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련 거치며 대통령 만들어…친박의 역사 보니

[the300][런치리포트-친박, 그들이 사는 법]②2005년 박근혜 대표 시절 김무성, 유승민 등에서 출발

우경희 기자 l 2016.06.29 05:56

서청원 새누리당 최고위원이 30일 서울 여의도 한 음식점에서 열린 친박계 의원모임 '국가경쟁력강화포럼' 송년 오찬에서 격려사를 하고 있다. 2014.12.30/뉴스1 <저작권자 © 뉴스1코리아,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친박, 제가 만든 적은 없거든요."(박근혜 대통령. 4월 26일 언론사 국장단 오찬)
"지금 친박들은 대부분 졸박이에요. 2007년 고난의 시기를 겪었어야 진짜 친박이지."(새누리당 한 재선의원)

친박(친박근혜)은 여전히 명실상부한 여권 내 최대 권력계파다. 친박의 태동은 2005년으로 보는 시각과 2007년으로 보는 시각이 나뉜다. 

2005년 당시 한나라당 대표였던 박근혜 대통령은 YS 문하생 출신 김무성 의원을 사무총장에, 이회창 총리 문하생인 유승민 의원을 대표 비서실장에 임명했다. 이들이 원조 친박으로 분류되는 이유다. 그러나 지금은 둘다 비박(비박근혜)의 상징 격이 됐다.  

2007년은 친박계가 본격적으로 시련을 겪기 시작한 시기다. 역시 김무성, 유승민에 진영 등이 대표적인 친박 라인업인데, 이재오, 정두언 의원 등 이명박(MB)계와 대선 경선에서 혈투를 벌였다. 경선 패배는 피바람을 몰고왔다. 2008년 친이계에게 공천학살을 당하며 철저히 배제당했다.

눈물을 뿌리며 국회를 떠났던 이들이 이른바 '친박연대'를 결성하고 국회로 돌아왔다. 시련을 겪으며 결속력이 대단히 높아졌다. 이런 배경 때문에 2007년을 명실상부한 친박의 본격 태동기라고 보는 시각도 상당하다.

2009년에는 친박의 견고한 대오에 균열이 발생한다. 재보선에서 한나라당이 참패하자 친이계는 친박 좌장 김무성 의원을 원내대표에 임명한다. 박 대통령은 거절했다. 하지만 김 의원이 이를 수락하며 친박 대오에서 사실상 이탈, 19대 총선에서도 공천 배제된다. 유승민 의원이 박 대통령에 쓴소리를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2012년 19대 총선에서는 친박의 세력이 외려 커졌다. 박 대통령이 당 비대위원장을 맡으며 총선 승리를 진두지휘, 선거의 여왕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이후 대선에서 박 대통령이 당선되면서 친박계는 힘의 정점을 찍는다. 

2015년 유승민 의원이 "증세 없는 복지는 허구"라며 박 대통령에 맞섰다가 '배신의 정치' 한 마디에 원내대표직을 잃었다. 역시 거칠 것 없는 친박의 힘을 다시 한 번 확인한 사례다. 

이후 친박계는 최경환 의원을 중심으로 재편, 20대 총선을 치르며 최 의원은 명실상부한 친박계 좌장이 된다. 19대에서 숫적 우세를 보유하고도 친박에 밀리던 비박계는 20대 총선 이후 숫자까지 열세를 보이고 있다.

하지만 숫자 역전 후 결속력도 역전이 됐다. 소수이면서도 조직력이 대단했던 친박이지만 총선 승리 이후 분파되는 양상이다. 유기준, 홍문종, 이정현 의원 등이 독자세력화하고 있으며 이주영 의원과 원유철 의원 등도 별도로 세를 구축하는 모양새다. 반면 비박은 김무성계와 친이계를 중심으로 소수가 되며 외려 결속력이 강해졌다는 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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