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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백제요백제백제 내공다드림 빨리빨리
정보가 없는 사용자 조회수 2,987 작성일2006.09.08

저는 신촌초등학교에 다니고있는 4학년 학생입니다

선생님이 사회시간에 모둠을만들어서

백제에대해서 조사하라는 내용이 나왔는데요

네이버 똑똑한 여러분에게 좀 도움을 받고자왔습니다

백제의 역사에대해서 자세히좀 많이좀 알려주셨으면합니다

 

 

빨리좀부탁드립니다 있는내공다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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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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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의 역사는 크게 세 단계로 나눌수 있습니다.

 

한성시대 웅진시대 사비시대 이렇게 나눌수 있고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백제한성시대

 

초기 백제국가의 성립은 온조와 비류로 대표되는 유이민집단의 남하, 정착에서부터 시작되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리고 백제사의 전개과정에서 3세기 이전의 초기 백제사는 다양한 계통의 유이민 집단이 한강 유역 각지에 정착하여 개별적으로 발전해가면서, 차츰 하남위례성의 백제국을 중심으로 통합되는 과정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고이왕 이전의 백제사를 결코 온조를 시조로 하는 백제국만의 역사로 단정지어서는 안된다. 여기에선 그러한 점에 초점을 맞추어 우선 건국신화를 통해 백제형성 집단의 성격을 파악하고, 그 후 초기 백제사의 전개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1) 건국설화를 통해 본 백제의 형성

백제의 형성에 관해서는 설이 분분하다. 그러나 {三國史記} 권 23 온조왕본기와 그 별전에는 두 가지 이설이 보여지고 있다. 그 하나는 백제의 시조가 고구려의 건국자인 주몽의 둘째아들 온조라는 설이다. 그 내용을 {三國史記} 원전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백제의 시조 온조왕은 그 부가 추의(鄒矣)니 혹은 주몽이라고도 한다. 주몽은 북부여에서 도망하여 졸본부여로 왕 후에 부여왕이 되어 두 아들을 낳았는데 장자는 비류라 하고 차자는 온조라 하였다. 주몽이 북부여에 있을 때 낳은 아들 유리가 와서 태자가 되자 비류와 온조는 태자에게 용납되지 못할까 두려워하여 무리를 이끌고 남하하였다. 드디어 북한산에 이르러 負兒嶽에 올라 가히 살 만한 곳을 바라볼 새, 비류는 해변에 살기를 원해 무리를 나누어 미추홀(지금은 인천)로 가서 살았다. 이에 온조는 하남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十臣으로 輔翼을 삼아 국호를 十濟라 하였다. 비류는 미추홀의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안거할 수 없었으므로 돌아와 위례를 보니 도읍이 안정되고 백성이 편안한지라 참회하여 죽으니, 그 臣民이 모두 위례에 歸附하였다. 올 때에 백성이 즐겨 좇았으므로 후에 국호를 백제라고 고쳤다.

또 하나의 설은 주몽은 온조의 의부이고, 백제의 건국자는 온조의 형인 비류라는 것이다. 즉 그들 형제의 생부는 북부여계의 優台이며, 그들은 생모가 주몽에게 개가한 후 주몽의 원자가 나타나 태자로 책봉되자 비류가 온조와 무리를 이끌고 미추홀에 이르러 살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설 모두 그대로 믿기 어려운 실정이지만, 대체로 이 둘은 비류가 형이라는 사실에 있어서는 일치하고 있다. 그리고 이 삼국사기의 기록을 토대로 여러 견해가 나오고 있다. 우선 주몽과 온조를 부자관계로 기록한 사실에서 백제를 건국한 주체세력이 북부여 계통의 고구려 유이민이었다는 사실, 그리고 비류집단은 그 설화의 내용으로나 명칭상으로 보아 비류수 유역의 주민과 관련있는 집단이라는 점, 또 비류가 형이라 함에 초기에는 미추홀 집단이 한수 유역 각지의 유이민계 제집단들의 연맹체에서 주도권을 장악하였던 세력이다가 뒤에 위례를 중심으로 한 집단에 의해 대체되었다는 사실 등이 주장되고 있다. 이런 주장들 외에도 여러 견해들이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2. 백제건국 집단의 남하와 소국 통합

1)선주민집단

백제의 이주민 집단이 한강유역에 이르기 전, 즉 기원이전 한강 유역의 선주민세력들의 유적은 대부분이 강을 따라 분포하고 있었으며, 이는 농경이 활발하게 행해졌음을 시사하고 있다. 청동기 초기 유적 대부분에서 반월형석도가 출토되고, 또 여주 흔암리에서 탄화미가 발견된 사실에서 그러한 추정이 가능하다. 또 이들 유적들은 일정 지역을 단위로 群을 이루고 있었는데, 이는 농경, 수렵, 어로 등 당시의 경제 생활과 관련된 생활 환경 조건에 의한 것으로 생각되며, 다음 단계의 정치적 성장의 기반으로 파악할 수 있겠다. 그러나 이들 유적들은 대단위의 집단군이기는 하나, 그 대표지역이 상정될 만큼 집약적인 것은 아니었다. 결국 아직까지는 각지역 집단들을 하나의 정치세력으로 결속시킬 만한 강력한 지배세력은 등장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아마도 보다 강력한 지배세력의 등장은 청동기 문화 후기 단계에서나 가능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청동기 문화 후기 钥계는 세형동검 문화의 시기로 한반도 북부에서는 일련의 정치적 변화에 수반하여 철기가 본격적으로 보급 사용되는 시기이다. 이 시기에 있어 주목할 점은 유적들이 강에 접해 있는 현상이 보다 뚜렷해졌다는 점과 유적 분포 중심이 초기와 달리 내륙쪽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아마도 농경의 본격화라는 추이와 관련있는 듯 싶다. 그리고 초기의 산발적인 분포상과는 달리 보다 뚜렷하게 群을 이루고 있는 점도 주목된다. 특히 지금의 서울시 일원에서 유적의 밀집도가 가장 높은데 이는 청동기 문화 후기 단계에 들어와 서울지역이 한강유역의 집단군중에서 가장 많은 수의 주민이 거주하며, 이 일대에서 가장 우월한 정치제가 성장한 결과로 파악할 수 있다.

그런데 한강 유역에는 전형적인 세형동검 문화가 그리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고 있다. 이것은 신라 가야의 발전의 모체가 되는 낙동강 유역과 비교할 때 큰 차이점으로 지적될 수 있다. 한강 유역의 경우 무문토기 - 지석묘 단계에서 대규모적인 세형동검문화의 유입을 거치지 않고, 그 다음 시기인 기원 이후 곧바로 김해식 토기 - 철기 문화 단계로 넘어갔을 가능성이 큰 것이다. 그렇다면 청동기문화 후기 단계에 서북한 지역의 위만조선계 이주민이 정착하지 않고, 그 다음단계에 본격적인 철기 사용집단이 내주 하였으리라는 추측이 가능해지며, 이 집단이 바로 백제 건국의 충추세력이 되는 온조 등의 유이민집단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2)백제 건국집단의 남하

유이민집단이 본거지를 떠나 남하해 오는 이유는 확실하지 않지만, 온조와 비류집단이 북부여에서 새로 남하해 온 유리세력에 밀려 떠나온 사실과 그로 인해 정치적으로 세력이 약화되어 파직당한데 대한 불만으로 남하하는 예를 보더라도, 이들의 이동은 각 부족단위로 이루어지는데, 이들 족원들은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나타나는 북부, 동부 등의 전신이었을 것이다. 또 초기 백제의 부로 표현되던 세력집단은 온조집단과 마찬가지로 유이민계통이었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나 남하해오던 시기와 경로, 혹은 출자 등이 조금씩 달랐을 것으로 보인다.

