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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독립 협회의 활동과 그 의의에 대해 서술하시오.
정보가 없는 사용자 조회수 6,003 작성일2004.05.21
학교 수행인데 아무리 봐도 잘 보르겠어요...ㅜ.ㅡ

쉽고 간단하게 해주세요~~

독립협회가 했던 대표적인 활동과 그 내용과 전체적인 것에서의 의의에 대해서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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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hks****
영웅
한국사, 세계사, 사회, 도덕 분야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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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의 정치·사회 단체.

설립연도 : 1896년(고종 33)
구분 : 정치·사회 단체
소재지 : 서울
설립목적 : 한국의 자주독립과 내정개혁
주요활동 : 《독립신문》 발간, 민중계몽



1896년(고종 33) 7월 설립한 한국 최초의 근대적인 사회정치단체이다. 정부의 외세의존정책에 반대하는 개화 지식층이 한국의 자주독립과 내정개혁을 표방하고 활동하였다. 《독립신문》을 발간하여 민중계몽에 나선 서재필(徐載弼)을 중심으로 이상재(李商在)·이승만(李承晩)·윤치호(尹致昊) 등이 적극 참여하였으며, 협회 발족 당시에는 이완용(李完用)·안경수(安壽) 등 정부 요인들도 다수 참가하였다.

초기에는 토론회·연설회 등 민중계몽운동에 힘써서 많은 젊은이들을 모았으며, 나중에는 정치문제에 관심을 표명하고 실천에 옮기게 되었다. 그 해 11월에 모화관(慕華館)을 독립관으로 개칭하여 집회장으로 사용하였으며, 영은문(迎恩門) 자리에 독립문을 세워 독립정신의 상징으로 삼았다.

1897년 2월에는 러시아 영사관에 머물러 있던 고종에게 환궁할 것을 호소하여 이를 결행하게 하였다. 그러나 《독립신문》을 통한 민주·민권 사상의 보급활동이 큰 힘을 발휘하여 지도자의 정부에 대한 비판·비난이 격화되자 당시 회장으로 있던 이완용이 전라북도관찰사로 부임한 것을 계기로 모든 정부관료 회원들이 탈퇴하였다. 따라서 윤치호가 회장이 된 이후로는 이상재·남궁 억·이승만 등 청년층이 중심이 되어 운영되었고, 서재필은 본회원은 아니었으나 뒤에서 지도·후원하였다.

외국인 고문과 교관 초빙을 맹렬히 반대하고, 지하자원 개발권 및 철도부설권을 외국인에게 허용하는 것도 외국 자본주의 밑에 국가경제를 예속시키는 처사라고 규탄하며 고종에게 거부하라는 상소를 올림에 따라 러시아 군사고문관이 본국으로 소환되고 한로은행(韓露銀行)도 개설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폐쇄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와 같이 활동이 왕성해지고 많은 사회단체 중 지도적 역할을 담당하게 되자, 1898년 종로 광장에서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를 개최하여 시국에 대한 ‘6개조 개혁안’을 결의하고 그 실행을 고종에게 주청하였다. 고종은 처음에 6개조의 실행을 약속하였으나 정부 대신들이 이권에만 눈이 어두워 약속한 지 며칠이 지나도 아무런 실행을 보이지 않았으므로 협회에서는 정부탄핵의 외침이 점점 드높아 갔고, 정부 수뇌급은 불안을 느끼기에 이르렀다.

이에 정부 수뇌급은 “독립협회가 황제를 폐하고 공화제를 실시하려 한다”고 무고(誣告)함으로써 이상재 이하 17명의 독립협회 간부를 체포하게 하였다. 독립협회는 회원을 총동원하여 석방을 요구하였으나, 정부는 어용단체인 황국협회(皇國協會)를 시켜 보부상(褓負商) 수천 명을 서울에 불러들여 독립협회 회원들에게 테러를 가하게 하여 유혈사태를 빚었다. 이에 흥분한 민중은 고관의 집을 습격하는 등 소란을 일으키게 되었다.

11월 고종은 부득이 내각을 개편하고 양 협회 대표자에게 그들의 요구를 모두 수용할 것을 약속하고 해산을 명하였다. 이로써 협회는 해산되었으나, 그 후 만민공동회라는 이름으로 존속하다가 1899년 초 해산하였고, 그 후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와 대한협회(大韓協會)로 그 정신이 이어졌다.

