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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보령시의 문화재
비공개 조회수 1,485 작성일2020.06.02

보령시의 문화재에 대해좀 알려주세요..급합니다 ㅠㅜ

종목, 명칭,분류, 지정일 과 설명 써주시고요,,

한 7개 정도 알려주세요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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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
절대신
2019 지역&플레이스 분야 지식인

(충청남도 보령시의 문화재)

1.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

종 목 국보 제8호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충청남도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 80-4

시 대 통일신라

성주사터에 남아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승려 낭혜화상 무염의 탑비이다.

낭혜화상은 무열왕의 8세손으로 애장왕 2년(801)에 태어나 열세 살 되던 해에 출가, 헌덕왕 13년(821)에 당나라로 유학하여 수도를 통해 깨달음을 얻게 되었고 문성왕 7년(845)에 귀국하여 당시 웅천(지금의 보령)에 있던 오합사의 주지가 되었다.

이 절에서 선을 널리 알리고 점점 크게 번성하게 되자, 왕은 ‘성주사’라는 절 이름을 내려주었으며, 진성여왕 2년(888) 89세로 이 절에서 입적하니 왕은 시호를 ‘낭혜’라 하고, 탑 이름을 ‘백월보광’이라 내리었다.

절터 서북쪽에 세워진 이 비는 거북 모습의 받침돌 위에 비몸을 세우고 그 위로 머릿돌을 얹은 모습으로 받침돌이 심하게 부서진 채 흙에 묻혀 있던 것을 1974년에 해체·보수하였다.

얼굴의 일부분이 깨져 있는 거북은 머리 위쪽에 둥근 뿔이 나 있고, 뒤로 째진 눈에는 눈썹이 휘말려 있으며, 입은 마치 불을 내뿜으려는 기세이다. 등에는 선명한 이중의 육각무늬를 새기고, 중앙에는 제법 굵직한 구름무늬가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구름무늬 위로는 비몸을 꽂아두는 네모난 홈을 높게 마련하여 각 면을 장식하였다. 길다란 비몸은 앞면에만 비문을 새기고, 위쪽 양 모서리를 둥글게 깎아 놓았다. 맨 위에 올려진 머릿돌은 밑면에 연꽃을 두르고, 그 위로 구름과 용이 서로 뒤엉킨 장면을 입체적으로 조각하였는데, 힘찬 용틀임과 웅장한 기상이 잘 나타나 있다. 앞면에는 받침돌의 거북머리와 같은 방향으로 용머리가 툭 불거져 나와 있어 흥미를 자아낸다.

비문에는 낭혜화상의 업적이 자세히 적혀 있는데, 진골이던 낭혜화상의 가문이 아버지 대에 이르러 6두품의 신분으로 낮아지는 대목도 나타나 있어 당시 신라골품제도의 연구자료로서도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최치원이 글을 짓고 그의 사촌인 최인곤이 글씨를 썼으며, 비를 세운 시기는 적혀 있지 않으나, 낭혜화상이 입적한 지 2년 후인 진성여왕 4년(890)에 그의 사리탑을 세웠다는 기록이 있어 이 때 비도 함께 세웠을 것으로 보고 있다.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탑비 중에서 가장 거대한 풍채를 자랑하며, 화려하고 아름다운 조각솜씨가 작품속에서 유감없이 발휘되어 통일신라시대 최고의 수준을 보여주고 있다.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2.보령 성주사지 오층석탑

종 목 보물 제19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충청남도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 73

시 대 통일신라

성주사는『삼국사기』에 나오는 백제 법왕 때 창건한 오합사가 이 절이었다고 하며, 통일신라 문성왕대에 당나라에서 돌아온 낭혜화상이 이 절의 주지가 되어 번창시키니 왕이 ‘성주사’라는 이름을 내려주었다 한다. 임진왜란 때 불에 타서 현재는 절터만 남아 있다.

이 절의 금당터로 보이는 곳의 앞에 서 있으며, 뒤로 3층 석탑 3기가 나란히 서 있는데, 서로 층수만 다를 뿐 만든 솜씨는 비슷하다. 탑은 2단의 기단 위에 5층의 탑신을 올린 모습이다. 기단은 각 면마다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을 새겨두었으며, 기단의 위로는 탑신을 괴기 위한 편평한 돌을 따로 끼워 두었다. 탑신은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하나의 돌로 되어 있고, 각 면의 귀퉁이에 기둥 모양을 새겼다. 지붕돌은 밑면에 4단의 받침을 두었으며, 추녀밑은 수평을 이루다가 위로 살짝 치켜 올라갔다.