다음으로 유이민들로 구성된 한강유역 여러 소국의 하나에 불과하던 서울의 伯濟國이 성장하여 다른 집단들을 통합하며 백제를 칭하게 되는 과정을 살펴보겠다.

온조집단이 남하하여 최초로 정착한 지점이 하북위례성이었음은 널리 인정받고 있는데, 하북위례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견해가 분분한 실정이다. 온조집단이 하북위례성에 머문 기간이 그리 길지 않아서 뚜렷한 자료를 남기지 않아서라고 볼 수 있다. 온조집단은 곧 하남위례성으로 천도하게 되는데, 하남위례성은 지금의 서울시 송파구, 강동구 일원에 위치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지역에는 여러 성터가 밀집 분포되어 있는데, 성의 규모나 입지조건 등에서 몽촌토성(夢村土城)이 가장 중요한 성이었다고 생각되며, 또 이 성이 하남위례성이었을 가능성은 매우 크다.

청동기 문화 후기 단계 이후 한강유역에서 가장 많은 수의 주민이 거주하고 비교적 많은 수의 청동기 사용 집단이 소재하던 서울 지역에 정착할 수 있었다는 사실에서 온조집단은 애초부터 여러 유이민집단 중 가장 우세한 집단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힘의 우세는 후에 하남위례성집단(백제국)을 중심으로 연맹체를 형성하게 되는 근본원인이 되는 것이다.

3)소국 통합과정

3세기 이전 초기 백제의 지배세력은 한강 유역을 기반으로 각지에 분산되어 있던 유이민 집단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들은 伯濟國의 지배세력과 많은 공통점을 갖고 있었으며, 이러한 유대를 기반으로 한군현이나 말갈 등 외부의 침략세력에 대해서는 공동의 방어태세를 취했을 것이다.

백제국이 인근 소국단위의 세력집단에 대해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는 과정은 각부와의 관계를 통해서 알 수 있다. 우선 북부출신의 해루가 右輔에 임명된 사실은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즉 이전의 족부 을음의 右輔任命과 대비시켜 볼 때 해루의 임명은 하남위례성 일원에 국한되어 있던 백제국의 정치권에 북부가 편입되기 시작한 것을 의미한다. 이 시기를 {三國史記}의 기년 그대로 A.D 23년으로 보기보다는 3세기 이전의 어느 시기로 보는 것이 합리적일 것이다. 이에 계속하여 동부에 관한 기사가 나타난다. 다루왕 3년에는 동부의 屹于가 지금의 金化로 비정되는 馬首山에서 말갈의 침략을 물리치는데, 이는 온조왕대의 對靺鞨戰鬪가 왕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나가던 방식이었던 것과는 큰 차이를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이것도 북부의 해루와 마찬가지로 동부세력이 백제국의 정치권에 편입된 사실을 반영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다만 그 시기 또한 A.D 30년이 아니라 해루의 우보임명과 거의 비슷한 시기일 것이다. 동부세력은 이후 屹于가 해루를 대신하여 우보로 임명되는 등 북부와 마찬가지로 백제국을 중심으로 연맹관계를 맺게 되며, 다시 북부의 진회가 우보로 임명되면서 진씨세력까지 포함하게 된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이 경과한 후 하남위례성의 백제국은 소국단위의 각 세력 집단에 대해 우월한 정치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비류집단의 통합과정이다. 비류집단의 본거지였던 미추홀을 인천으로 비정하는 데는 대부분 의견의 일치를 보이고 있으며, 미추홀 세력이 초기 백제의 성장 과정에서 중요한 구성요소임도 또한 사실로 인정하고 있다.

삼국사기의 초기 기록을 비판하면서 연구하는 학자들간에는 {三國史記} 온조왕조 기사대로 미추홀의 비류세력이 그렇게 이른 시기에 하남위례성의 伯濟國에 흡수되지는 않았을 것이며, 상당히 오랜 기간에 걸쳐 백제국과 竝存하였을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三國史記}에 서부라고 표현된 세력은 비류집단의 일부라고 생각하고 있다. 따라서 서부에 대한 통합은 비교적 늦은 시기였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 시기는 더 이상의 자료가 없어 확언할 수는 없지만 결국 3세기 경에는 북부, 동부, 비류세력 등이 백제에 완전히 편입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3.왕권강하와 세력확대

서부세력도 3세기 중반에는 이미 백제국에 통합되었고, 이후 伯濟國은 百濟를 칭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시기는 백제가 본격적으로 팽창하게 되는 시기이다. 우선 쇠락해 가던 한군현에 적극적인 공세를 펴 몰아낸 후 내적인 정비에 착수하였다. 고이왕대의 체제정비는 전단계의 연맹관계를 기반으로 이루어졌다고 이해되는데 6좌평제도와 16관등제는 후대에 왕성되었을 가능성이 크다지만, 좌평제의 골격은 이미 고이왕 당시에 마련되었을 것이다.

한군현을 몰아낸 후 백제는 강대한 고구려와 직접 국경을 접하게 되었다. 이는 정치적, 군사적으로 큰 부담을 안게 되는 동시에 같은 부여족 계통국가로서의 주도권쟁탈을 놓고 영토적인 면에서 뿐만 아니라 의식적인 면에서도 큰 변화를 초래하여, 그 결과 백제 왕실은 고구려와 백제의 공동발원지인 부여에 대한 의식이 좀 더 강해져서 대외적으로 부여씨를 표방하게 되는 것이다.

한편 백제와 고구려의 완충지대역할을 하던 한군현이 없어지자 이들 세력의 충돌은 불가피해졌다. 즉 남진정책을 추구하고 있던 고구려와 당시 한강 유역을 점령하고 북진정책을 펴던 백제의 근초고왕(341∼375)이 정면 충돌하게 된 것이다.

396년 고국원왕이 보 기병 2만명을 거느리고 쳐들어 오자, 근초고왕은 태자 근구수를 시켜 이를 격파시켰다. 또 근초고왕 26년(371)에 이번에는 백제가 고구려에 침범해 평양성을 공격하여 고국원왕을 敗死시켰다. 그리하여 백제의 세력권은 수곡성(新溪)까지 포함하게 되었으므로 황해도 북부에 이르는 최대의 판도를 확보하였다. 그러나 근초고왕 30년에 수곡성을 고구려 소수림왕(371∼384)에게 빼앗겼으므로 이 지역을 중심으로 몇 차례의 공방이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근초고왕은 고구려와 충돌하는 한편으로 낙동강 유역까지 진출하였으며, 충청도 일원의 마한 소국을 경략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위세를 바탕으로 중국의 동진에 사신을 보내어 외교관계를 맺었고 남쪽으로는 왜와 통하여 그 국제적인 지위를 확보하기도 하였다.