2004.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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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번째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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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it****
지존
사회, 도덕 24위, 한국사, 국방무기 분야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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獨立協會의 활동과 그 政治史的 의의



Ⅰ. 序

1870년대를 전후로 한 개화기의 정치사상은 크게 3가지로 분류되어진다. 기존의 가치질서를 수호코자 하는 위정척사사상, 한국의 자본주의적 발전과 이를 위한 변혁을 지향하는 개화사상, 몰락양반을 중심으로 '민중'의 역량을 강화하고자 한 동학사상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이 세 가지 사상은 당시의 국내외적 상황이나 그 자체가 가진 한계성을 극복하지 못함으로써 개화라는 변혁기의 빠른 물살을 헤쳐나가는 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 중 당시의 제국주의 팽창 다시 말해 자본주의의 발전을 가장 한국적 현실에 맞게 수용하고자 노력한 것이 개화사상이었다. 하지만 당시의 일반민중에게는 강화도 조약이래 일본의 침략정책이 임진왜란기의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침략 및 만행과 유사성을 띄고 있다는 인식으로 인해 반일감정이 팽배해 있었다. 따라서 개화파들의 개화운동은 일반인들에게 '倭夷化'로서 받아들여져, 위정척사사상의 '倭夷'觀과 동학사상의 '斥倭洋"이 민중에게 크게 호소력을 가졌던 것에 비해 개화사상의 대중화와 개화파의 세력보존 및 그 확대는 극히 곤란한 상황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에 1890년대 후반기에 있어서 개화운동이 가지는 특징은 종래의 한계성이라 할 수 있는 '위로부터의' 부르조아 개혁운동의 제약을 넘어서, [독립신문] 및 독립협회에 의한 계몽운동을 통하여 개화사상이 대중 속으로 점차 침투하였고, 이를 토대로 하여 만민공동회에 의한 '아래로부터의' 대중적 정치운동으로 전환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1890년대 후반기의 개화운동이 대체로 대중운동과 결합하게 된 주요한 원인의 하나는, 이전의 대표적 개화운동이었던 갑신정변과 갑오개혁에서 나타난 일본군사력에의 의존을 탈피함으로써 '개화는 倭夷化'라는 기존의 관념이 민중 사이에서 점차 지양되어, 점차로 올바르게 인식되기에 이르렀다는 사실과 관련이 있다.
이에 이러한 사항들을 바탕으로 1890년대 말의 대표적인 개화운동이었던 독립협회의 활동을 규명해 봄으로써 우리의 선조들이 개화기라는 혼란기를 어떻게 대처해 나갔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Ⅱ. 시대적 배경

1895년 10월의 경술국치와 11월에 성립된 제3차 김홍집 내각의 단발령 강행은 춘천·제천을 중심지로 하는 반일의병운동의 발발과 이에 따른 아관파천의 원인을 제공하였다. 이 시기 정치적 상황을 계략적으로 살펴보면, 내각의 의정부 전환·전제군주권 부활로 표현될 수 있다. 아관파천은 당시 수구파의 대표적 파벌이었던 정동파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갑오개혁에 의한 성과라 할 수 있는 전제군주권의 제한조치를 철폐하고, 이전의 세도정치로 역행되는 징조를 낳게 하였다. 이러한 1890년대 후반에는 그 개화풍조도 주로 일부의 대도시에 한정됨으로써 그 도시에 있어서의 개화운동은 보다 농후하게 시민적 성격을 띄게 되었다. 그 반면 지방의 광범한 농촌지대에서는 지방관들에 의한 봉건적 학정과 수탈이 온존하여, 각종 형태의 농민 봉기가 줄을 잇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도시와 농촌에 있어서 개화풍조의 이중적 격차를 현저히 나타나게 하였고, 자연 도시에 있어서의 자유민권운동과 농촌에 있어서의 농민 봉기의 내용과 형태를 달리하게 하였다.
대외적으로는 1890년대 후반기의 역대 정부는 한국을 둘러싼 열강간의 각축의 와중에서 자주적으로 외국열강들의 침입을 대처할 수 없었다. 형식적으로는 청일전쟁이후 청과의 사대관계를 단절, '光武'라는 연호 사용과 '대한제국'이라는 국호를 사용하여 자주적 의미를 부각시키고자 하였으나 러-일간의 대립을 중심으로 얽혀 있던 미·영·프·독 등의 대립의 와중에서 자립경제건설에 필수불가결했던 각종 경제적 이권을 열강들에게 매도할 수밖에 없었다. 이권침탈에 있어서 일본이 자뭇 타국에 비해 늦은 것처럼 보였던 것은 경술국치 후의 반일감정이 고려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본거류민은 그들의 거유지를 중심으로 착실히 증가되어 1896년부터는 인천·서울·부산·원산 등의 일본상인이 隊商組織을 만들어 집단폭력을 행사함으로써, 조약에서는 금지된 내륙지방까지 행상범위의 확대를 도모하는 등 그 경제적 침략을 강화하였다. 이외에도 한반도에서 강화된 러시아의 힘을 억제하기 위한 영-일간의 담합 ―후에 영-일동맹으로 발전 ― 등은 한국의 자주독립과 부르조아적 발전의 길을 막는 장애물이 되었다.

