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A 영역
방학숙제가 '우리 고장의 문화재 조사하기' 라고 되있는데,
제가 사는곳이 목포 죽교동라서
목포시 죽교동의 문화재를 좀 조사하려고 하는데요..
원래 저 스스로 해야되지만..
정말 죄송 ㅠ ㅠ
참고만 할테니깐..
목포시 죽교동의 문화재랑 사진, 설명을 올려주시면 안될까요?
올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ㅜㅜ
내공 200 이라도 적은 내공이지만 꼼꼼한 내용에다가 노력한틈(?)이 보이면 감사내공까지 추가드리고 나쁜답변은..
KIN 입니다~~ ㅇㅋ???

답변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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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목포시 죽교동의 문화재)
1.목포 달성사 목조지장보살삼존상 및 시왕상 일괄
종 목 보물 제2011호
지 정 일 2019.01.03
소 재 지 전라남도 목포시 유달로 173 (죽교동 317) 달성사
시 대 조선시대
‘목포 달성사 목조지장보살삼존상 및 시왕상 일괄’은 1565년(명종 20) 향엄 등 5명의 조각승이 참여하여 조성한 작품으로, 지장삼존, 시왕, 판관 및 사자 등 19구로 이루어진 대단위 불상군이다.
달성사 불상은 1719년(숙종 45) 중수된 기록이 있다. 수조각승 향엄은 16세기 전‧중반기에 활동한 조각승으로, 이 불상 외에도 1534년(중종 29) 제주도 서산사 목조보살좌상을 조성하였다. 명부전 중앙 불단에 지장삼존상이, 좌우 정면 벽면에 각각 3구씩의 시왕, 그리고 좌우 측면 벽면에 각각 2구씩의 시왕이 배치되어 있다. 목포 달성사 불상은 임진왜란 이전에 조성된 불상조각 중 지장보살삼존상과 시왕상이 모두 전해지고 있는 유일한 작품이다.
더욱이 지장보살상의 경우 오른쪽 다리를 왼쪽 무릎에 올린 반가 자세를 취하고 있어 무위사 지장보살상, 청량사 지장보살상과 더불어 조선 전기의 보기 드문 형식으로 희소성과 조형적 가치가 뛰어나다. 향엄이 주도한 불상에서 보이는 단정하고 사실적인 신체 표현과 우아한 형태미가 돋보이는 작품으로, 조성발원문과 중수발원문이 모두 현존하고 있어 불교조각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 작품이다.
2.목포 달성사 목조아미타불삼존불좌상
종 목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28호
지 정 일 2000.12.13
소 재 지 전라남도 목포시 유달로 173 (죽교동 317) 달성사
시 대 조선시대
달성사는 목포시내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유달산의 동남쪽 중턱에 있다. 목포시에서 발행한 『내고장전통가꾸기』(1981년간) 및 목포시사(1987년간, 인문편) 등에 의하면, 1913년 음 4월8일, 노대연선사가 창건하였다고 기록되고 있다. 현재 달성사의 건물로는 아미타삼존불을 봉안한 법당 1동과 지장보살 및 시왕상을 모신 명부전 1동, 요사채 2동, 산신각 및 종각 각1동과 3층석탑(3년전 조성) 1기가 있다.
적색의 필사본인 조성발원문(14㎝×25㎝)에 따르면 1678년(숙종 4) 만덕산 백련사에서 조성하였음을 알 수 있다. 17세기 전남에서 조성된 순천 송광사 응진당삼존불, 진도 쌍계사 삼존불, 강진 옥련사 석가여래좌상 등에서 보이는 사각형에 가까운 상호, 작고 뾰족하면서도 낮게 표현된 육계, 계란형의 계주 등의 양식을 따르고 있다. 통견의 법의, U자형의 옷주름, 일자형의 띠줄과 연화형의 승각기, 우측 어깨의 반단, U자형의 군의자락 등이 주목된다.
이 아미타삼존불은 1678년이란 절대연대를 알 수 있는 17세기 후반의 목조불상으로서 도내에서는 몇 예가 안되는 매우 귀중한 자료라 하겠다.
3.목포 달성사 목조지장보살반가상
종 목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229호
지 정 일 2000.12.13
소 재 지 전라남도 목포시 유달로 173 (죽교동 317) 달성사
시 대 조선시대
달성사 지장보살은 그 재료가 목조이며, 우측 다리를 밑으로 내리고 좌측 다리만 가부좌를 한 반가상이다. 민머리, 눈과 눈썹, 코와 입 등의 조각수법이 사실적이다. 불교조각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판단되는 지장보살반가상으로서 임진왜란 이전에 조성한 예는 국내에서 유일하다.
따라서 본 지장보살상은 그 조성연대와 반가상이라는 희귀성을 고려해 볼 때 우리나라 조선시대 초기 불교조각사연구에 귀중한 자료라 판단된다.
4.목포시사
종 목 전라남도 기념물 제21호
지 정 일 1976.09.30
소 재 지 전라남도 목포시 유달로 165 (죽교동 330-3)
시 대 조선시대
시사는 서로 뜻이 통하는 문학에 뛰어난 선비들이 계절에 따라 자연과 시를 융화시켰던 풍류의 장소이다. 목포시사는 한말의 대학자인 정만조가 1907년에 세운 건물로 전국 각처에서 200여명이 해마다 봄, 가을 2회에 걸쳐 백일장을 개최하여 한시의 명맥을 오늘날까지 이어 오는 유래 깊은 시사이다.