근초고왕의 뒤를 이은 근구수왕(375∼384)은 부왕의 사업을 착실하게 계승하였다. 고구려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막았으며 동왕 3년에는 군사 3만명을 거느리고 평양성을 공격하기도 하였다. 그 뒤를 이은 침류왕(384∼385)은 동진으로부터 인도의 중 마라난타가 와서 불교를 전하자 이를 수용하였으며, 수도에 불사를 세우는 등 불교 수용에 적극 노력하였다. 그러나 阿華王(392∼405) 이후 고구려의 파상적인 공격을 받으면서 백제의 세력은 크게 위축되었으며, 외척 세력들의 왕권에 대한 견제도 심해져 갔다. 이러한 국난의 극복과 실추된 왕권강화를 적극 추진한 인물이 개로왕(455∼474)이었다. 개로왕은 친위세력을 확보하기 위하여 기존의 외척귀족세력이 아닌 인물을 발탁하였으며,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하여 위와 송에 대하여 적극적인 외교정책을 추구하였다. 그러나 개로왕의 이러한 정책은 내외적으로 어려움에 봉착하게 된다

웅진시대

 

(1) 웅진천도의 배경

1) 한성함락 당시의 배경

한성이 고구려에 의해 함락되었을 때의 왕은 개로왕(蓋鹵王)이었다. 개로왕 재위 당시 동북 아시아의 국제 정세는 북위(北魏)가 강북을 통일하여 5호 16국(五胡十六國)시대를 끝내고 중국의 남북조 동북의 고구려, 그리고 새북(塞北)의 유유(유유) 등 4강을 축으로 하여 균형적인 세력안배가 된 상태였다. 그리고 고구려의 장수왕은 평양으로 천도한 다음 427년 북위와 친근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계속 백제를 압박해 들어갔다. 서북 중국 땅으로부터 위협이 없는 상태에서 적극적으로 남진 정책을 추구하게 된 것이다. 개로왕은 이처럼 대외적으로 고구려의 압력에 대항하면서 대내적으로는 진씨, 해씨 등과 같은 대성 귀족들의 발호를 제어하여 왕권중심의 새로운 지배질서를 확립해야 했다. 개로왕의 정치적 개혁은 귀족들 사이에서 반발을 초래하게 되었고, 백제 왕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해 실시한 대토목공사는 국력의 피폐와 민력(民力) 소모(消耗)를 가져오게 되었다. 이러한 시기에 고구려는 대군을 보내어 백제에 대한 공격을 단행하였다. 475년 백제를 공격한 고구려는 수도 한성을 공격하기 이전에 먼저 북성을 공격하여 7일만에 함락시키고 다시 남으로 남으로 내려와 남성에 있던 개로왕 뿐만 아니라 왕자들까지 모두 죽였다.

한편 이 시기에 신라에 구원을 요청하러 간 문주(文周)는 구원병 일만명을 데리고 왔으나 그가 왔을 때는 개로왕은 이미 죽고 한강 유역을 빼앗긴 뒤였다. 이렇게 해서 한성시대는 막을 내렸다.

한성에서 왕위에 오른 문주는 목협만치(木協滿致)와 조미걸취(祖彌桀取)의 도움으로 황무지가 된 한강변 도성을 버리고 웅진으로 천도를 단행하였다.

2)웅진의 지세

웅진은 북으로 차령산맥과 금강에 둘러싸여 있고 동으로는 계룡산이 막아서 고구려와 신라로부터 침략을 방어해 주는 천연의 요새지 였다. 이곳을 관통하여 흐르는 금강을 통해 서해로 나아갈 수 있고, 또 남쪽에는 곡창인 호남 평야가 펼쳐져 있어서 관방(關防)뿐만 아니라 교통과 경제의 요충지로서 좋은 입지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한성시대에 웅진이 어떠한 위치에 있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다만 웅진이 지리적 천험으로 군사상의 요지였다는 면에서 볼 때 일단 고구려의 예봉(銳鋒)을 피하기 위해 군사적 요지인 웅진을 수도 지역으로 택하였을 것이다. 이는 개로왕 21년 9월에 고구려의 공격을 받은 후 같은 해 10월에 이도(移都)한 데서 보듯이 문주왕으로서는 수도 택지(首都擇地)의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는 점과 한성함락 이후 군사 지리적 측면에서 최대의 요지가 웅진이었다고 한 사실에서 충분히 입증이 되리라 생각한다.

(2) 웅진 시대의 대외 발전

웅진으로 옮겨간 후 중국관계교류는 고구려의 방해를 무릅쓴 문주왕의 재기조력으로 시작된다. 문주왕 2년(476)에 송으로 사신을 보냈으나 고구려의 집중적인 방해로 되돌아오고 말았다. 또한 동성왕 6년(484)에도 남제(南齊)에 사신을 보냈으나 또 실패하였다. 고구려의 남진정책은 계속되어 웅진천도 초기에도 중국과의 정상관계는 형성되지 않았다. 동성왕은 계속적으로 사신을 보내 결국 고구려의 방해를 뚫고 중국의 남조와 교린관계를 잘 유지하였으며 남조로부터 책봉을 받기도 하였다.

한편 웅진 천도 후 백제는 내부의 정정보안으로 말미암아 고구려에 대해 한동안 수세적 입장을 견지하였다. 그러나 무령왕 대 이르러서는 고구려에 대해 공세적인 입장을 취하기 시작하였다. 무령왕은 즉위 초의 정변을 수습한 후 곧바로 고구려에 대해 적극적인 공세를 강화하였다. 백제는 남천 이후 고구려에 대해 수세적인 입장에서 벗어나 공격적인 자세로 전환하였던 것이다. 강력한 고구려의 남진정책을 받는 백제와 신라는 동일한 운명의 끈을 쥐고 있었다. 동성왕때 두 나라 사이에 혼인관계가 맺어지기까지 양국의 공동 보조는 일체감을 갖고 유지되었다. 그러나 신라는 지증왕이 즉위한 이후 적대적이던 고구려와의 관계를 개선해 나가면서 백제와 고구려와의 대결 주도에 직접 개입을 자제한 채 권력 기반을 강화해 나갔다. 무령왕은 또한 적극적으로 가야 지역에 진출하여 백제의 영향력을 확대해 갔다. 고구려에 의해 한강 유역을 빼앗긴 백제는 웅진 천도 이후 이에 대체할 만한 새로운 농업 생산지를 필요로 하게 됨에 따라 왕권이 안정된 무령왕 대부터 적극적인 남방의 경영에 착수하게 된 것이다. 위와 같은 사실은 백제가 대대적으로 천도 후의 정국 불안을 극복하여 왕권 안정을 되찾았고 대외적으로 국제적인 고립에서 벗어났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3) 신진세력의 등장과 그 배경

문주왕은 동생 곤지(昆支)를 내신좌평에 임명하고 장자 삼근(三斤)을 태자로 책봉하여 새로운 수도 체제하에서 정비를 서둘렀다. 그러나 재위 3년만에 병관좌평(兵官佐平) 해구가 강력한 병권으로 국사를 함부로 하여 날뛰다가 사냥길 야영지에서 왕을 시해하였다. 태자에서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삼근은 불과 13세이었으므로 권력을 해구가 장악하였다. 종래 태자가 어려서 정사를 돌볼 수 없는 경우에는 왕위 계승이 되지 않았으니 삼근왕의 경우로 보아 왕계가 혼란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웅진천도로 인해 귀족세력들의 지위와 위상 면에서 변화가 있었다. 한성에 세력기반을 가졌던 귀족세력이 남천함에 따라 지배 세력의 구성에 큰 변화가 나타난 것이다. 웅진시대의 귀족세력은 진씨, 해씨, 목씨 등과 같은 구귀족세력과 금강 유역의 토착세력기반을 가지고 웅진천도 이후 중앙정계에 진출하였던 백씨, 연씨, 사씨 등과 같은 신진세력으로 대별해 볼 수 있다.