Ⅲ. 독립협회의 활동

1) 독립협회의 사상적 계보

1880년대의 개화파는 변법적 개화파와 개량적 개화파로 구분될 수 있다. 그러나 전자의 경우는 갑신정변의 실패에 의해서 후자는 갑오개혁의 실패로 인하여 그 중심세력은 커다란 타격을 입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화운동이 연속성을 가지고 발전하게 된 원인은 한국사회 발전의 객관적 요구를 잘 반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을 바탕으로 독립협회와 이전의 개화파들을 비교해 보면 그 운동방법에 있어 차이는 있지만, 부패한 정치를 개혁하여 독립의 내실을 거두고자 했다는 점에서 공통된 목표를 가진다고 할 수 있다. 독립협회의 3거두라 할 수 있는 서재필, 윤치호, 이상재 역시 변법적 개화파의 직접적 계승자로 서재필과 윤치호는 김옥균으로부터, 이상재는 홍영식으로부터 매우 큰 영향을 받은 인물들이다.
하지만 독립협회의 활동이 기존의 개화운동에 연속되면서, 그 약점을 극복하고 보다 발전적인 형태를 띄게 됨으로써 가지게 된 특징으로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사항을 들 수 있다. 첫째, 종래의 개화파가 입헌군주제를 지향한데 비해 독립협회의 경우 '愛君愛民'을 대의명분으로 내세우면서도 부르조아 공화주의로 많이 기울어져 있었다. 둘째, 독립협회는 개화운동을 광범위한 대중운동으로 전환시켜 언론·출판·집회·결사의 민주주의적인 원리에 따라서 국정개혁을 이루고자 하였다.

2) 독립신문의 계몽적 활동

독립협회의 계몽적 활동으로 가장 대표적인 것을 꼽으라면 당연히 독립신문의 발간을 들 수 있다. 이러한 독립신문이 갖는 의의를 고찰해 보면, 종래 신지식과 신학문에 격리되어 있던 서민층을 각성시키고, 자유민권사상의 신장을 도모하고 봉건적 압정과 침체 속에 억눌려 있던 대중의 에너지를 발양시킴으로써, 국정개혁과 자주독립의 원동력을 개발하고, 개화운동의 대중적 기반을 확립한 점이다.
이러한 독립신문의 의의를 뒷받침하는 것으로는 순국문 활자의 사용으로 인한 독자층의 대중화라는 것과 순수민간신문으로써 그 사상적·정치적 입장 - 대한의 독립과 진보·국민의 자유권 옹호, 외국에의 의존과 수구·전제군주권의 반대 -을 명확히 하였다는 것을 들 수 있다.

3) 국권옹호를 위한 활동 - 만민공동회

아관파천 이후 발생하였던 친러적인 수구파 인물들의 득세와 그에 따른 한국의 경제적·정치적 주권이 실추되자 독립협회는 상소와 집회라는 방법을 통해 이를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이 비판은 당시 수구적 정부에 큰 타격을 가하여 당시 한국의 군사 및 재정고문이었던 러시아인을 귀국시켰고 한러은행의 문을 닫게 하였으며, 절영도 조차문제의 취소를 가져와 러시아의 극동정책 중심을 한국에서 만주로 옮기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개화파의 후신으로써 자주독립의 기초를 공고히 한다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국정개혁이라고 하는 과제에 직면할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수구파와의 대결은 필수적이었다. 궁중정치의 달콤함을 잊지 못하는 수구파와 열강의 이권배들은 독립협회에 의해 공개되어 지는 그들의 진면목에 당황하였고, 만민공동회라는 집회에서 이에 대한 대중토론과 성토가 행해짐으로써 축출될 수밖에 없었다. 이에 수구파들은 독립협회에 대한 반동세력으로 황국협회를 조직 독립협회의 활동에 커다란 물리적 제약을 가하였다.

