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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포항을 빛낸 위인들
채소 조회수 26,556 작성일2010.04.27

초등학교 3학년 사회 숙제인데요 우리고장을 빛낸 자랑스러운 인물들에 대해

조사하는 건데요

저희는 포항에 삽니다

옛날 위인들과 오늘날 훌륭한 인물들에 대해 조사하는 겁니다

독립운동가, 정치인, 예술가, 경제인, 교육자, 운동선수, 학자, 효녀효자, 충신, 장군등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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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대로 쌤
수호신
수학 2위, 사회 1위, 초등학교교육 1위 분야에서 활동

질문 내용을 보니까 인터넷 정보 검색 능력을 키우는 것이 우선이겠습니다.

포항 어린이시청>처음 > 문화와축제 > 포항을 빛낸 사람들

위 사이트에서 필요한 내용만 골라내시면 됩니다.

양이 많으므로 1명씩만 선택하여 올립니다.

 

충의 - 나라와 임금 그리고 백성에게 충성하고, 또한 그 뜻이 변하지 않고 절개를 지킨 인물

[정습명]

고려 의종때의 중신, 본관은 영일, 향공으로 급제, 인종때 국자사업,'기거주지제고' 등을 역임하고 최자, 김부식, 이충, 최주등과 함께 시폐십조를 상주하였다가 거부당하자 벼슬에서 물러났다.그후 의종이 즉위하자 한림학사, 추밀원지주사가 되어 간직에 있으면서 김존중,정함 등의 간사한 무리들에게 유혹되어 정사를 돌보지 않는 의종에게 직언으로 보필하였으나 김존중, 정 성등의 참소로 왕명을 거역하여 스스로 약을 먹고 자살하였다. 고려의 충신이며 대유학자였다.

 

[포은 정몽주]

고려말의 충신 초명은 몽란,몽룡,자는 달가 호는 포은,시호는 문충이다.

본관은 영일로 정습명의 후손이며 관의 아들, 공민왕 9년(1360) 삼장시험에 연달아 장원급제 1364년 병마사 이성계의 종사관으로 여진의 삼선,삼개를 격퇴하였고 1372년 서상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와 대사성이 되었다가 다시 귀양갔다.

1380년 일본사신으로 가서 해구를 금지토록 교섭하고 돌아와 1384년 두 번째 명나라에 가서 국교를 두텁게하고 돌아왔으며 1386년 또 명나라에 들어가 세공을 면제토록 청하고 돌아와 영원군에 봉해졌다.

1389년 대제학이 되어 이성계와 같이 공양왕을 세우고 좌명공신의호를 받으며, 1392년 대명률을 새로 찬정해 바쳤다.

당시 이성계의 힘이 날로 커져서 조준, 정도전등이 그를 왕으로 추대하려하매 그들을 제거하려다가 이방원의 문객 조영규에게 선죽교에서 피살되었다.

성품이 호방하고 매서웠으며 충효로 일관했고 성리학에 매우 밝아 5부학당, 향교를 설치 유학을 진흥시켰다.

고려조의 마지막 충신이며 이 지방 오천읍이 공의 고향이다.

 

[권여정]