백제가 웅진으로 천도한 이후 동성왕 5년까지의 지배세력은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남래귀족들이 중심이 되었다. 그러나 동성왕이 즉위한 후 천도 초기의 정치적 혼란을 수습해 가게 되면서 한성시대에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던 성씨들이 지배세력 속에 등장하고 있다. 웅진천도 이후 신흥한 세력들 중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성씨는 대성 8족과 관련시켜 볼 때 사씨, 연씨, 백씨라고 할 수 있겠다. 이 성씨 집단들은 금강유역권을 기반으로 한 토착 세력으로서 이 시기에 새로이 두각을 나타난 세력으로 파악된다. 동성왕 대에 백제 왕실이 가지고 있던 과제는 실추된 왕권을 회복시키고 정치적 안정을 모색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실세인 구귀족 중심의 정치체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금강 유역에 토착적 기반을 갖고 세력을 확장시켜 나가던 신진세력에 눈길을 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신진세력의 등장은 지배층의 폭을 넓혀 왕권의 지배력을 공고히 한다는 점에서 백제사의 새로운 전기를 이루는데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동성왕대 전기에는 아직도 웅진 시대 초기의 관행인 실세 귀족을 중심으로 정국을 운영하였으나, 금강 유역의 신진세력들이 점차 중앙 정계에 진출하는데 다라 신 구세력간의 균형 위에서 왕권을 안정시키고 강화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후기에는 신진세력들이 더욱 등용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이것으로 신진세력이 병권을 장악한 것을 계기로 정치의 주도권을 장악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신진세력의 독주는 왕권의 강화와 안정 기반을 위협하는 또 하나의 방해물이 되었다.

(4) 동성왕과 무령왕의 왕권 강화 노력

1)동성왕의 왕권 강화책과 정치적 한계

웅진천도 이후 귀족들간의 세력 갈등 속에서 즉위한 동성왕은 금강 유역에 기반을 가진 신진세력들을 등용함으로써 정치적 기반을 확대시켜 나갔다. 신진세력과 남래귀족(南來貴族)과의 조정 위에서 정권을 안정시킨 동성왕은 실추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한 일련의 조치를 취했다. 그는 대내적으로 지배 세력의 개편 작업, 신라 왕실과의 통혼, 왕 후 태수제 실시 및 대토목공사를 통해 실추된 왕권을 진작시키려 하였다. 대외적으로는 기존의 나제 동맹을 축으로 신라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고구려에 공동으로 대처하였고, 또 남조 국가인 남제와 전통적인 우호관계를 맺어 고구려를 견제하였으며, 사비로의 천도를 계획하여 왕권 중심의 정치운영을 모색하기도 하였다.

동성왕대에 추진된 일련의 왕권강화와 정국 안정, 지배기반의 확대를 위한 시책은 어느 정도의 성과를 지녀 후대의 무령왕과 성왕대로 이어지는 왕권 중심의 정치운영에 바탕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그러나 크고 작은 토목공사를 자주 일으켜서 국력의 소모와 민심의 이탈을 가져왔고, 가뭄과 흉작 등의 계속되는 자연재해와 진흥 대책에 대한 무관심은 농민의 생활을 궁핍하게 했고 흉흉하게 했다. 그리고 집권 말기에는 사비 천도를 계획하여 왕실의 권력을 강화시키고 불쑥 커 가는 신진세력을 막으려 하였으나 그의 측근이었던 신진세력 백가에게 살해당하고 말았다. 동성왕의 신진세력 등용정책은 한성을 상실한 이후 백제의 왕실의 지배기반을 확대시켜 주었고, 천도 초기의 혼란한 정치정세를 수습하는 바탕이 되었다 할지라도 신구세력간의 대립과 조정 역할을 통한 왕권의 안정에 충실치 못하고 그저 권력 기반 확대에 전전긍긍한 것은 그의 정치적 한계라 하겠다.

2) 무령왕의 왕권 안정을 위한 시책

무령왕은 동성왕을 살해한 백가의 난을 진압하고 40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그는 동성왕의 무리한 전제 권력 강화가 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세력이 증대된 신진세력의 권한을 일정하게 견제하면서 신 구세력간의 세력 균형을 유지하는 가운데 왕권의 안정을 추구해 나갈 것이다. 동성왕대에는 비대해진 신진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백가와 같은 신진세력을 지방의 거점 지역에 전보시킨 것과는 달리 무령왕대에는 22개의 담로에 왕족들을 파견하여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하였다. 담로제는 왕의 혈연집단에 의한 지방통치 방식으로서 중앙의 왕권 확립과 각자에 산재되어 있던 독립적인 세력을 중앙의 통치질서 안으로 흡수하기 위해 실시된 것이었다. 그는 동성왕대 이후 적극적으로 중앙정계에 진출하고 있던 신진세력들로 인해 지배층의 폭이 확대되자 국왕을 정점으로 이들을 서열화 하고, 또한 정무를 분담하기 위해 기존의 좌평제를 개편하였는데 이는 사비시대 좌평제 운영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또한 무령왕은 수리시설을 확충하고 유민들을 귀농시키는 정책을 시행함으로써 왕정의 물적인 기반을 강화하여 나갔다. 고구려에 대해서도 강화되고 안정된 왕권을 기초로 항상 고구려에 대한 선제 공격을 일관하여 그 남하 위협을 저지했으며 왕권의 재정 기반인 산업을 장려하였는데 특히 농업진흥에 힘썼다. 그 치적과 영광의 흔적은 현대에 와서 발굴된 그의 왕릉 속의 부장품으로 훌륭하게 증명되었으며 강화된 국력 축적의 결과는 다음대인 성왕대로 이어졌다.

(5) 웅진시대의 문화

지정학적으로 북의 고구려가 연이어 중국 세력과 맞싸우고 있고, 신라는 반도 동남부에 도사리고 있는 상황이래 중국 요서지방까지 영토를 경영했을 정도의 백제였으므로 국세는 한창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문화는 고구려의 남하정책으로 인하여 다소간 빛을 발하지 못했다. 동시에 신라와 당의 연합군에 의한 전쟁에 의해 귀족적이고 찬란했던 문화는 그 역사와 더불어 흔적을 찾아보기조차 힘든 처지에 있다. 그러나 다행이도 백제의 문화를 전수받은 일본을 통해 백제 문화를 재현해 볼 수 있다. 백제 문화의 중심은 불교였다. 웅진시대 이전의 불교 문화 내용은 불사나 유적이 발굴되지 않아 알 길이 묘연하나 웅진시대 성왕대에는 '성왕 4년(526)에 梁의 武帝를 기리기 위해 大通寺를 창건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을 시기의 불교적 문화 내용을 짐작해 볼 수 있다. 또한 西穴寺와 같은 유적을 통하여 사찰의 石窟形式이 주가 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웅진시대의 그림은 宋山里의 6호분 별화와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頭枕에 그려진 조각그림이 있을 뿐이다. 송산리 6호분 벽화는 부여계 줄기인 듯 하며 이분의 벽화는 사면도에 四神圖와 日月雲文, 그리고 벽면에 설치된 등감주위에 그려진 火焰文이 있다. 나무로 만든 두침은 조각그림에 지나지 않으나 그 소재를 총하여 백제 웅진기의 그림을 이해하기에 족하다. 이 그림을 통하여 당시의 불교적 사생관의 지배형태를 살필 수 있고, 그 농토의 문화 전역까지 불교가 침투했음을 알 수 있다. 백제의 벽돌은 건축물에서보다 능묘축조에 쓰인 경우 외에는 남은 것이 별로 없다. 하지만 백제의 막새기와에 특색이 있다고 하는데 막새기와는 지붕 끝 서까래 위의 장식으로 쓰이며 백제의 경우 암막새는 없고 수막새만 전해지고 있다. 蓮花紋이 主고 그 외에 波狀文, 鬼文이 새겨졌다. 이 연화문 수막새는 중국 북위와 남조의 영향을 받은 것이 백제화 되어가는 과정을 보인다.

위의 내용을 통해 이시기 문화의 특징을 몇가지로 요약해 볼 수 있다.

첫째, 고구려 적인 북방적 요소가 줄어들고 중간자적인 위치이긴 하지만 농경사회의 남방적 요소가 뚜렷이 부각되는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둘째, 한성시기보다 불교신앙 및 불교적 문화는 중심지의 주변성을 띠고 있었으며, 꽤 널리 퍼지고 번창했다.

