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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08.03.29 조회수 7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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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sj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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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인돌이란?

 

고인돌은 지상이나 지하의 무덤방 위에 거대한 덮개돌을 덮은 선사 시대 무덤으로 거석문화유적의 일종이다. 고인돌은 대부분 무덤으로 쓰이고 있지만 묘역을 상징하는 묘표석 또는 의식이나 모임을 거행하는 제단으로 사용되는 것도 있다.

고인돌은 그 명칭도 다양하다. 한국·일본의 지석묘(支石墓), 중국의 석붕(石棚)·대석개묘, 영어의 돌맨(DOLMEN)·거석기념물(megalithic monument) 등이 대표적이다. 고인돌의 축조 시기는 한국에서는 청동기 시대, 일본에서는 죠오몽 말기에서 야요이 중기까지, 서유럽에서는 신석기 시대에서 청동기 시대 초기까지, 동남아시아에서는 선사 시대에서 역사 시대까지로 보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고인돌 수십 개가 무리지어 나타나기도 하는데 이것은 혈연으로 형성된 집단이 형성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집단은 조상숭배를 중시하고, 조상 숭배는 생명력과 불멸의 의미를 지닌 고인돌을 통해 실현되었다.

 

2 고인돌의 기원설

① 자생설 : 우리나라에서 독자적으로 발생했다고 보는 설이다. 고인돌의 수, 다양한 형식, 빠른 연대 등이 근거이다. 설사 독자 기원이 아니라고 해도 독자적인 문화를 형성하였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② 남방설 : 동남아시아로부터 바다를 통해 벼농사 문화와 함께 전파되었다는 설이다. 고인돌이 서해안의 남방문화 지역에 집중되어 있다는 점이 근거로 제시된다. 그러나 동남아시아와 우리나라의 연결 지점인 중국 동남해안에 적합한 유적이 없다는 약점이 있다.

③ 북방설 : 요령지방의 돌널무덤(石棺墓)에서 변화·발전하였다는 설이다. 돌널무덤의 뚜껑돌이 대형화된 것이 개석식, 지하 무덤방이 노출된 것이 탁자식 고인돌이라는 형태상의 유사점을 근거로 든다.

 

3 동북아시아의 고인돌 분포 현황

 

고인돌은 동북아시아 일대에 많이 분포하고 있다. 중국의 경우 절강성에 40여 기와 요령성에 300여 기가 있으며, 일본은 큐슈 북부에 600여 기가 있다. 한국에는 3만여 기가 있는데, 평양을 중심으로 한 대동강유역에 1만여 기와 전남지방에 약 2만여 기가 밀집 분포되어 있다.

유럽의 고인돌은 수천 기이고, 인도를 포함한 동남아시아 고인돌도 수백 기에 불과하다. 이것으로 볼 때 고인돌의 중심 분포지는 우리나라이고, 그 중 전남지방이 세계적으로 밀집 분포된 지역임을 알 수 있다.

고인돌이 분포된 지형은 큰 강이나 하천변의 평지, 구릉, 산기슭, 고갯마루 등으로 사람이 생활하는 곳 주변이다. 고인돌을 축조하기 위해 무거운 돌을 운반해야 했기 때문에 돌을 구하기 쉽고 운반하기 쉬운 지역을 선택했을 것이다.

 

4 고인돌의 구조와 형식

 

고인돌은 외형적 형태에 따라 크게 탁자식, 바둑판식, 개석식 등 3종류로 나눌 수 있다. 이러한 분류는 지역적인 분류와도 일치하기 때문에 북방식과 남방식, 또는 오덕형·침촌형·묵방형으로 부르기도 한다.

한편, 석실의 위치에 따라 지상형과 지하형으로, 받침돌의 유무에 따라 지석식과 무지석식, 덮개돌과 석실의 간격에 따라 들린형과 놓인형 또는 이지형과 접지형으로 분류하는 등 학자들마다 다양한 방법으로 분류하고 있다.

· 고인돌의 형식

* 개석식

지하에 묘실을 만들고 그 위에 바로 상석을 올려놓은 구조이다. 무지석식, 뚜껑식, 대석개묘라고도 한다. 고창 고인돌유적에서는 모두 237기가 확인되었다.