4) 민권신장·의회설립운동

독립협회가 민권신장 문제로서 제기한 중요 문제는 수구적인 권력층의 私情과 자의에 의한 형벌의 남용으로부터 법에 비추어 인권을 지키는 것이었다. 따라서 일체의 범죄에 대해서 행정권의 개입에 반대하고, 재판소가 공개재판을 하여 신법에 비추어 공정한 재판을 할 것을 요구하고 감시하였다. 이는 독립협회의 회원에 대한 정치적 탄압 뿐만 아니라 정적에 대하여도 이같은 원칙이 고수되어야 함을 주장한 것으로 기존의 처벌방식이었던 연좌·노륙법에 대한 폐기를 주장한 것으로 받아 들일 수 있다.
1880년대 개화파의 민권사상은 독립협회의 의회설립 요구에 의해 보다 높은 단계로 발전하였다. 이는 독립협회의 상소문이나 독립신문의 논설에서 여러차례에 걸쳐 언급된 것으로 그 구체적 내용을 살펴보면, 인재의 등용, 정령 순의와 채택은 모두 민의에 따라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구주제국과 같이 입헌군주제 아래에서 의회를 설립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독립협회의 주장은 당시 박정양 정부에 의해 채택되어 중추원 개정안에 효과적으로 반영되었다. 이 중추원 개정안에서는 의정부가 중추원의 결의에 구속받을 것, 국무대신이 중추원에 대하여 책임을 진다는 등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특히 중추원의 의결사항에는 의정부의 자문사항, 중추원 독자의 임시 건의사항 이외에도 국민으로부터의 헌의사항이 있었다. 이는 반관반민에 의한 의회정치로의 과도적 형태지만 당시의 상황으로 미루어 짐작해 볼 때 무척 민주주의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것으로 파악해 볼 수 있다.

Ⅳ. 독립협회가 가지는 정치사적 의의

1890년대 후반기의 시점에서 한국에서의 사회발전의 객관적 요구를 담당하였던 독립협회와 그 지도자를 역사주의적 입장에서 평가하면, 정치목표에서는 부르조아적 민주주의 요구가 의회설립 운동으로 까지 이어졌으며, 운동의 형태로서는 소수 개혁파 운동에서 대중적인 만민공동회의 운동으로 발전하였고, 경제적 후원세력의 측면에서는 전례없이 서울 시전상인들의 지원을 받았다는 점에서 기존의 개화운동과는 매우 다른 특징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독립협회는 수구파들의 비상공세수단에 대처할 준비가 없었고, 그 활동에 있어 서울에만 한정되었으며, 도시와 농촌간의 사상적 괴리 현상을 극복하지 못함으로써 대략 2개월에 걸친 봉건반동과의 투쟁에서 좌절하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립협회는 독립신문이라고 하는 유력한 언론의 무기와 만민공동회라는 대중운동으로 지원받으면서 한국의 개화운동에 커다란 공적을 남겼다. 첫째, 한국민중의 민족적 자주의식을 앙양시킨 것이다. 둘째, 한국민중에게 자유민권사상을 보급시켜 권리의식을 높였고 이로 인하여 봉건적 신분제도를 지탱해 온 명분관념을 급격히 붕괴시켰다. 셋째, 국권옹호와 민권신장을 목표로 한 독립협회의 정치활동이 만민공동회라는 새로운 형태의 대중운동과 결합하고 그것으로 지탱되어 부분적이나마 일정한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1898년 12월 25일의 탄압으로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의 운동자체는 해체되었지만, 민주주의의 씨앗이 뿌려져 그 사상은 민중사이로 깊은 뿌리를 내렸다. 그것은 1900년대 후반기에 애국계몽운동의 형태를 취하면서 다시 나타났다.

2004.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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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희
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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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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