셋째, 불교적인 사생관이 지배적이었으며, 중국의 남제로부터 받은 영향이 점차 백제화 되어 갔다.

끝으로 웅진시기의 문화는 북방적인 성격과 남방적인 성격이 잘 조화된 신선한 문화를 창조해 낸 중심적인 시기라는 점에서 커다란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사비시대

 

(1) 聖王의 사비천도

聖王은 재위 16년(538)에 사비로 천도하였다. 성왕의 사비천도는 熊津천도 처럼 타율적으로 외부의 힘에 밀리어 이루어진 것이 아닌 백제의 내재적인 발전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성왕은 사비천도를 통하여 웅진시대 사회혼란을 야기시켰던 귀족세력의 내분을 종식시켰으며 22부사의 설치. 5部·5方제도의 실시. 16관등제의 확립을 통하여 국가 권력을 확립하였다. 그 결과 성왕은 백제의 중흥을 꾀하였으며 왕권강화가 가능하였다 한다. 성왕의 왕권강화와 관련하여 위 사항들을 좀 더 살펴 보면 이와 같다.

성왕은 사비천도 이후 여러 가지 제도 개혁을 단행하였다. 그 중 5部·5方제를 통하여 성왕의 개혁정치 성격을 추측해 볼수 있다. 사비천도 이후 성왕은 지방 통치 체제를 22담로제에서 방-군체제로 바꾸었다. 22담로제는 거점 중심의 지방 통치 방식이었다. 이에 비해 방-군체제는 방의 장인 方領이 郡將과 도사를 직접 지휘 통솔할 수 있는 통치 방식이었다. 지방 통치 방식의 변화는 단순한 제도 변경이 아닌 지방 토착세력의 권한을 중앙 권력에 편입시키는 것이었다. 이것은 각 지방을 세력기반으로 가지고 있었던 귀족들의 세력을 축소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고 결국 국왕의 권력은 그만큼 강화시킬 수 있는 것이었다.

聖王은 사상적인 면에서도 국왕통치의 정당성을 확보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의도는 남부여로의 국호의 변경과 시조신으로서의 제사대상의 변화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남부여는 왕실의 성인 부여씨에서 유래한 것이었고 이는 왕실의 권위를 높이기 위한 조처로서 국호를 변경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사비시대에는 지금까지 백제의 시조라고 인식되어진 東明에 대한 제사는 쇠퇴하였으며 성왕대 이후에는 왕실종묘의 기능을 갖는 仇台廟에 대한 제사를 강화시켰다.

끝으로 사비시대 22부사와 좌평의 상호관계를 살펴보면 22부사는 대략 사비천도를 전후하여 설치되었으며 성왕의 사비천도 이후 완전히 정비되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22부사의 정비 역시 성왕대 이루어진 5부·5방제, 16관등제와 함께 국왕의 권력 강화를 위한 목적으로 추진되었던 것 같다. 그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22부사는 국왕의 행정통치의 매우 긴요한 기구였다고 할 수 있다.

다음으로 성왕의 관산성 패전 이후 위덕왕은 성왕이 전사한후 겨우 3년 만에야 왕위에 즉위하였으며 그나마 그것도 앞으로는 귀족들의 결정사항에 잘 따르겠다는 약속을 하고 나서야 비

족들의 발언권이 강화됨에 따라 국호의 환원, 시호제의 일시중단, 왕위 계승에 있어서 귀족 간섭 등의 증대로 나타 났으며, 이로 말미암아 국왕의 권위는 실추되어갔다.

이렇듯 대성팔족을 중심으로한 권문세족간의 세력 갈등이 국운을 좌우할 만큼 중대사임을 직시한 성왕의 사비천도는 성공적으로 이루어 졌으나, 국가의 향방은 결국 패망에 이른다.

(2) 사비시대의 新進貴族

사비시대 新進貴族의 등장은 사비 천도 이후의 정치적 상황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사비 천도 직후에는 대성팔족 중에서도 사·목·국·연씨 등은 친국왕적인 경향이 강했으며 그들은 백제의 고위관 등을 역임할 수 있었을 정도로 상당히 권력을 강화하였다. 이에 반해 같은 대성팔족중에서도 해·진·백씨 등은 국왕의 견제를 받아 점차로 권력이 쇠퇴하게 되었다. 그런데 耆老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치른 성왕의 관산성 패전 이후 국왕의 권력은 크게 하락하였다. 이는 친국왕적인 경향을 가지고 있었던 귀족세력까지도 국왕과 등을 돌리게 하였다. 위덕왕 이후 대성팔족은 국왕과 결별하였다고 할 수 있다.

결국 국왕이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대성팔족과는 결탁하기 어려웠을 것이며, 대성팔족 이외의 새로운 세력이 필요하였을 것이다. 그런 까닭으로 武王의 권력 강화는 왕족과 비대성팔족이면서 達率官等을 가졌던 사람들은 그들의 대성팔족에 대한 상대적인 열세를 극복하기 위하여 국왕과 결탁하였다. 무왕대에 등장하였던 신진귀족은 義慈王대에 이르러 상당히 성장하였다. 階伯과 黑齒常支와 같은 신진귀족은 국왕의 신임을 바탕으로 대성팔족과 대립할 수 있을 만큼 성장하였다. 그러나 왕족들은 소수의 직계만이 중시되어 차츰 정치권력에서 도태되어 가고 있었다.

(3) 전제왕권의 신진귀족

1) 武王의 왕권강화

성왕의 관산성 패전 이후 百濟의 왕권은 威德王·惠王·法王대를 거치면서 약 50여년 동안 귀족세력에게 크게 견제를 받아 왔었다. 위덕왕(554-598) 즉위초의 정치상황은 '耆老'로 지칭되는 세력에 의해 정국 운영이 주도되었다. 威德王은 한때 陳·北齊·北周·隋와 활발한 대외교섭을 전개하면서 정치적 발전이나 왕권신장을 꾀하기도 하였으나 지배세력에 대한 과감한 개편없이 현상유지의 테두리에서 개혁을 모색했던 점에서 그 왕권의 한계성을 찾을 수 있다.

위덕왕 사후 惠王(598-599)과 法王(599-600)이 왕위를 이었으나 단명으로 끝나 왕권쇠미 현상을 면키 어려웠다. 그러나 武王(600-641) 때에 이르러서는 국력이 회복되었고 신라에 대한 공격이 성공적인데 힘입어 왕권의 전제화를 다시 이루게 되었다. 무왕은 益山에 別都를 설치하고 장차 遷都할 계획을 갖고 있었다. 왕궁을 세우고 석축의 담장을 쌓고 성내에는 백제 전체의 사원을 통할하는 大官寺를 세우고 또 內佛堂의 기능을 가진 帝釋寺를 신축하는 등 왕도로서의 면모를 갖추어 나갔다. 이는 대성팔족으로 구성된 유력한 귀족세력을 개편하여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고 왕권의 강화를 이루고자 추진된 것이었다. 그리고 彌勒寺와 王興寺같은 대규모 사원을 창건하였는데, 특히 동방 최대규모의 미륵사 창건은 그의 권력기반 강화를 위한 이념적 표상이었다. 즉 미륵사의 창건 연기 설화를 통해 볼 때 무왕은 스스로 轉輪聖王을 자처함으로서 불교에 의한 국왕의 권위와 위엄을 과시하려 하였다.

