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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경주설씨는 시조는 누구이며 설씨의 성(卨=楔=사람인변설)은 모두 같은 성씨며 시조가 동일한지요
seol**** 조회수 3,799 작성일2008.07.05

1. 경주설씨는 고려말때 홍건적난을 피해 고려와 들어와 정착했다는데 어떻게 하여서 성을 설로 쓰게 되었으며

 

성씨한자 (卨=楔=사람인변설은 모두 같은  성씨로 쓰이는지)로 3개의 한자로 쓰이는 것을 볼수 있는데

 

모두 같은 성씨의 한자이고 동일한 시조인지요?

 

2. 그리고  한자의 뜻풀이를  보면 사람이름설, 맑을설, 이라고 되어 있는 것을 볼수 있는데 한글의 '설'과 같은 의

 

미로 사용되는 것인지?

 

3. 경주설씨의 본은 하나인지 다른 본이 있는지?

 

3. 조선시대에 과거의 급제한 사람은 모두 몇명이며  책을 편찬한 사람이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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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yul****
수호신
전통 예절, 의식 1위, 사회문화 1위, 폭행 15위 분야에서 활동

님의 질문에 도움이 될까하여 올려드립니다.

 

== 존칭은 생략하옵고 ==

 

경주설씨(慶州偰氏)에 대하여

 

시조 및 본관의 유래(始祖 本貫 由來)

위구르계 귀화성씨로는 경주설씨(慶州乾氏)가 있다. 시조는 설손(乾遜)이다. 《경주설씨세보》에 의하면 그는 위구르 사람으로 원나라에 벼슬하여 단주태수(單州太守)로 있을 때 친상을 당하여 대령(大寧)에 가 있었는데 홍건적(紅巾賊)의 난을 피해 고려로 들어와 1358년(공민왕 7)에 귀화하였다. 공민왕은 그를 후히 대접하여 부원후(富原侯)로 봉하고 부원의 땅을 주었다. 호를 근사재(近思齋)라 하며 시인으로 활약하였다.

1.  설씨 (薛氏)의 시조(始祖)는 신라 건국(新羅建國)의 원훈(元勳)으로 지금의 월성군 천북면(月城郡川北面) 화산(花山)?물천(勿川)?동산리(東山里)와 안강읍(安康邑) 일대인 명활산 고야촌(明活山高耶村)을 다스렸던 촌장(村長)이다.

「 삼국사기 (三國史記)」에 의하면 그는 기원전 57년 다른 5부(五部)의 촌장들과 함께 알에서 태어났다는 박혁거세(朴赫居世)를 초대 왕(王)으로 추대하여 신라를 세웠다고하며, 서기 32년 봄 3대 유리왕(儒理王) 때 고야촌이 습비부(習比部)로 개칭되면서 설씨(薛氏)의 성(姓)을 하사(下賜) 받았다고 한다.

이렇게 문호(門戶)가 열리게 된 설씨는 설거백 (薛居伯)을 시조로 받들고 서 라벌(徐羅伐) 경주 (慶州)를 본관(本貫)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오다가 36세손 자승(子升)이 고려 인종(仁宗) 때 예부 시랑(禮部侍郞)을 지내고 순화백(淳化伯 : 순창의 옛 지명)에 봉해진 연유로 본관을 순창 (淳昌)으로 이관(移貫)하게 되었다.

순창 (淳昌)은 전라북도(全羅北道) 남쪽 중앙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원래 백제(百濟)의 도실군(道實郡)인데 신라(新羅) 경덕왕(景德王)이 순화군(淳化郡 : 일명 순화군)으로 고치고 고려(高麗) 때에는 순창현이 되어 남원부(南原府)에 속하였다가 1314년(충숙왕 1) 군(郡)으로 승격, 조선(朝鮮) 시대에도 그대로 군으로 삼았다.

신라시대에 불유사상(佛儒思想)의 양대산맥을 이루었던 사(思 : 원효대사)와 총(聰 : 본명 설총지)의 부자(父子)는 설씨가 자랑하는 인물(人物)로 민족사에 남긴 찬란한 업적으로 후세에 추앙받고 있다.

아찬군(阿?君) 이금(伊琴)의 아들로 지금의 경북 경산군 자인면(慶山慶山郡 慈仁面)에서 태어난 원효대사(元曉大師)는 그의 어머니 조씨(趙氏)가 유성(流星)이 품속에 드는 꿈을 주고 배었다고 하며, 그가 태어날 때 오색 구름이 땅을 덮었다고 한다.

그는 32살에 불문(佛門)에 들어가, 661년(문무왕 1) 의상(義湘)과 함께 당(唐)나라로 유학가는 길에 배를 기다리다가 큰 비를 만나 근처 토굴로 피신하여 밤을 지내게 되었다. 이튿날 잠에서 깨어보니 그 곳은 토굴이 아닌 옛 무덤 속으로, 해골 옆에서 잠을 잤고 간밤에 마셨던 물은 해골에 담길 물이었다는 것을 알고 “만사는 생각하기에 따라 망상이 생기니 차별하는 마음을 버리면 토굴이나 무덤인들 어떠랴, 이 세상 갖가지 현상은 오직 자신의 마음가짐에서 유래하는 것, 그것이 바로 진리요 스승이거늘 어디에 가 서 스승을 따로 구하랴”하며 다시 돌아와 분황사(芬皇寺)에서 불교 보급에 힘써 독자적인경지를 열었다.