전체적으로는 통일신라시대 탑의 전형적인 모습이나, 1층 몸돌 아래에 괴임돌을 따로 끼워둔 것은 고려석탑으로 이어지는 새로운 형식이며, 통일신라 후기에 세워진 것으로 짐작된다. 각 층의 구성이 짜임새가 있으며 우아한 모습이다.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입니다.

3.보령 성주사지 중앙 삼층석탑

종 목 보물 제20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충청남도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 73

시 대 통일신라

성주사는『삼국사기』에 나오는 백제 법왕 때 창건한 오합사(烏合寺)가 이 절이었다고 하며, 통일신라 문성왕대에 당나라에서 돌아온 낭혜화상이 이 절의 주지가 되어 번창시키니 왕이 ‘성주사’라는 이름을 내려주었다 한다. 임진왜란 때 불에 타서 현재는 절터만 남아 있다.

성주사의 옛터에서 금당터로 추측되는 건물터 뒷편에 나란히 서있는 3개의 석탑 중에서 가운데에 자리잡고 있는 탑이다.

이 탑은 함께 나란히 서 있는 탑들과 마찬가지로, 상·하 2단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리고 있다. 기단은 각 층의 4면 마다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의 조각을 새겨 놓았다. 그 위로는 1층의 탑몸돌을 괴기 위한 돌을 따로 끼워두었다. 탑신부의 1층의 몸돌은 2·3층에 비해 훨씬 커 보이며, 한쪽 모서리가 크게 떨어져 나갔다. 남쪽의 한 면에는 문짝 모양을 조각하였고, 자물쇠 모양을 그 가운데에, 자물쇠 아래로 짐승 얼굴 모양의 문고리 한 쌍을 배치하였으며, 나머지 공간을 못머리 모양의 둥근 조각으로 채웠다. 지붕돌은 몸돌에 비해 넓어 보이며, 밑면에 4단의 받침을 두었고, 네 귀퉁이 끝이 살짝 위로 젖혀져 있는데 그 모습이 가뿐하다.

1층 탑몸돌을 괴는 돌의 형식이라든가, 지붕돌 받침이 4단으로 된 점 등이 통일신라 후기의 모습을 하고 있어 이 때에 만들어진 작품으로 여겨진다. 절터 안에 있는 다른 탑들에 비해 화려함과 경쾌함을 지니고 있으나, 가장 많은 손상을 입어 보는 이로 하여금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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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보령 성주사지 서 삼층석탑

종 목 보물 제47호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충청남도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 73

시 대 통일신라

성주사지에서 금당터로 보이는 곳의 뒤쪽으로 나란히 서 있는 3기의 탑 중 가장 서쪽에 있는 석탑이다. 성주사는 구체적 유래는 전하고 있지 않지만 백제 땅에 세워진 통일신라시대의 사찰로, 그 배치구조가 특이하며 이외에도 또 다른 3기의 탑과 석비, 귀부, 석축, 초석 등 많은 석조유물이 남아 있다.

탑을 받치고 있는 기단은 2단으로 되어 있으며, 기단 맨윗돌에 1층 탑몸돌을 괴기 위한 별도의 받침돌을 두어 고려석탑으로 이어지는 새로운 양식을 보여준다. 3층을 이루는 탑신의 1층 몸돌 남쪽 면에는 짐승얼굴모양의 고리 1쌍을 조각하였다. 지붕돌은 밑면에 4단씩의 받침이 있으며 네 귀퉁이는 경쾌하게 약간 치켜올라갔다. 꼭대기에는 탑의 머리장식이 남아 있지 않고, 장식을 받쳐주던 네모난 받침돌(노반)만 놓여 있다.