1567년(조선 선조1년) 연일현 저동(현 송동)에서 출생 자는 子中(자중)이며, 호는 松軒(송헌)으로 본관은 안동이다. 안동권씨의 시조 태사공 權幸(권행)의 후손으로 천성이 영민하고 기개가 강개하고 충과 효를 몸소 실천하였으며, 주위 사람들은 그를 『충효의 자질로 천하를 다스릴 만한 그릇이다』라고 칭송하였다. 또한 성품은 인자하고 부지런히 학문을 연구하며 마음을 고요히 하여 시와 예를 즐겨하고 송파(현 송동)에서 서당을 열어 덕망있고 배움이 많은 선비들과 글을 읽고 도를 말하니 당시 사람들이 존경하고 따라 그 곳을 『道洞(도동)』이라 불렀다. 1592년 4월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서재에서 경사를 섭렵하다가 집안사람들에게『사람이 사람다운 것은 인륜이 있기 때문이니 어버이께 효도하고 나라에 충성하는 것은 인륜이 갖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우리 집안은 대대로 충과 의를 지켜온 집안이다. 불행하게도 왜구들이 창궐하여 민생은 도탄에 빠지고 나라는 위태한 지경에 이르렀는데 어찌 내몸만 온전히 하고 처자들을 보호하여 거친 골짜기에서 몸을 숨겨 구차하게 삶을 구할 수 있겠는가! 내 장차 힘을 다해 죽음에 이를지라도 저 짐승들과 같은 도적들을 토벌하겠다』라는 표를 쓰고 표종 김현룡형제들과 함께 집안의 재산을 기우려 활과 화살을 구하고 병기를 만들어 전투 준비를 하고 급히 격문을 지어 의병을 일으켜 도적들을 토벌하려는 뜻을 향중에 포고하니 따르는 수 많은 사람들과 함께 경주로 들어가 제 의사들과 더불어 문천에서 회맹하고 여러 의사들과 더불어 영천성을 회복하고 의병대장 권응수 막하에 소속되어 경주 전투에 참가하여 많은 전공을 세웠으며, 이후 문경 당교 전투와 안강에 침투한 적을 격파하였다. 이후 팔공산 회맹에 참가하고 창녕 화왕산으로 곽재우장군 진에서 회맹을 맺었으며, 울산 도산성에서 마지막으로 저항하던 왜군을 무찌르는데 많은 공을 세웠다. 7년의 전쟁후에 논공행상시에 모든 공과 벼슬을 사양하고 향리로 돌아와 도남서당을 열어 시와 예를 강론하며 후진을 양성하였다. 만년에 학행으로 참봉에 천거되었고, 송헌실기가 전한다. 예전부터 향중에서 발의 추모하여 매년 음력 3월 중정일에 묘소에서 춘향제를 드렸으며, 현재는 유림의 연중행사로 향례를 드리고 있다.

 

[권이국]

자는 道淑(도숙)이며, 호는 松圃(송포), 본관은 안동으로 1879년(조선 고종 을묘)에 대송면에서 출생.
타고난 성품이 순수하고 천학실행하여 3군 훈도를 역임하니 인근 향인들이 따르고 존경하였으며, 향인들의 권유로 약관에 과거길에 올랐으나, 도중에 과장이 폐지되니 향리에서 서당을 열어 후학양성에 정성을 다하여 문도가 350여명이었고, 학계성첩인원이 250여명이며, 수 백리 밖에서도 학덕을 배우고자 찾는 분들이 많았었다. 공은 先意承順(선의승순)에 전념하고 名利(명리)를 바라지 않았으며, 守分處世(수분체세)로 후진 교육에만 전념하였다.
사후에 제자들이 학계를 조직하여 매년 스승의 가르침을 이어갔었으며, 많은 시문과 유고집이 있었으나 6.25 동란으로 거의 소실되고 일부만 남아있다.

 

[이일우]

호는 죽비, 경주 이씨로 10여년간 한문을 사숙하여 한시에 능했다. 인품이 부드럽고 원만하여 매사에 타협적으로 임했다. 학문과 덕행이 높아 주위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 특히 부모님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여 연일 군수로부터 효자상을 받기도 했다. 연일청년 회장을 지냈고 미군정청 포항주둔미군 고문으로 추대 받아 공평하게 일을 처리하여 신망을 받았다. 경상북도수산업협동조합 이사장을 지냈고 영국, 미국, 소련의 삼자회담 결정에 따른 한국에 대한 신탁통치를 반대하는 신탁통치반대투쟁위원장을 지냈으며 해방 후 대한 광복군연일군조직위원장,연일군국민회장,미군정시 정부입법위원, 포항 중·고등학교 기성회장을 지냈으며 시민의 윤리와 도덕심 고양을 위해 포항 명륜회장을 역임했으며 포항청년회 등 반공단체 총 지도자로서 민주주의를 지키는데 앞장서 일해온 지도자로 지역발전과 시민의 권익보호에 크게 공헌하였다.

 

효자 -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고 모범이 되는 인물

[하영식]

구룡포 구평에서 태어났다. 어린시절부터 효성이 지극하여 향리의 모법이 되었을 뿐 아니라 모친이 병환으로 10년동안 앓아 눕게되자 명의와 신약을 구하기 위하여 동분서주하였고 바다를 앞에 두고 있는 해안지역이라 엄동설한에도 얼음을 깨고 고기를 잡아 반찬으로 대접하였다.