정만조는 고종 26년(1889) 문과에 급제하여 예조참의, 승지를 거쳐 내부참의, 규장각부제학 등을 지냈다. 광무년간 정변시 진도에 유배되어 10여년 간을 보내기도 하였는데, 이 당시 문학, 서예 등을 가르쳐 많은 인사를 배출하였고, 목포시사를 세워 퇴폐한 학문의 기풍을 바로잡아 지방 문화에 많은 공적을 남겼다.
건물 규모는 앞면 4칸·옆면 1칸 반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시사 안에는 정만조의 문집을 비롯하여 한말의 전적, 한시 현판들을 다수 소장하고 있다.
5.유달산 산왕대성전터
종 목 목포시 문화유산 제3호
지 정 일 2012.05.21
소 재 지 전라남도 목포시 죽교동 산42-2 일원
시 대 조선시대
유달산 일등봉 쪽에서 이등봉 쪽으로 내려가다가 왼편으로 나있는 샛길로부터 30여m 거리에 자리하고 있다. 고하도와 목포해양대를 바라볼 수 있는 바다를 향해 열려있는 형태의 작은 공터이다. 흔히 ‘대성전터’라고 불리는 이곳의 바닥면에는 작은 암자가 있었던 주춧돌의 흔적이 남아 있다.
정면 중앙부 바위 면에 ‘산왕 대성전’이라는 글씨가 새겨져있고, 왼편 바위면 두 곳에는 그 내력이 알려지지 않은 암각상들이 새겨져 있다. 얼굴부분이 훼손되어 전체적인 모습을 정확히 파악할 수는 없는 신상의 모습으로, 도교적인 색채와 민간신앙적인 요소가 복합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우측 지면에는 아래로 연결되는 계단이 만들어져 있는데, 아래쪽에‘향천정’이라는 샘이 조성되어 있다.
향천정이 조성된 장소는 작은 동굴의 형태를 나타내며, 둥굴을 받치는 형태의 기둥 2기가 인공적으로 만들어 세워져 있다.
6.목포 유달산 마애불입상
종 목 목포시 문화유산 제7호
지 정 일 2012.05.21
소 재 지 전라남도 목포시 죽교동 산42-2 일원
시 대 조선시대
유달산 마애불은 마당바위 밑에서 소요정으로 가는 오솔길의 중간 정도에 조성되어 있다. 관련된 기록이나 구전되는 이야기도 없어 정확한 내력이 확인되지 않는다.
유달산에 남아 있는 몇군데 불교 유적 중 하나이다. 커다란 바위에 음각 형태로 선위주로 불상이 새겨져 있다.
7.목포 보광사 석조석가여래좌상과 짓샘
종 목 목포시 문화유산 제8호
지 정 일 2012.05.21
소 재 지 전라남도 목포시 유달로 203-1 (죽교동 280)
시 대 일제강점기
유달산 난공원의 좌측면 산자락에 자리하고 있다. 보광사는 1929년 10월 30일 박운계 스님이 창건하였다.
법당 건물이 하나 밖에 없는 작은 절인데, 석조미륵상을 모시고 있다. 석조미륵상 밑에는 산고에 효험이 있다는 ‘짓샘’이 있다.
8.유달산 미륵불 암각
종 목 목포시 문화유산 제9호
지 정 일 2012.05.21
소 재 지 전라남도 목포시 유달로 173 (죽교동 317-3)
시 대 일제강점기
미륵불 암각은 달성사에서 유선각 쪽으로 올라가는 부근에 있다. 달성사로부터 약 200미터 정도 떨어진 위치에 하늘을 향해 솟아있는 바위 절벽에 조성한 것이다.
바위 중앙면에 '미륵불'이라는 글자를 양각으로 새겨 놓았고, 좌측에는 '대세지보살 나무아미타불', 우측에는 '관음보살', '세존응화 이구오이년을축사월'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이를 통해 조성년대가 1925년 을축년 4월을 나타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래쪽 바위 면에는 '?건주좌선대대련'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노대련은 달성사의 창건주이다. 이곳이 노대련 창건주가 좌선하던 장소였음을 뒷받침한다.
9.공생원 사무실
종 목 목포시 문화유산 제19호
지 정 일 2012.05.21
소 재 지 전라남도 목포시 해양대학로 28 (죽교동 470-1)
시 대 일제강점기
1928년 기독교 전도사로 ‘거지대장’으로 불렸던 윤치호가 7명의 부모 잃은 아이들과 같이 생활하게 된 것이 공생원의 시작이다.
그는 1938년 봉사정신이 각별했던 일본인 여성 다우치지즈꼬(윤학자)와 결혼하여 그와 함께 고아들을 보살피는데 전념했다. 1951년 광주에 식량을 구하러 갔던 윤치호가 행방불명되었으나 윤학자는 일본에 돌아가지 않고 공생원을 돌보았다. 그는 그 공로로 1962년 문화훈장을 받고 1965년 제 1회 목포시민상을, 1968년 일본 황실에서 남수포장을 받는 등 민간대사로써 한일 가교의 중요한 역할을 했다.
공생원은 한국 사회 복지의 뿌리가 되어 현재까지 4천명의 아이들이 이곳에서 자랐다.
2019.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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