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혜영 정치부 차장
[로그인]백무현

채 두 평도 안되는 병실에서 그는 암과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진통제를 맞고 잠들면 깨어나지 못할까봐 몸을 반쯤 일으켜 세워 앉았다. 80㎏이었던 몸무게는 어느새 40㎏대로 내려앉았다. 온몸을 파고드는 통증 때문에 뜬눈으로 밤을 새운 날도 많았다고 한다. 그의 야윈 손을 잡고 “늦게 와서 미안하다”는 말밖에 할 수 없었다. 대화 끝엔 늘 “고마워”라는 인사를 빠뜨리지 않았던 그. 이제서야 찾아온 옛 동료들에게 또 “고맙다”고 한다. 마음에서 하염없이 거친 파도가 인다. 시사만화가, 화백, 그리고 정치인 백무현. 그가 많이 아프다.

그는 신문에 만평을 그리는 화백이었다. 1988년 평화신문 창간 이후 붓을 잡았다. 1998년부터 2012년까지 대한매일(현 서울신문) 지면에서 ‘백무현 만평’을 연재했다. ‘백무현 만평’은 숱한 화제를 몰고 다녔다. 2007년 4월18일자 서울신문 2면, 미 버지니아 공대 총기난사 사건 때 부시 대통령의 말풍선(“한방에 33명, 이로써 우리의 총기기술 우수성이 다시 한번…”) 만평은 국제적 논란이 됐다. 그는 “미국의 허술한 총기관리 실태를 고발하기 위해서”라고 했지만 범인이 한국인으로 밝혀지자 그에겐 ‘매국노’라는 국가주의 관점의 비판까지 쏟아졌다. 희생자 33명의 대참사를 희화화했다는 것이다. 서울신문은 ‘백무현 만평’을 한동안 중단했고, 그는 만평 대신 대국민 사과문을 냈다.

평소 정치 이면에 천착했던 그의 만평은 이후 정치 속살을 파고들었다. 2012년 4월 총선의 통합민주당 공천은 ‘도로민주당’, 새누리당의 선거 마지막 주자는 ‘색깔론’, 부정경선 의혹에 휩싸인 통합진보당과 반세기 전 이승만 전 대통령에게 항거했던 진보당…. 2005년부터는 전직 대통령을 만화로 그리기 시작했다. 친일과 유신독재의 <만화 박정희>, 광주학살과 군부독재의 <만화 전두환>, 민주화 역정의 <만화 김대중>, ‘노무현 잔혹사’를 그린 <만화 노무현>으로 이어졌다. <만화 박정희> <만화 전두환> 출간 무렵이었다. 그의 소개로 처음 맛본 장어탕을 앞에 두고 ‘화백 백무현’의 신변을 걱정하는 술잔이 오갔다. 그는 “말도 마소. ‘죽여버리겠다’는 협박전화가 한두 통이 아녀. 허허” 하며 웃어 보였다. 그래, 그는 광주전남언론노조협의회 의장, 시사만화작가회의 초대 의장이었지. 단단한 사람이니 괜찮을 거라 안심했다.

그는 더 좋은 세상을 위한 ‘화백 백무현’의 효용 가치를 오랫동안 고민했다. 그 결과 한 컷짜리 만평으론 부족했고, 전직 대통령 만화집만으론 모자랐나 보다. 2012년 대선을 앞두고 “이명박·박근혜 정권의 연속 집권만큼은 막아야겠다”며 미련 없이 언론사를 그만뒀다. 주변에선 무모하다며 말렸지만 그는 문재인 대선캠프 대변인을 맡으며 현실 정치 한가운데로 뛰어들었다. 하지만 정권교체에 실패했다. 지난 4월 총선에선 “30년 독식해 온 지역 기득권 정치를 바꾸겠다”며 고향(전남 여수을)에서 출마했다. 3선의 제3당 원내대표인 상대 후보는 강했다. 앞뒤 계산 없이, ‘좋은 세상 만들겠다’는 의분만으론 버거울 수밖에 없었다. ‘국회의원 백무현’의 꿈은 다음으로 미뤄졌다.

그의 야윈 몸만큼이나 수척한 세상을 지나고 있다. 지금, 백무현의 정치는 무엇이었는지 듣고 싶다. 만평으로 못했던 걸 정치로는 할 수 있겠더냐고 묻고 싶다. 병실을 나서면서 다시 그의 손을 잡고 응원했다. 단단한 힘이 느껴졌다. 어쩌면 그는 정치 안에서 만평이 더 그리웠을지 모르겠다. 그래서 정치도 만평도 다 풍부해졌다고 자랑할 것만 같았다.

남아공 넬슨 만델라 전 대통령의 수감 생활 27년을 버티게 해준 시 ‘인빅터스’를 그에게 건넨다. ‘세월의 위협은 지금도 앞으로도/ 내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지 못하리라/ …/ 나는 내 운명의 주인이요/ 나는 내 영혼의 선장일지니.’ 일어나라 백무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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