1971년 해체 ·수리 당시 1층 몸돌에서 네모난 사리공을 발견하였으나 그 안에 향나무 썩은 가루와 먼지만 남아 있었다고 한다. 함께 위치한 다른 두 탑에 비해 너비가 넓어 장중한 느낌이 드는 탑으로, 기단이나 지붕돌의 양식으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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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보령 성주사지 동 삼층석탑

종 목 보물 제2021호

지 정 일 2019.03.28

소 재 지 충청남도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 73

시 대 통일신라

「보령 성주사지 동 삼층석탑(이하 동 삼층석탑)」은 성주사지에 남아있는 4기의 탑 가운데 하나다. 성주사는 847년 낭혜화상(800~888, 신라 후기의 승려 무염)이 개창하여 17세기까지 사찰의 명맥을 이어오다가 조선 후기에 폐사한 것으로 추정한다. 현재 보령 성주사지(사적 제307호)에는 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국보 제8호), 보령 성주사지 오층석탑(보물 제19호), 보령 성주사지 중앙 삼층석탑(보물 제20호, 이하 중앙 삼층석탑), 보령 성주사지 서 삼층석탑(보물 제47호, 이하 서 삼층석탑)이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관리되고 있다.

이번에 지정 예고된 동 삼층석탑은 금당 후면에 다른 2기의 석탑과 함께 나란히 배치되어 있는데 국내에는 이와 같은 가람배치 예가 없다. 따라서 금당 전면에 오층석탑 1기를 조성하여 1탑 1금당 형식의 가람배치를 조성한 이후 배면의 석탑 3기를 다른 곳에서 옮겨와 추가로 배치하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금당 배면의 3기의 석탑 중 서·중앙 석탑 2기는 1963년에 보물로 지정되었으며, 동 삼층석탑은 그동안 충청남도 유형문화재로 관리해오다가 이번에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지정되는 것이다.

동 삼층석탑은 조성 양식으로 보아 다른 2기의 삼층석탑과 함께 통일신라 말기에 같은 장인에 의해 조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총 높이는 4.1m로 2층 기단위에 3개의 층으로 구성되었으며, 기단 상부에 괴임대 형식의 별석받침(별도의 돌로 만든 받침석)을, 1층 탑신 전‧후면에 문고리와 자물쇠가 표현된 문비(문짝 모양)가 조각된 점 등으로 볼 때 전형적인 통일신라 후기 석탑의 특징을 갖추고 있다. 이미 보물로 지정된 2기의 탑 못지않게 균형 잡힌 비례와 체감, 우수한 조형성을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지정가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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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보령 성주사지

종 목 사적 제307호

지 정 일 1984.08.13

소 재 지 충청남도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 73

시 대 통일신라

보령 성주산 남쪽 기슭에 있는 9산선문의 하나인 성주사가 있던 자리이다.

백제 법왕 때 처음 지어졌는데 당시에는 오합사라고 부르다가, 신라 문성왕때 당나라에서 돌아온 낭혜화상이 절을 크게 중창하면서 성주사라고 하였다. 산골에 자리잡고 있는 절이지만 통일신라시대의 다른 절과는 달리 평지에 자리하는 가람의 형식을 택하였다.

절터에는 남에서부터 차례로 중문처, 석등, 5층석탑(보물 제19호), 금당건물과 그뒤에 동서로 나란히 서있는 동삼층석탑, 중앙 3층석탑(보물 제20호), 서 3층석탑(보물 제47호)가 있고 그 뒤에 강당이 자리하고 있다. 최치원의 사산비문 중 하나인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국보 제8호)도 절의 북서쪽에 있다.

발굴조사결과 건물의 초석, 통일신라시대의 흙으로 빚은 불상의 머리, 백제·통일신라·고려시대의 기와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되었다.

성주사는 당대 최대의 사찰이었으며, 최치원이 쓴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는 신라 석비 중 가장 큰 작품으로 매우 중요한 학술적 가치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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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보령 죽도 해저유물 매장해역

종 목 사적 제321호

지 정 일 1987.09.18

소 재 지 충청남도 보령시 주포면 송학리 죽도 앞바다

시 대 고려시대

죽도에서 서남쪽으로 약 1.5㎞ 떨어진 바다 밑에 고려청자가 묻혀 있는 곳이다.

1987년 수중고고학 발굴 작업을 통해 상감청자 32점을 비롯해 많은 유물을 건졌다. 이곳에서 나온 청자류들은 약 100여 점에 이르며, 불법으로 흘러 들어간 것도 많은 것으로 보인다. 그 중 ‘기사’라는 글씨가 새겨진 것이 있어 청자의 연대를 밝히는데 큰 도움을 주는데, 기사년을 1269년으로 보는 설과 1329년으로 보는 설이 있다.

