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이름 - 5·18 그 후 36년

‘역사란 무엇인가’ 가슴에 품고 스러진 청년 빛바랜 핏자국은 그의 이름을 말해줄까

배명재 기자

5·18 당시 전남도청 지방과 공무원이던 박모씨(72)는 그날을 떠올리며 안타까움에 몸서리를 쳤다. 계엄군이 도청 건물을 접수한 5월27일 이른 아침 “직원 소집을 위해 급히 사무실로 나오라”는 연락을 받고 도청 건물로 들어가려던 순간이었다. 오전 8시쯤이었다. 도청 별관 담장 아래에 조그마한 책 한 권을 가슴에 안은 채 맥없이 스러진 젊은이가 눈에 들어왔다.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채 다른 희생자 7~8명과 함께 누워 있었다.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박씨는 “손에 책을 쥐고 있을 정도라면 방금 전까지 살아 있었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면서 10여초 몸을 가눌 수 없었다”고 그때를 회고했다.

박씨는 근처 감시병의 눈을 피해 피 묻은 책을 거뒀다. 415쪽짜리 문고판 <WHAT IS HISTORY?(역사란 무엇인가?)>였다. 박씨는 이 책을 36년간 보관하다 지난 3월15일 ‘5·18민주화운동기록관’에 기증했다. 앞표지는 떨어져 나간 상태였고, 빛바랜 핏자국이 군데군데 드러나 있다. 뒤표지엔 전씨 성을 가진 이의 이름이 휘갈겨 쓰여 있다.

이 책은 외교관·언론인 경력의 영국 역사학자인 E H 카가 1961년에 쓴 명저다. 이를 삼지사가 ‘20세기 명작 영한대역 시리즈’ 다섯번째 책으로 1979년에 출판했고 날개 돋친 듯 팔렸다. 폭압적인 유신시대와 1980년대 군부정권시대를 잇따라 대하면서 그 탈출구를 역사에서 찾아보려는 사회적 분위기가 여느 때보다 높아지던 시기였다. 그 유명한 ‘역사란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그의 발언도 여기에 들어 있다.

군부정권은 이 책을 지니고 있기만 해도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체포하고 고문했다. 1982년 대학생이던 김모씨(53)는 이 책을 구입했다는 이유로 징역 2년6월의 확정판결을 받았다. 김씨는 32년 만인 2014년 11월에야 재심 청구로 무죄판결을 받았다. 1981년 부림사건을 다룬 최근 영화 <변호인>에서 이 책의 이적성 여부에 대한 법정공방이 소개되기도 했다.

책의 주인은 계엄군에 맞서 1980년 5월27일 새벽 전남도청에서 최후 항전을 했던 시민군 중 한 명으로 추정된다. 당시 계엄군의 도청 진압작전으로 도청에서 사망한 희생자는 모두 17명, 희생자 중 대학 재학생이나 휴학생은 8명이다. 시민군 대변인이었던 윤상원 열사도 당시 도청에서 사망했다. <역사란 무엇인가?>를 가슴에 품고 있었던 희생자는 이들 중 한 명으로 추정되고 있다.

김태종 5·18기록관 연구실장은 “죽음 앞에 있던 청년은 도청 복도 어디에선가 이 책을 봤을지도 모른다”면서 “책의 주인을 반드시 찾고 싶다”고 말했다. 법의학자들은 “책에 묻어 있는 피의 DNA를 분석해 희생자 가족들과 대조한다면 주인을 찾을 수도 있다”는 견해를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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