무왕 3년 佐平解讐는 신라와의 阿莫山城 전투에서 4만의 병력을 잃어버렸다. 이 전투의 결과 百濟에서는 상당한 사회적 혼란이 야기되었을 것이다. 이를 기회로 무왕은 권력 강화를 위한 명분을 찾았다. 그후 무왕은 좌평의 관료화를 추진하면서 이를 통하여 22부사를 장악할 수 있었다. 武王의 권력강화의 이면에는 그것을 뒷받침해 줄 수 있었던 정치세력이 존재해 있었을 것이다. 이 세력이 바로 新進貴族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왕족과 非대성팔족이면서 達率관등을 지닌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이들은 달솔관등을 가지고 있으면서 대성팔족에 대한 상대적인 열세를 극복하기 위하여 국왕과 적극적으로 결탁하였다.

한편, 武王대의 對外關係는 그의 권력강화책과 관련하여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었다. 무왕 22년 부터 시작된 對唐外交는 삼국관계뿐 아니라 전제왕권 확립을 위한 정치개혁에 커다란 도움이 되었다. 동왕 41년(640)에 唐의 國學에 왕 子弟의 입학을 청한 사실에서 유교적인 이념을 바탕으로 하여 전제왕권을 확립하려는 의도를 엿볼 수 있다. 삼국관계에 있어서 백제의 대당외교의 목적은 고구려 견제 이외에 對新羅戰의 성공적인 수행에 최대정책 목표를 두었다. 대당외교가 활발해지는 武王 후반기에 신라에 대한 공격이 더욱 늘고 있다. 그는 다시한번 대규모의 병력을 동원하여 한강유역의 회복을 기도한 일도 있었다(627). 신라가 당에 긴급구원을 요청함으로써 한 차례의 시도로 끝나버렸지만 이들 통해 무왕의 권력이 크게 성장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멀리 20여리로부터 물을 끌어들여 宮南池를 만들고 그 못 안에는 方丈仙山을 모방한 산을 만들었으며, 또한 경치가 수려한 大王浦와 望海樓에서 큰 연회를 개최했다는 사실에서 무왕의 전제군주다운 풍모를 엿볼 수 있다.

2) 義慈王의 왕권강화와 외교정책

武王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義慈王(641-660)은 武王대에 다져진 기반위에서 집권 전반기의 왕권을 강화해 나가며 전제왕권을 확립하게 되었다. 그의 개혁정치의 목표는 유교적 이념에 의한 전제왕권의 확립에 있었다. 의자왕 2년(642)에 일어난 정변은 곧 자신의 모가 죽자 왕족 4명과 內佐平 硭味를 포함한 40여명을 성으로 쫓아낸 사건을 말한다. 이는 왕권강화를 방해하는 일부 왕족과 이에 연루된 귀족세력들을 제거하여 새로운 정치세력의 도움을 받아 친정체제를 강화하려는 의도에서 취해진 것이었다.

武王대에 등장하였던 신진귀족은 義慈王대에 이르러 크게 성장하였다. 階佰과 黑齒常之와 같은 신진귀족은 국왕의 신임을 바탕으로 대성팔족과 대립할 수 있었다. 그러나 왕족은 소수의 직계만이 중시되어 차츰 정치권력에서 도태되어 가고 있었다. 왕권의 권력기반을 더욱 강화시킨 의자왕은 무왕대와는 다른 대외정책을 추구하였다. 즉위초의 정변이 있은 직후인 643년부터 백제는 당과의 긴밀한 우호관계를 유지하면서도 신라를 고립시키기 위하여 무왕대 일정하게 거리를 두어왔던 고구려와 화친관계를 맺어 對唐교통로의 차단을 시도하게 되었다. 그러나 당 태종의 고구려 원정이 실패로 끝나게 되자 백제는 신라공격에 대한 당의 간섭을 배제하고자 의자왕 5년(645) 이후 당과의 교섭을 한 동안 중단하게 된다. 당 고종대에 들어와서 당이 신라와 더욱 밀접해지며 상호 군사적 협력관계를 논의하고 있을 무렵, 의자왕은 고구려 및 왜와 관계를 강화해 나가면서 羅唐관계에 적극적으로 대처해 나갔다. 그러나 전제왕권을 확립하게된 의자왕은 왕15년(655)이후 부터 淫荒과 耽樂에 빠져서 실정을 거듭하다가 결국 백제멸망으로 귀결을 보게 된다.

(4) 사비시대의 문화

사비시대는 538년에서 663년까지이며 이 시기에 백제문화는 極盛期에 도달하였다. 백제 제25대 聖王은 제위 16년에 응진을 떠나서 사비, 즉 부여에 遷都하고 국호도 종래의 백제를 버리고 南扶餘國으로 고쳤다.

이 사비 시기에는 중국의 남북조와 수당의 문화를 수입하여 백제 것으로 융화 시키려고 노력하였다. 聖王은 梁에서, 威德王은 齊와 秦과 隋에서, 그리고 武王.義慈王은 당에서 그 문화를 수입하여 삼국중에서도 가장 발전된 모습을 보여 주었다.

특히 불교는 국교나 다름없이 왕이 친히 사원에 가서 행향을 하는 일이 많았다. 法王은 王興寺를 창건하였으며, 무왕은 35년간을 걸려서 익산 미륵사를 완성하였다. 불교 중심의 예술은 극도로 발달해서 후세에도 취급하지 못한 걸작품이 적지 않았다. 사비성에는 인도의 배달다삼장이 겸익을 따라와서 율부 번역에 참여했다. 善信尼 등 일본 구법유학승이 와서 백제 불교를 배웠다. 이같이 역대왕들이 심력을 다하여 쌓아놓은 문화는 백제의 마지막 왕인 義慈王대에 이르러 황금시대를 형성하였다.  

2006.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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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화는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두 가지의 내용이 실려 있다.

온조(溫祚)중심의 설화에서는 온조는 고구려 건국자인 주몽(朱蒙)과 졸본왕녀(卒本王女)사이에서 태어났으며 그 뒤 주몽의 원자인 유리(琉璃)가 아버지를 찾아와 태자 가 되자 형 비류(沸流)와 함께 남하하여 비류는 미추홀(彌鄒忽)에, 온조는 위례(慰禮)에 정착하였으나 비류가 죽자 그를 따르던 무리들을 통합하였다고 되어 있다. 한편 비류 중심의 건국설화에서는 비류와 온조는 해부루(解夫婁)의 서손(庶孫)인 우태(優台)와 소서노(召西奴) 사이에서 태어났고 우태가 죽은 뒤 주몽이 졸본으로 망명해오자 소서노는 주몽에게 개가(改嫁)하여 고구려 건국을 도왔으며 그 뒤 주몽의 원자가 태자로 책봉되자 비류는 온조와 그 무리를 이끌고 미추홀에 정착하였다고 한다.

이처럼 시조 건국설화에는 두 가지의 설화가 전해지고 있으나 백제를 건국한 주체세력이 부여족 계통의 고구려 유민인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건국설화에는 비류와 온조가 함께 남하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실제는 시기를 달리하여 남하 정착한 것으로 보인다.

온조집단은 남 하한 후 처음에는 하북위례성(河北慰禮城)에 정착하여 십제(十濟)를 세웠다. 그 뒤 하남 위례성으로 옮기면서 국호를 백제(百濟)로 개칭하였다. 이처럼 온조계 집단이 십제에서 백제로 성장을 보게 된 배경은 청동기시대 이래 한강유역이 가지는 문화적 기반이 그 토대가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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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남 위례성으로 중심지를 옮긴 이후 백제는 미추홀에 정착한 비류계 세력과 연맹을 형성하였으니 이 연맹관계가 보여주는 것이 건국설화에 비류와 온조가 형제라고 하는 시조 형제설화이다.

두 세력이 연맹을 형성한 이후 처음에는 연맹의 주도권을 비류계가 장악하였다가 후기에 와서는 온조계가 왕위를 점하게 된 것 같다. 이는 건국설화에서 비류가 형, 온조가 동생으로 나오고 있고, 또 비류를 따르던 무리들이 비류가 죽은 뒤 온조에게 귀부 하였다고 한데서 알 수가 있다.