전남 강진군 대구면이나 전북 부안군 보안면의 가마터에서 제작되어 배로 운반하던 도중 이 부근에서 배가 난파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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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보령 충청수영성

종 목 사적 제501호

지 정 일 2009.08.24

소 재 지 충청남도 보령시 오천면 소성리 931 일대

시 대 조선시대

충청수영성은 조선 초기에 설치되어 고종 33년(1896) 폐영되었으며, 그 규모는 『세종실록지리지』 기록에 따르면 조선 초기 충청수영과 그 산하에 배속된 군선과 병력이 군선 142척에 수군 수가 총 8,414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충청도 서해안 지역에 위치하여 한양으로 가는 조운선을 보호하고 왜구침탈을 방지했고, 근대에는 이양선을 감시하는 등의 역할을 했다. 선조 29년(1596), 충청수사 최호가 충청수영의 본영과 속진의 수군을 이끌고 남해 한산도에 머물며 수군통제사 원균의 지휘를 받다가 이듬해인 선조 30년(1597) 7월 1일 일본군에 패하여 통제사 원균과 함께 전사했다.

또한, 충청수영성은 천수만 입구와 어우러지는 경관이 수려하여 조선시대 시인 묵객들의 발걸음이 잦았던 지역으로 성내의 영보정이 유명했고, 서문 밖 갈마진두는 충청수영의 군율 집행터로 병인박해 때 천주교 신부 다섯 명이 순교한 곳이다.

근대에 들어 도로개설이나 호안매립 등으로 인하여 훼손된 일부 구간을 제외하면 충청수영성은 나머지 성지 뿐만 아니라 그 주변 지형이 거의 원형을 유지하고 있으며 군사목적에서 마련된 충청지역 수군 지휘부로써 충남의 수군편제와 조직, 예하 충청지역 해로 요해처에 배치되었던 수군진과의 영속 관계 등을 보여주는 귀중한 유적으로 역사적․학술적 가치가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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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보령 수부리 귀부 및 이수

종 목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32호

지 정 일 1974.09.01

소 재 지 충청남도 보령시 웅천읍 만수로 582-11 (수부리 산16-6)

시 대 고려시대

비신이 없이 귀부(받침돌)와 이수(머리돌)만이 주변 산기슭에서 발견된 어느 고승의 탑비이지만 비신이 없어 주인공을 알 수 없다.

다만 조각 수법․양식․크기, 그리고 옆에 있는 뛰어난 수법의 8각 원당형 승탑(부도) 파재로 보아 고려시대 어는 유명한 승려의 탑비와 부도로 추정된다.

이수의 중앙 정면 전액에는 글씨가 없고, 다만 용과 구름 문양이 화려하고 섬세하며, 귀부에도 거북등 모양과 발 고리 턱수염 등이 생동감있게 조각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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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보령 관아문

종 목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40호

지 정 일 1976.01.08

소 재 지 충청남도 보령시 주포면 보령리 262-2

시 대 조선시대

조선시대 보령읍성의 남문이다. 장초석 위에 기둥을 한 정면 3칸 측면 2칸의 2층 누각 건물이며, 조선왕조의 중앙집권을 상징하기 위해 당시 전국에 똑같이 만들어진 관아문 양식을 충실히 따르고 있으며, 정면에는 해산루라는 현판이 걸려있는데 조선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이산해의 친필로 전해오고 있다.

보령현은 고려초부터 붙여진 이름이며 1413년(태종13)부터 현감이 파견되었고, 1652년(효종3)에는 보령부로 승격되기도 했으나 다시(1655) 보령현으로 강등되었다.

보령읍성은 1430년(세종12)에 현감 박효성 등이 축성을 완성하였고, 1432년(세종14) 현감 정태는 140칸의 관아건물을 완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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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남포관아문 <진서루.내삼문.외동헌>

종 목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65호

지 정 일 1976.01.08

소 재 지 충청남도 보령시 남포면 읍내리 378

시 대 조선시대

조선시대 여지도서에 의하면 남포읍성의 관아 건물로서 객사, 동헌, 아사, 향청, 작청, 현사 등 많은 건물이 있었으나 현재 남아있는 것은 동헌, 내삼문 그리고 관아문 진서루이다.

