⑤ 주류 영업 ‘이중 고통’

이유진·최민지 기자

도매상 관리하랴…소매 주점 마음 사랴

‘무기’ 들고 밤낮 판촉전 “자괴감 시달려”

[영업사원의 비애] ⑤ 주류 영업 ‘이중 고통’

무기, 전향, 소모전, 전쟁터…. 주류회사 영업사원들 입에서 쏟아져 나온 단어들은 살벌한 전쟁을 연상케 했다.

ㄱ주류 소주 영업사원이었던 김준하씨(31·가명)는 주류 영업에 사용하는 포스터, 메뉴판, 물병 등을 ‘무기’라고 표현했다. 김씨의 자동차 트렁크는 언제나 무기로 가득했다. 그는 자사 주류 홍보 물품을 싣고 새로 문을 연 업소가 있을 때마다 가장 먼저 달려갔다. 업소 벽에 붙어 있던 다른 회사 포스터를 떼어버리고 자신이 파는 주류 홍보 포스터를 몰래 붙이는 건 예삿일이었다.

김씨는 “사람들은 연예인 누가 광고에 나오는지가 판매량을 가를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현실은 조금 다르다”며 “현장에서 뛰는 영업사원들이 판매량을 책임지는 핵심이고, 그래서 영업사원들이 뛰는 현장이 바로 전쟁터”라고 말했다.

거래하는 업소도 김씨에게 ‘갑’이었다. 김씨는 “사장님들도 영업사원을 참 잘 이용한다”고 말했다. 김씨는 “손님들 중에는 특정 브랜드의 주류만 선호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냥 ‘소주 주세요’라고 하는 분들도 많다”며 “결국 사장님에게 잘 보여야 매출이 올라갈 수 있다”고 말했다.

주류회사 간 치열한 경쟁에서 영업사원들은 스스로를 최전방에서 싸우는 ‘병사’라고 부른다.

경쟁업체보다 맥주 한 병, 소주 한 병이라도 더 팔기 위해 주류회사 영업사원들은 일반인이 상상하기 어려운 거리를 밤낮없이 뛰고 또 뛴다.

ㄴ주류 수입맥주 영업사원이었던 이명훈씨(28·가명)는 한 달에 자동차 기름값으로만 50만원을 썼다. 낮에는 도매업체를 돌고 밤에는 신촌과 홍대 일대의 대형 술집을 돌아다니며 제품을 홍보했다. 다행히 기름값은 회사에서 보전해줬다고 한다.

이씨는 이 모든 게 ‘전향’ 때문이라고 했다. 전향은 다른 회사 술을 공급받는 업소가 자신의 회사 술을 공급받도록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전향에 성공하기 위해서 영업사원들은 도매업체 사장에게 잘 보여야만 한다. 이씨는 “도매업체에 비싼 선물을 사주고 그냥 조르는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도매업체만큼 소매업체 영업도 중요하다. 주류 유통의 이중구조 때문이다. 법적으로 주류업체는 도매업체에만 납품을 하게 돼 있다. 소매업체에서 판매하는 술은 도매업체를 통해 납품된다. 하지만 주류회사 영업사원들은 소매업체 영업도 소홀히 할 수 없다고 말한다. 이씨는 “결국 손님한테 나가는 술은 소매업체 사장의 마음”이라며 “자사의 술을 많이 팔기 위해선 소매업체에 따로 홍보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회사 업무는 ‘카톡방’으로도 이어진다. 이씨는 “카톡방에 영업사원들이 1시간마다 현황을 파악해 표를 올렸다”며 “판매량을 채우지 못하면 상사로부터 갖은 폭언이 돌아왔다”고 전했다. 이 때문에 나름 애주가였던 이씨는 이제 회식 때도 술을 잘 마시지 않는다. 특히 자신이 몸담았던 주류회사의 술은 일부러 마시지 않는다고 했다. 고통스러운 기억을 떠올리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주류업체들은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영업사원에게 ‘시장개척비’ 명목으로 지원금을 주기도 한다. ㄷ주류 맥주 영업사원 박준호씨(26·가명)도 회사로부터 시장개척비를 받았다. 한 달 평균 50만~60만원이 지급됐지만 턱없이 부족했다.

박씨는 “시장개척비를 받아도 접대비와 교통비로 쓰면 남는 게 없어 결국 추가로 사비를 더 쓸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박씨는 주류업체의 경쟁을 ‘소모전’에 비유했다. 입사 두 달 만에 회사를 그만둔 박씨는 “공개 채용에 연봉도 높다고 하더니 정작 하는 일은 경쟁사 포스터 떼고 내 포스터 하나 더 붙이는 일이었다”며 “그런 무의미한 소모전 때문에 자괴감을 많이 느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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