연맹의 주도권이 비류계에서 온조계로 넘어간 시기는 대체로 초고왕대로 생각되며, 이후 백제의 왕계는 온조계의 부여씨(扶餘氏)로 고정되었다. 이 후 고이왕대에 이루면 연맹체의 영역도 크게 확대되어 북으로는 예성강, 동으로는 춘천, 남으로는 안성.성환, 서로는 서해에 이르는 영역을 확보 하게 되었다. 이로써 백제는 한강유역의 새로운 맹주세력으로 등장하게 되었으며 목지국(目支國)을 중심으로 한 마한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이전의 부용관계를 청산하고 대등한 위치에 오르게 되었다. 그리고 한강유역에서의 정치적 세력의 성장을 방해하고 있던 중국군현에 대해서도 공세적 입장을 취하게 되었다.

특히 247년(고이왕 14) 마한세력과 중국군현과의 사이에서 빚어진 싸움에서 마한이 패배한 상황을 이용하여 백제가 목지국을 병합한 것은 마한의 맹주권을 장악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기반 위에서 고이왕은 대내적 체제정비에도 힘을 기울였다. 원래 방계 출신이었던 고이왕은 직계의 사반왕을 폐위시키고 즉위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그는 반대세력을 제거함으로써 정치적 권력을 증대 시켰다. 그리고 좌장(左將)을 설치하여 병마권을 장악하였고 나아가 좌평(佐平)을 설치하여 귀족회의를 주관하게 함으로써 왕의 위치를 한단계 격상시켰다. 또 금령(禁令)을 선포하고 솔계(率系)관등과 덕계(德系) 관등을 만들어 16관등제의 토대를 놓는 등 지배체제의 확립을 도모하기도 하였다. 이로써 고대 국가령 토대를 갖추게 되었다.

 

백제의 한성시대

 

고이왕대에 고대국가로서의 기반을 갖춘 백제는 그 뒤 몇 번에 걸쳐 직계와 방계사이의 왕위교체 이후 근초고왕대에 와서 직계 인 초고계(肖古系)의 왕위 계승권이 확립되었다. 이는 근초고왕과 근구수왕의 왕명(王命)이 초고왕과 구수왕의 왕명에 근(近)자를 관(冠)하여 이루어진 것에서 알 수가 있다. 초고계의 왕위 계승권을 확립한 근초고왕은 당시 대표적인 귀족세력인 진씨(眞氏) 출신의 여자를 왕비로 맞이하여 왕권지지 기반을 확대하였다.

이로써 백제는 아신왕대까지 진씨 왕비족시대를 열게 되었다. 왕귄을 강화시킨 근초고왕은 지방통치조직으로서의 담로제(擔魯制)를 실시하여 지방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하여 나갔다. 이처럼 내적으로 다져진 기반위에서 근초고왕과 근구수왕은 대외정복활동을 전개하였다. 그 결과 남으로는 영산강(靈山江) 유역인 응관묘 조영집단을 기반으로하여 성립되어 있던 침미다례(枕彌多禮,新彌國)등 마한의 잔여세력을 병합하여 전라도지역까지 지배영역을 확 대하였고, 동남으로는 가야세력을 영향권내에 넣었으며, 북으로는 고구려와 대결하면서 평양성전투에서의 승리로 지금의 황해도 신계지역까지 진출하였다. 뿐만 아니라 근초고왕은 해상무역에도 힘을 기울여 요서(遼西)지방에 무역로서 백제군(百濟郡)을 설치하였고, 또 일본열도에도 진출하여 한반도를 중심으로 중국과 일본을 연결하는 고대상업의 중심부를 이룩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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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은 내적인 체제의 정비와 대외적 팽창과 발전의 바탕 위에서 근초고왕은 박사 고흥(高興)으로 하여금 서기(書記)를 편찬하게 하여 왕실의 권위와 신성성.정통성을 확립하였다. 그리고 침류왕대에 와서는 불교를 공인함으로써 삼한소국시대 이래의 부족적 전통을 극복하면서 보다 확대된 영토와 강화된 왕권을 지지하는 고대국가의 이데올로기로서 확립하여 보편적인 세계관을 형성을 이룩하게 되었다.

침류왕이 죽은 뒤 백제의 정정(政情)을 보면 진사왕은 조카 아신(阿莘)의 왕위를 찬탈하였고, 또 아신은 진사(唇斯)를 쫓아내고 왕위에 오르는 등 왕위계승을 둘러싸고 왕족사이에 갈등이 있었으며, 여기에는 왕비족 으로서의 진씨 세력이 강하게 작용하였다. 또 아신왕대에는 고구려 광개토왕의 본격적인 침공으로 58성.700촌을 점령당하고 왕제와 대신 10명을 인질로 보내야 하는 궁지에 몰리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상황속에서 지배세력내에 커다란 세력교체를 가져온 것은 아신왕이 죽은 뒤 전지왕의 즉위를 둘러싼 갈등이었다.

이 과정에서 전지(전支)를 지지한 해씨세력은 왕제 설례를 지지한 진씨세력을 누르게 되었고, 그 결과 왕비족이 진씨에서 해씨(解氏)로 교체되는 변화를 보게 되었다. 전지왕이 즉위 후 실권을 장악한 해씨세력은 상좌평을 설치하는 등 실귄귀족 중심으로 정치운영을 해나갔다.

이러한 실권귀족 중심체제에 대항하여 개로왕은 왕실의 권위를 높이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궁실을 장려하게 하고, 부왕의 능을 개수하였으며, 북위(北魏)에 사신을 보내 군사원조를 요청하는 등 일련의 조처를 취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왕권전제화정책은 안으로는 귀족들의 반발에 부닥치고, 밖으로는 고구려의 대대적인 공격에 의해 실 패로 돌아갔으며, 특히 고구려군의 공격으로 왕도가 함락되고, 왕이 전사함으로써 백제는 웅진천도라고하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 하게 되었다.

 

백제의 웅진시대

 

고구려군에 의해 한성이 포위되기 직전 신라에 원병을 요청 하러간 문주(文周)는 원병 1만명을 얻어 돌아왔으나 이때는 이미 개로왕도 전사하고 한성도 함락된 뒤였다. 이에 문주는 목협만치(木協滿致).조미걸취(粗彌桀取)의 도움을 받아 즉위한 후 웅진으로 천도하여 국가재건에 노력하였다. 그러나 웅진천도 초기의 백제의 정치정세는 매우 불안하였다.

안으로는 한성에서 남하해온 귀족들이 자체분열을 일으켜 국정을 좌우하던 병관좌평 해구(解仇)가 문주왕을 살해하였으며, 그 뒤를 삼근왕도 재위 3년으로 끝 나고, 동성왕이 즉위하게 되는 상황이 벌어졌다.

한편 밖으로는 서해의 해상제해권이 고구려에 넘어가고 가야세력이 이탈해나가는 등 백제는 국제적 고립의 위기마저 맞이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노력한 이가 동성왕이었다.

그는 신라왕족인 이찬(伊찬) 비지(比智)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여 신라와의 동맹체제를 보다 돈독히 하였 으며 한편으로는 사씨(沙氏).연씨(燕氏).백씨(백氏) 등 신진지방세력들을 중앙정치에 등용하여 한성시대 이래의 세력과 의 상호견제와 균형을 도모하였다. 그리고 남제(南齊)와의 교통을 재개함으로써 국제적인 고립을 벗어나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위사좌평 백가(백家)의 세력을 억제하려고 그를 가림성(加林城) 성주로 파견하였다가 도리어 그가 보낸 자객에 의해 피살되고 말 았다.