* 위석식

굄돌이나 받침돌 6~8개로 벽을 이루는 무덤방을 만든 고인돌을 말한다. 탁자식 고인돌은 각 면에 1장씩의 판석으로 무덤방을 만들지만 위석식은 여러 장의 돌로 무덤방을 만드는 점이 다르다. 제주도에서는 지하에 무덤방(地下土壙)을 만들고 다시 지상에 굄돌로 무덤방(地上石室)을 만든 고인돌이 있다. 탁자식처럼 무덤방이 지상에 있어 '변형탁자식(變形卓子式)'으로 분류된다. 그러나 부안(扶安), 고창(高敞)에는 남방식과 비슷한 낮은 높이의 굄돌들이 무덤방을 이루어 '변형남방식(變形南方式)'으로 불린다.

* 바둑판식(기반식)

판석이나 할석 등의 석재를 이용하여 지하에 묘실을 만들고, 그 주위로 수개의 지석을 놓고, 그 위에 상석을 올려놓은 구조이다. 분포범위는 주로 남한지역에 많이 분포하고 있어서 남방식 고인돌이라고도 한다. 고창 고인돌유적에서는 모두 148기가 확인되었다.

* 탁자식(북방식)

잘 다듬어진 판석을 2~4매를 이용하여 지상에 묘실을 축조하고 그 위에 판상성의 상석을 올려놓은 구조이다. 분포범위는 대체로 요령지방과 북한지역에서 많이 분포하고 있어 북방식이라고도 한다. 고창 고인돌유적에서는 2지구 5군(2509호)과 도산리 고인돌군(2443호)에서 각 1기씩 존재하고 있다.

* 주형지석

성송면, 대산면 일대에서 나타나는 고인돌의 모습을 주형지석 고인돌이라고 한다. 굄돌의 높이가 북방식 고인돌처럼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다. 마치 기둥 모양을 하고 있다고 해서 주형지석(柱刑支石) 고인돌이라고 명명하였다. 이 고인돌은 북방식의 판석을 이용하지 않고 굄돌을 이용해 고인돌의 높이를 북방식 고인돌처럼 높게 세운 것이 특징이다.

* 지상석곽식

죽림리에서는 고창에서만 볼 수 있는 고창식 고인돌이라 명명하는 고인돌이 있다. 이 고인돌을 지상석곽식 고인돌이라고도 하는데, 북방식 고인돌의 부류로서 여러 장의 판석을 이용해 무덤방을 만들었다. 무덤방은 약간 반지하 형태로 나타나고, 판석보다는 두툼한 상석을 가지고 있다. 이 고인돌은 북방식 고인돌 부류에 속하면서 남방식에서 나타나는 굄돌을 볼 수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고인돌의 축조 방법과 과정

 

고인돌을 축조하는 첫 번째 단계는 고인돌에 사용할 석재를 채취하는 것이다. 그 가운데서도 덮개돌을 채취하는 것이 가장 중요했다. 덮개돌의 무게는 10톤가량이지만, 큰 것은 수십 톤에 이른다. 덮개돌은 주변의 바위나 암벽에서 떼어낸다. 돌의 결과 나무 쐐기를 사용해서 떼어내게 되는데 덮개돌이나 채석장에 그 흔적이 일부 남아있다.

이렇게 채취한 덮개돌을 옮기기 위해서는 많은 사람이 필요하다. 실험에 의하면 32톤의 큰 돌을 통나무와 밧줄을 이용해서 옮기기 위해 2백여 명이 필요하다고 한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동원할 수 있었던 것에서 청동기 시대의 사회를 짐작할 수 있다.

운반되어 온 덮개돌은 미리 만들어 둔 무덤방이나 받침돌 위에 올려졌다. 개석식 고인돌처럼 지표면에 바로 올리는 경우는 문제가 없었으나 탁자식처럼 높은 받침돌 위에 덮개돌을 올리기 위해서는 다른 방법이 필요했다. 받침돌 전체를 흙으로 덮어서 언덕처럼 만들고 그 위로 덮개돌을 끌어올린 후 흙을 제거하는 방법이 이용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탁자식은 땅 위에 노출된 무덤방의 축조에 많은 노력을 기울였을 것이고, 바둑판식은 거대한 덮개돌을 이동하는데 어려운 점이 많았을 것이다.