현감 집무실인 동헌은 정면 7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의 건물이며, 남포현 관아의 정문으로 사용되었던 관아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2층 문루 건물로 아래는 출입구, 위는 누마루를 설치하고, 팔작지붕이며, 조선왕조의 중앙 집권을 상징하기 위해 당시 전국에 똑같이 만들어진 관아문 양식을 충실히 따르고 있으며 진서루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내삼문은 정면 7칸 측면 1칸인데, 중앙은 솟을대문 1칸이 있어 출입구 역할을 하였고, 건물의 정면에는 옥산아문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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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대천 한내돌다리

종 목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39호

지 정 일 1992.08.17

소 재 지 충청남도 보령시 동대동 809-1

시 대 조선시대

대천천 하류에 있었던 다리로, 예전에는 남포와 보령을 이어주는 중요한 교통로였다고 한다. 세월이 흐르면서 물살에 쓸려 떠내려 가거나, 하천 제방공사를 하면서 파손되어 얼마남지 않은 것을, 1978년 수습하여 옮겨 두었다가, 1992년에 대천천 강변에 옮겨 일부만 복원해 놓았다.

거대한 화강암으로 만들었는데, 근처에 있는 왕대산의 돌을 깎아내어 뗏목으로 운반해온 것으로 보인다. 다리의 몸체를 받치는 기둥은 거칠게 손질한 2∼3개의 돌을 쌓아 이루게 하여, 모두 6개의 기둥이 불규칙하게 배치되어 있다. 그 위로 넓적한 판돌을 걸쳐서 다리를 완성하였는데, 원래는 12칸 돌다리라 하나 적어도 22칸은 되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다리의 높이는 낮은 편이어서 바닷물이 밀려오거나 홍수가 질 때면 물에 잠기고, 보통 때에도 가끔 잠기었다 한다.

『동국여지지』,『신안읍지』,『여지도서』등의 기록으로 보아 적어도 18세기에는 이 다리가 설치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보령에서는 해마다 향토문화축제가 열리는데 이 때 12칸 돌다리밟기제와 돌다리밟기에 많은 시민이 참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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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보령 금강암 석불 및 비편

종 목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58호

지 정 일 2000.09.20

소 재 지 충청남도 보령시 미산면 용수리 산59

시 대 조선시대

조선3대 태종의 후비였던 권씨의 소원을 빌기 위한 원당으로 무학대사의 제자 영암스님이 1412(태종12)에 건립하였는데, 건립을 주관한 사람은 후비 권씨의 아버지인 권홍과 딸인 오주이씨였다.

이때 조성된 석불은 2단의 좌대 위에 양손을 가진런히 하여 연꽃 봉오리를 받쳐 들고 다소곳하게 앉아 있는 모습으로, 미륵불로 추정되며, 재료는 사암이다.

이 금강암과 석불 조성사실을 기록한 비석은 현재 절반정보 파손된 상태의 비편으로 남아있는데, 청석에 16줄 241자만 남아있다. 비편의 기록은 조선초기 왕실의 불교신앙 모습과 금강암과 석불의 조성시기를 알려주는 자료로서의 의미가 있으며, 최근 극락전 해체 과정에서 나온 영조 때 만들어진 상량문에도 비편과 비슷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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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김좌진장군 묘

종 목 충청남도 기념물 제73호

지 정 일 1989.12.29

소 재 지 충청남도 보령시 청소면 재정리 산50 외 3필

시 대 일제강점기

김좌진(1889~1930)은 충청남도 홍성군 갈산면 행산리 출신이며, 호는 백야로 1920년 10월 일본군 대부대가 독립군 토벌을 목저으로 만주로 출병하자 소속 독립군인 북로군정서군을 백두산으로 이동시키던 중 청산리에서 일본군과 만나 전투를 전개하여 일본군 3천여 명을 살상하는 커다란 승리를 올렸다.

이 청산리 대첩은 우리나라 무장 독립운동사에서 가장 빛나는 업적이다.

1930년 1월 24일 공산주의자의 총에 맞아 사망하였는데, 만주에서 교포들의 사회장이 치러졌고, 만주에 안정되었다가 부인 오숙근 여사가 1934년에 홍성군 서북면 이호리에 이장하였다 1957년 현 위치로 다시 이장하였다.