꿩이 좋다는 말을 들었으나 구할 길이 없어 고심을 하면서 낚시를 하던 중 난데없이 꿩 한마리가 물에 빠지는 것을 보고 물에 뛰어 들어 꿩을 정성껏 장만하여 어머님께 드리니 병환이 완퇘되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 하였거늘 하늘이 공을 도운 출천지효자였다.

조선조 고종 21년(1884)에 진주하씨 문중에서 비를 세우고 선효각을 건립하였다.

 

[금인석]

본관은 봉화이며, 호는 운봉이다.

1921년 7월 19일 포항시 남구 장기면 방산리에서 태어났다. 동경상대 경제과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을 졸업하였다. 1989년 2월에는 동경대학에서 수리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주요경력으로는 일본 계리사 시험에 합격하고, 고등고시 행정과에 합격하여 심계원, 검서관 및 과장을 역임하였다. 국회 재경위 및 예결산 위원회 전문위원(차관급)을 역임하였다. 계리사 고시위원(재무부)을 지내고, 재단법인 5.16장학회 상임감사, 한국비료공업주식회사 상임감사(부사장급)를 역임하였고, 경희대학교 교수를 역임하였다.

작가로서의 주요 경력은, 조선미술전람회 서도부 연4회 입선 (1935∼1938), 정부수립 5주년 기념전 대통령상 수상 (1953), 5.16 혁명기념 100일전 최고회의 의장상 (1961)을 수상하였다. 한일서예문화교류협회(1976∼1985), 한·일·중국제전(1976∼1985), 자유중국정부 초청작가 (1977∼1979 : 서예백일장 3회 참가, 행정원장 대상 3회 수상), 제 1 회 한국 미술 대상전 초대작가(1978), 경상북도 미술대전 초대작가 및 심사위원 (1983∼1985)을 지냈다. 저서로는 당시선, 삼체천자문, 추사소전 등이 있다.

평생을 공부하는 관료로서, 자신에게 엄정하였고, 꾸준히 노력한 이름높은 서예가였다.

 

[김경섭]

호는 소오, 포항사람이다. 어려운 가정에서 태어났다.

1939년 평양 의학강습소에서 2년간 수학한 후 조선총독부시행 의사 검정시험에 합격 1941년 충북 괴산군 공의로 재직하다가 1949년 포항으로 이거하여 동인의원을 개원 이 지방 의학계에 명성을 떨쳤다.

경제적 기반이 조성됨에 육영에 뜻을 두어 포항 중·고등학교 기성회장을 역임하였고, 5.16 군사혁명 이후에는 재건국민운동 포항시 지부장에 취임하여 재건 학교설립 등 자조 자립 협동하는 새마을 정신을 몸소 실천하며 사회봉사활동에 주력하였다.

1968년 동인교육재단을 창립 재단이사장으로 취임하여 대동중학교 설립 후 1972년 대동고등학교를 설립하여 후배 교육에 전력하였다. 빈부격차 없는 교육평등이 지론이었고 함께 훌륭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원칙으로 학교교육에 힘썼다.

1967년 포항로타리클럽회장, 포항시행정자문위원장, 포항시 새마을 협의회장직을 역임하면서

의술과 교육 등 사회봉사활동에 공헌하였다.

 

[박일천]

흥해 출생, 성품이 호탕하고 청빈고매 하였다. 일본청산학원을 졸업,

1946년 대한노총 포항지부장을 역임하고 1952년 민선 포항시장에 당선 혼란기 자치행정 책임자로 그 역할을 성실히 수행하였다.

바닷가 불모지를 개발하기 위해 포항제철유치위원회 부회장으로 선도적역할을 맡아 철강도시로 발전하는데 크게 공헌하였으며 지역 발전협의회 초대회장, 포항공대설립 추진위원장을 역임하였다.

남다른 애향심으로 고향을 지키겠다는 일념으로 향토사 연구에 몰두하여 1968년 일월 향지를 발간하였고 포항시사 편찬의원, 영일군사 편찬위원, 경상북도 향초사 연구협의회 회장, 포항·영일문화재 보존위원장을 역임하였다.

포항의 행정과 경제기반 포항공과대학 유치, 향토사 연구 등 지역발전과 향토문화 창달에 크게 공헌한 향토의 큰 인물로 세인의 귀감이 되고 있다.

 

2010.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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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수
신돌석 장군!!

2010.05.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