· 축조과정

1. 채석 - 암석에 뚫은 구멍이나 바위틈에 나무쐐기를 박고 물을 부으면 나무쐐기가 물을 흡수하고 팽창해서 돌이 쪼개진다.

2. 운반 - 덮개돌과 다른 돌은 지렛대나 굴림대를 이용하여 고인돌을 축조하려는 장소로 옮긴다.

3. 매장 - 개석식, 바둑판식의 경우에는 땅 속에 무덤방을 만들고 시신을 안치한다. 탁자식은 땅을 파고 받침돌을 세운 후 시신을 안치한다.

4. 덮음 - 받침돌 전체를 흙으로 덮고 덮개돌을 올린 후에 흙을 다시 치운다. 개석식은 이런 과정 없이 바로 덮개돌을 올린다.

 

6 고인돌의 기능

 

고인돌은 보통 무덤으로 잘 알려져 있다. 하지만 무덤 이외에도 묘표석, 제단, 신앙의 대상 등의 기능을 하기도 한다.

· 무덤 - 19세기 말에 무덤일 가능성이 제기된 이후 충북 제원 황석리 13호 고인돌에서 유골이 발견되면서 증명되었다. 대부분의 고인돌이 이에 해당하며 무덤으로 사용된 증거로는 무덤방·유골·껴묻거리의 존재, 묘역(墓域)을 이루며 군집 분포한 점 등이 있다.

· 묘표석 - 묘역(墓域)을 상징하는 기념물 또는 단순히 묘역을 표시하는 기능이다. 무덤방이 없고 묘역의 특정 위치에 위치하고 있다.

· 제단 - 무덤방이 없는 고인돌 가운데는 제단의 역할을 했던 것으로 추측하는 것도 있다. 이러한 고인돌은 그 위치가 매우 돋보이고, 규모가 매우 크다는 특징이 있다. 이러한 고인돌은 사회의 협동과 결속력을 다지기 위한 상징적인 기념물이라고 볼 수 있다.

· 신앙 - 시신을 매장하고 고인돌을 축조하는 등 죽은 이에 대한 모든 행위는 일종의 신앙이다. 이러한 신앙 행위를 위해 대규모의 덮개돌을 사용했고, 종교적인 문양을 새기기도 하였다.

    * 성혈 - 고인돌에 가장 많이 새겨진 문양으로 돌에 크고 작은 구멍을 뚫은 것이다. 별자리를 형상화한 것으로 보아 성혈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 암각화 - 당시 사람들의 생활 모습이나 도구, 동식물, 기하학적인 문양 등을 새겼다. 죽은 이의 보호를 기원하는 무기나 도구, 사냥의 풍요를 비는 동물 그림, 태양을 상징하는 동심원 등이 있다.

 

7 고인돌의 주인공과 영혼의 세계

 

고인돌에 묻힌 사람은 일반적으로 지배층으로 보고 있다. 대규모의 고인돌을 축조하기 위해서는 상당한 권력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고인돌의 주인공에 대한 다양한 의견이 있다.

· 지배자의 무덤

고인돌의 거대한 크기로 보아 일반인들은 만들기 힘들었을 것이다. 고인돌을 축조하려면 많은 인력을 동원할 수 있는 권력과 경제력이 필요하며, 고인돌 제작의 사회·문화적인 배경이 있어야 한다. 경남 창원 덕천리 고인돌은 지배자의 무덤으로 보이는 대표적인 유적이다.

· 지배자와 그 가족의 무덤

고인돌이 일반적으로 무리지어 분포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모두 지배자의 무덤으로 볼 수 없다. 그래서 고인돌군을 혈연을 기반으로 한 지배 집단의 공동 묘역으로 보기도 한다.

· 전사자의 무덤

고인돌에서 발견된 유물들에는 돌검이나 돌화살촉 등이 많다. 또한 일부 유물은 유골의 머리나 배 근처에서 출토된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고인돌군을 전쟁에서 전사한 사람들의 집단 무덤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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