이어진 수사지휘권 발동 사태를 낳은 것도 스스로의 원칙과 소신에 충실했던 결과다.

참여정부 지지율이 떨어지면서부터는 순탄치 않은 길을 걸었다. 대통합민주신당으로 여권이 개편되자 대선후보 경선에 출마했지만 컷오프에서 탈락했다. 오세훈 서울특별시장이 무상급식 찬반 주민투표 무산으로 사퇴하자 국회의원직 사퇴를 선언하고 서울시장 보궐선거 후보 경선에 출마했지만 박영선 의원에게 패했다. 이후 총선에서 서울 송파을에 출마했다가 3%포인트 차이로 낙선했다.

서울시장 보궐선거 출마를 위해 사퇴를 선언한 기간 국회의원 세비(월급) 수령을 거부한 것도 천 대표의 원칙론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사직서를 냈지만 수리가 안 돼 눈 딱 감고 세비를 챙길 수도 있었지만 양심을 지킨 것이다. 이때 국고로 돌려보낸 세비가 1억2000만원이 넘었다.

지난 4월 총선도 만만치 않았다. 독자 신당을 준비하다 국민의당 창당에 힘을 모으면서 손쉽게 대세를 장악하는 듯했지만 선거전 중후반 악재가 터지면서 한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상황을 맞았다. 뚜껑을 연 선거결과에서 예상 이상의 승리를 거둔 뒤 천 대표는 기자와 만나 "호남개혁정치 복원에 투신하겠다"고 말했다.

[키워드2] 천재 인권변호사

천 대표 하면 나오는 게 '천재'라는 수식어다. 전남 신안군 암태도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6학년 때 신안군 학력경시대회에서 1등을 하면서부터 '신동'으로 통했다. 서울대 법대를 수석 입학·졸업하고 고시 합격담에 내세울 만한 일화가 없을 정도로 '고생없이' 대학 졸업 전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사법연수원 수료 성적은 3등이다.

엘리트 코스의 운명이 틀어진 전환점은 '5·18'과 황석영의 소설 '어둠의 자식들'이었다. 천 대표는 2007년 차병직 변호사와 공저로 펴낸 저서 '여기가 로도스다 여기서 춤추어라'에서 "군 법무관 시절 압수한 책(어둠의 자식들)을 읽으며 정치와 사회에 대한 관심이 높아있을 때 광주항쟁이 터졌다"며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 대통령에게서 판사나 검사 임명장을 받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고 회고했다.

변호사의 길을 걷기 시작한 젊은 법조인은 1981년 국내 최대 법률사무소인 '김앤장'에 입사했지만 4년만에 다시 보장된 미래를 버리고 고 조영래 변호사와 함께 '남대문합동법률사무소'를 열고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 창립 멤버로 참여하면서 인권변호사의 명함을 달게 된다. 이때 구로구청 부정 투표함 사건, 임수경 문익환 이영희 방북사건, 가수 정태춘 음반 사전검열사건 등을 수임했다.

정작 본인은 '목포 3대 천재'라는 말과 '인권변호사'라는 표현에 몸서리를 친다. 변호사법 정의대로 변호사는 기본적인 인권을 보호하고 사회 정의를 실현하는 게 사명인데 굳이 변호사 앞에 인권이라는 말을 붙일 필요가 있느냐는 얘기다.

[키워드3] 자나깨나 '계실평'

천 대표의 광주 서을 사무소에는 심한 한자흘림체로 '심재'(心齋)라고 적힌 표구가 하나 걸려 있다. '심재좌망'(心齋坐忘)에서 따온 말이라고 한다. 심재는 '마음을 굶긴다', 좌망은 '앉아서 잊는다'는 뜻이다. 공자와 제자 안회의 대화를 옮긴 '장자'에 나온다. 말하자면 천 대표의 좌우명이다.

둘째딸 미성씨는 2010년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또다른 신조를 밝히기도 했다. 미성씨가 늦잠을 자면 천 대표가 '계실평 계실평' 노래를 부르면서 깨웠다는 일화다. '계실평'은 '계획, 실천, 평가'의 줄임말이다. 천 대표의 꼼꼼함이 어떤 태도에서 시작되는지 가늠할 수 있는 부분이다.

호부(虎父) 아래 견자(犬子) 없다고 미성씨는 서울과학고와 서울대 경영학과를 졸업한 뒤 외무고시에 합격해 '금녀의 땅'이라는 이란에서 국내 첫 여성 외교관으로 현지에서 근무하고 있다. 천 대표가 20대 국회에서 중진의원들 사이에 인기가 높은 외교통일위원회를 마다한 이유도 이국땅에서 고생하는 둘째딸을 생각해서였다고 한다. 딸이 아버지에 대한 부담없이 활약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는 것. 법제사법위원회를 지원하지 않은 것도 서울중앙지법에서 근무 중인 첫째딸 천지성 판사를 감안해서였다.

[그의 사람들] 가족은 나의 힘

법조인 특유의 어법으로 대중 호소력이 다소 떨어진다는 지적이 있지만 원칙에 충실한 스타일의 배경에는 꺼리낄 게 없는 사생활과 가족사가 있다. 장관과 집권여당의 원내대표를 지낸 6선 국회의원이기 전에 김앤장 변호사였던 이가 서울 아파트 한 채 정도의 재산이 전부라면 할 말 다 했다.

평생을 고향 암태도에서 보낸 증조부는 글만 읽은 선비이자 서당 훈장이었다. 조부는 논 열두마지기에 밭 스무마지기를 경작하는 알짜배기 농꾼이었다. 부친은 뭍으로 나와 목포에서 교사를 하다 공무원을 했다. 장인인 서한태 박사는 의사이자 환경운동의 개척자로 유명하다.

천 대표의 표현대로 촌부였던 조모는 "야그야, 사람은 누구나 똑같이 대접해야 쓴다"는 말을 달고 살았다. '정의로운 복지국가'라는 천 대표의 정치구상도 여기서 나왔다.

[이 한 장의 사진]


2009년 9월 "민심의 소리를 듣겠다"며 '민생포장마차'를 차렸다. 열린우리당 시절 '민생정치모임'을 함께 했던 김희선 전 의원이 '주모'를 자처했다. 포차 한켠에서 열린 '즉석민심토크'에서 목수일을 한다는 한 남성은 "인력시장에 나가면 새벽 4시부터 아침 7시까지 기다려도 일거리를 찾지 못하는 사람들이 널려 있다"는 말을 하다 눈물을 쏟았다.


[요주의]

원칙과 소신을 중시하다보니 주변과의 마찰이 적잖았던 점은 스스로도 아쉽다. 15대 국회를 시작으로 수차례 당을 갈아탔다. 초선 때는 새정치국민회의, 재선 때는 새천년민주당, 3선 때는 열린우리당을 창당하며 둥지를 옮겼다. 이후 야권의 부침 속에서 소속 당명이 대통합민주신당, 통합민주당, 민주당, 민주통합당으로 바뀌었고 지난해 4·29 재·보선을 앞두고는 당을 버렸다. 주변 시각이 좋을 리 없다. 재·보선 당시 권노갑, 임채정 상임고문 등 동교동 원로들은 천 대표의 탈당을 강하게 비판했다.


△1954년 전남 신안 출생 △목포고·서울대 법학과 졸업 △사법고시(18회) △민변 창립회원 △열린우리당 원내대표 △법무부 장관 △15·16·17·18·19·20대 국회의원 △국민의당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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