동성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무녕왕은 백가의 난을 평정한뒤 나아가 고구려의 군사적 압력을 물리치고 세력균형을 이루면서 양(梁)나라로부터 영동대장군(寧東大將軍)의 작호를 받아 국제 관계상에서도 백제의 위치를 확립하였다. 한편 무녕왕은 유식자(遊食者)들을 귀농 시켜 생산력의 증대와 농민생활의 안정을 꾀하였고, 또 호남지역의 적극적인 개발과 가야지역으로의 진출을 적극 추진함으로써 한강유역의 상실로 인하여 축소된 경제기반을 확대하는데 노력하였다.

이로써 무녕왕대에 와서 백제는 정국의 안정을 이룩하게 되었고 강국을 칭할 수 있는 기틀을 다지게 되었다. 무녕왕릉에서 출토된 호화롭고 풍부한 부장품들은 무녕왕대의 왕권의 신장과 국력의 성세를 보여주는 물적증거가 되는 것이다.


백제의 사비시대

 

동성왕.무녕왕대의 안정기반을 바탕으로 성왕은 백제의 중흥과 왕권강화의 목적에서 사비로의 천도를 단행하였다.

사비천도는 백제왕실의 자주적 결단에 의한 것으로서 여기에는 영민하고 과단성 있는 성왕의 의지와 사비지역의 토착세력으로서 새로이 두각 을 나타낸 신진세력인 사씨(沙氏)의 강력한 지지 위에서 이루어진 것이 였다. 천도를 단행한 성왕은 왕귄 강화를 위한 제반조처를 추진하여 나갔다.

우선 국호를 남부여(南扶餘)'로 개칭하여 부여족의 전통을 강조하고 중국 남조와의 빈번한 교류를 통하여 그 문물을 받아들이고 일본에 선진문물을 전수하였다. 또 오부율(五部律)을 갖고 온 겸익(謙益)을 우대하여 백제적 계율종을 설립시키고 16관등제와 22부제(部制)등 중앙관제를 정비하고 수도 5부와 지방통치조직으로서 5방(方).군(郡)제를 갖추어 지방 통치력을 강화시켜 나간 것이 그것이다.

사비천도 후 성왕대의 이러한 조처는 동성왕.무녕왕.성왕으로 이어지는 이 시기의 정치가 왕권중심으로 움직여진 것임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여기에는 왕명을 봉행하는 22부가 그 핵심적인 기능을 하였다. 따라서 귀족들의 회의 체인 5좌평제는 정치일선에서 밀려나게 되었다.

백제의 중흥을 이룩한 성왕은 그의 필생의 사엽으로서 한강유역 회복작전을 기도 하였다.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그는 신라.가야군과 연합 하여 고구려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였다. 당시 서북으로부터 돌궐의 위협과 구족세력의 내분에 처해 있던 고구려의 위기를 이용하여 고구려군을 물리치고서 백제는 한강하류를, 신하는 한강상류를 점령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고구려와 은밀히 결탁한 신라는 군대를 돌이켜 백제가 점령한 한강하류 지역마저 빼앗아버려 양군 간의 화호(和好)관계는 깨지고 말았다. 이에 격분한 성왕은 신라에 대한 보복공격을 단행하였다.당시 노로(耆老)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단행된 이 정벌에서 성왕은 초기에는 우세를 보였으나 신라 원병의 증가와 신라 복병에 의한 성왕의 전사로 대세는 기울어지고 말았다. 이것이 유명한 관산성전투(管山城)이며 이 싸움에서 백제는 왕을 비롯하여 좌평 4명이 전사하고 사졸 3만여 명이 전사하는 대패를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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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정벌군의 출정이 귀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단행된 것이므로 관산성 패전은 백제의 정국에 커다란 파문을 던졌다. 그 결과 위덕왕 즉위 이후에는 귀족들의 정치에 대한 발언권은 증대되어 정치의 일선에 나서게 되었고, 이 시기에 대두되기 시작한 대성팔족(大姓八族)의 성립은 귀족 중심의 정치운영체제를 낳게 되었다. 이 것이 6좌평제였다. 6좌평제는 사비 시대전기의 5좌평제를 확대.개편한 것으로써 왕명의 출납.재정.의레.왕궁숙위.형옥.병마관계 사무를 관장한 최고 귀족회의체였다.

6좌평의 부상은 이것이 당시 정치의 중추였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관산성 패전이후 귀족 중심의 정치운영체제에 의해 위축된 왕권을 회복하고자 시도한 이는 무왕이다.

무왕은 비록 익산에서 마를 캐며 살다가 귀족들의 정략적인 옹립에 의해 왕이 되었지만 실추된 왕권의 회복을 위해 일련의 조처를 추진하였다. 신라에 대한 공격의 단행, 익산 천도를 위한 황궁과 제적사(宰釋 寺)의 건설, 거대한 미륵사(彌勒寺)의 창건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익산 천도가 실현되지 못함으로써 신도(新都) 경영을 통한 귀족세력의 재편성이라는 그의 계획은 좌절되고 말았다.

 


백제의 멸망

 

무왕이 죽은 뒤에 의자왕이 왕위를 이었다.

의자왕은 '해동증자(海東曾子)'로 불릴 정도로 유교이념에 투철하였으며 또 무왕이 다져놓은 기반 위에서 왕권강화를 추진하였다. 그것이 일단락된 것이 642년(의자왕 2)에 왕이 일으킨 정변이었다. 이 정변에서 의자왕은 내좌평 기미(岐味)등 유력귀족 40여명을 추방하였다.

대좌평(大佐平) 사택지적 (砂宅智積) 이 나지성(奈祗城)으로 은퇴한 것도 이러한 정치적 변혁에서 온 것이었다. 귀족의 세력을 약화시키면서 왕권중심의 정치운영체제를 확립한 의자왕은 초기에 는 고구려.왜와 화친관계를 수립하고 지배질서를 확립하는데 주력하였다. 그러나 후기에 가서는 성충(成忠) 의 투옥이 보여주듯 이 이미 지배계층 사이의 분열이 심화되기 시작하였고, 나아가 후반 기에 들어와 부절제하게 되어진 의자왕의 탐락과 황음(荒淫), 그에 따른 궁중내부에서의 부패와 정권의 천단은 백제의 지배질서를 더욱 분란시켰다.

더구나 한강유역 상실 이후 신라와의 사이에 형성된 구수(仇讐) 관계로 백제는 신라에 대한 공격을 가중시켜 나갔다. 특히 미후성(彌帿城)등 40여성을 빼앗고 대야성(大 耶城)을 함락시킨것은 커다란 개가 였으나 이는 도리어 신라로 하여금 당나라와의 결합을 보다 촉진시키게 하였다. 따라서 번번한 전쟁에서 오는 국력의 피폐와 나당 연합군의 외부로부터의 압력은 백제의 상황을 더욱 곤궁으로 몰아넣었다. 그 결과 나당연합군의 공격을 받은 백제는 효과적인 대응책을 마련하지 못한채 절대적 전략요충지인 기벌포(伎伐浦)는 당군이 통과하였고 대신라 (對新羅)요충지인 탄현(炭峴)도 신라군이 무사히 통과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계백(階 伯)이 거느린 결사대 5천명도 신라군의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와해되어 버렸다. 나당 연합군이 사비성으로 육박해 들어가자 다급해진 의자왕은 태자와 더불어 웅진성 봉막으로 피난을 갔으나 사비성을 지키면서 스스로 왕위에 올랐던 왕자 태(泰)가 당군에 항복하면서 의자왕도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당나라에 항복하고 말았다.
(출처 : '백제의 역사.' - 네이버 지식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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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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