보령시에서는 묘역 성역화 사업을 추진하고 장군의 업적과 독립정신을 계승하고자 청산리 대첩일인 매년 10월 22일에 묘소에서 각계 인사들이 모여 추모제향을 올리고 장군의 독립정신을 되새기고 있으며, 1962년 대한민국건축훈장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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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화암서원

종 목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38호

지 정 일 1984.05.17

소 재 지 충청남도 보령시 청라면 죽성로 411 (장산리 산27-1)

시 대 조선시대

화암서원은 1610년(광해군2)에 충청관찰사 정엽과 이지함의 문인인 구계우가 주도하여 건립하였으며, 1686년(숙종12)에 화암서원으로 사액되었다. 흥성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5) 철폐되었다가 1922년 다시 복설되었고, 청천저수지 축조로 1959년에 현 위치로 옮겨 세워졌다.

처음에는 토정 이지함과 명곡 이산보를 모셨고, 이어서 1723년에는 천휴당 이몽규, 고종조에는 퇴우당 이정암, 1971년에는 수암 구계우 등 5분의 위패를 모셨다.

1988년에는 이지함 선생의 영정을 봉안하였으며, 지역 유림들이 매년 춘추로 제향하고 있다.

서원의 구조는 2단으로 된 터의 앞에는 동재, 서재, 강당, 관리사 등이 있고, 뒤에는 사당이 있는 전학후묘식 구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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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신경섭 가옥

종 목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291호

지 정 일 1987.12.30

소 재 지 충청남도 보령시 청라면 장밭길 62 (장현리 688)

시 대 조선시대

조선후기의 팔작지붕으로 된 ㄱ자형의 사랑채와 ㅡ자형의 안채가 어우러져 ㄷ자형의 구조를 이룬다.

안채에는 안방․대청․건넌방․고방․부엌을 들였고, 사랑채에는 사랑방과 사랑대청으로 되었는데, 사랑방 옆에 높은 누마루를 들여 전원을 조망하는 공간으로 활용하였다.

상량문에 숭정기원후계묘라 씌어져 있어 1843년에 지어진 고택임을 알수 있으며, 가옥의 동족 대문에는 신석붕의 효자정문 현판이 걸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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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편무성 가옥

​종 목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304호

지 정 일 1988.08.30

소 재 지 충청남도 보령시 천북면 삼산농현길 80 (신죽리 401)

시 대 조선시대

조선후기 팔작지붕으로 된 ㅡ자형의 고택으로, 왼쪽에 부엌을 설치하고, 앞에는 마루를 설치하였는데, 마루 앞에는 분합문을 달았으며, 지붕이 기와에는 옹정8년이라는 글씨가 발견되어 1730년에 지어진 건축물로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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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이지함 선생 묘

종 목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320호

지 정 일 1992.08.17

소 재 지 충청남도 보령시 주교면 고정리 산27-3

시 대 조선시대

이지함 선생의 본관은 한산이고 호는 토정이다. 보령시 청라면 장산리에서 출생하였으며, 맏형 지번과 화담 서경덕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천문․지리․의약 등에 능통하였으며, 토정비결의 저자로도 널리 알려져 있고, 벼슬하기 전 한때 마포강변의 흙집 위에 정자를 짓고 살면서 스스로 호를 토정이라 하였고, 어염상고로 많은 곡식을 마련하여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기도 하였다.

평생 벼슬을 사양하다가 1573년(선조6)도덕과 학문이 뛰어난 선비로 추천되어 포천현감이 되어서는 백성의 가난해결을 위한 경제적 방안을 상소하였고, 임진강 범람을 예견하여 수많은 인명을 구제하였으며, 아산현감이 되어서는 걸인청을 지어 빈민을 구제하는데 힘쓰다가 1598년 재임 중 순직하였다.

그리하여 우리나라 실학의 효시로 알려지기도 하는데, 1686년(숙종12) 보령 화암서원에 주벽으로 배향되었고, 1761년(영조37)에 문강공의 시호를 받았다.

고만에 위치한 묘역은 선생과 그의 형제와 존․비속의 14기 묘소가 위치하고 있는데, 선생의 학문과 전해지는 여러 일화로 인하여 명당자리로 인식되어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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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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