그후 그는 문무왕(文武王)의 딸 요석공주(瑤石公主)와 혼인하여 아들 총(聰)을 낳고 스스로 파계(破戒)를 선언하여 승복을 벗고 소성거사(小性居士)로 자칭하며 참선과 저술(著述)에만 전념, 한국불교사상(韓國佛敎史上) 가장 위대한 고승(高僧)으로 일컬어졌다.

최치원(崔致遠)?강 수(强 首)와 함께 <신라 삼문장>으로 손꼽히는 총은 이두(吏讀) 문학의 창시자로도 명성을 떨쳐 민족문학사에 찬란한 금자탑(金子塔)을 세웠다.

고려조에서 가문을 빛낸 인물로는 29세손 경(鏡)이 태조 때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로 부원군(府院君)에 봉해지고 39세손 신(愼)은 고종 때 추밀 원사(樞密院使)로 순화백(淳化伯)에 봉해졌으며, 그의 아들 공검(公儉)과 인검(仁儉)이 뛰어났다.

고종 때 도병마 녹사(都兵馬錄事)로 문과(文科)에 급제한 공검은 예부 낭중(禮部郎中)과 군기감(軍器監)을 거쳐 충렬왕(忠烈王) 때 밀직부사(密直副使)과 지첨의부사(知僉議府事)을 지내고 찬성사(贊成事)로 치사(致仕)하여 청렴으로 이름을 떨쳤으며, 그의 아우 인검은 평장사(平章事)을 역임했다.

한편 공검의 아들 지충(之沖)은 충숙왕(忠肅王) 때 찬성사(贊成事)를 거쳐 삼중대광(三重大匡)으로 영의정(領議政)에 올랐으며, 그의 아들 봉(縫)은 병부 시랑(兵部侍郞)을 역임하여 충정왕조(忠定王朝)에 대사헌(大司憲)을 지낸 손자 안통(安統 : 봉의 아들)과 함께 가세(家勢)를 일으켰다.

조선조에 와서는 세종(世宗) 때 만경 현령(萬頃縣令)을 거쳐 대사성(大司成)에 오른 위(緯)가 시 (詩)와 문장 (文章)으로 이름을 떨쳤고, 창덕궁 직장(昌德宮直長) 훈(?)의 맏아들 효조(孝祖)는 목사(牧使)을 거쳐 호조 참판(戶曹參判)을 지냈으며, 그의 아우 계조(繼祖)는 계유정난(癸酉靖難)에 공(功)을 세워 정난삼등 공신(靖難三等功臣)으로 옥천군(玉川君)에 봉해졌다.

그외 임피 현령(臨陂縣令)을 지낸 주(柱 : 계조의 아들)와 옥구 현감(沃溝縣監) 초(礎)의 부자(父子)가 유명했고, 후손 우범(禹範)은 임진왜란 때 창의(倡義)하여 남원(南原), 거제(巨濟), 옥포(玉浦) 등지에서 전공을 세웠으며 의주(義州)로 피난가는 선조(宣祖)을 호종(扈從)하여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으로 훈련원정(訓鍊院正)에 이르렀다.

영조(英祖) 때 무과(武科)에 급제했던 창후(昌?)는 이인좌(李麟佐)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워 분무원종공신(奮武原從功臣)으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올라, 간성 군수(杆城郡守) 겸 수군 방어사(水軍防禦使)를 지낸 응정(應貞), 제용감 판관(濟用監判官) 술남(述男), 호조 정랑(戶曹正郞) 흥범(興範), 부호군(副護軍) 광윤(光潤) 등과 함께 가문을 빛냈다.

 

태조 이성계는 재위 5년(1396) 11월 판삼사사(判三司事) 설장수에게 계림(鷄林)을 관향(貫鄕)으로 내려준다. 경주 설씨의 탄생이다. '태조실록'은 설장수를 '회골 사람'이라고 전하는데, 회골은 회흘(回紇), 위올(偉兀)이라고도 하며 위구르(uighur)를 뜻한다. '정종실록' 1년(1399) 10월조는 설장수의 선조를 '회골 고창(高昌) 사람'이라고 전한다. 중국 북서쪽의 실크로드 도상에 분지 도시 투루판(吐魯蕃)이 있는데 그 부근에 있던 고창 왕국 출신이란 뜻이다. 현재 흙으로 쌓은 고창 고성(古城) 유적지는 관광객들의 필수 코스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의 '경주 설씨 항목'에는 '설씨의 선조는 대대로 설련하에서 살았으므로 설을 가지고 성씨로 삼았다'고 전하고 있는데, 이들이 우리 역사와 관련을 맺은 것은 고려 공민왕 때이다. 경주 설씨의 시조는 원나라에서 참지정사(參知政事)를 지낸 설문질인데, 그 손자 설손이 고려로 귀순하자 공민왕이 고창백(高昌伯)에 봉해준 것이 시작이다. 설손의 아들이 설장수인데 공민왕 11년(1362) 과거에 급제해 훗날 충의군(忠義君)에 봉해질 정도로 승승장구했다. 그러다 조선 개창에 반대해 이색 등과 귀양갔다가 이성계의 '잠저(潛邸) 때의 지우(知遇)'라는 이유로 사면받고 다시 벼슬에 나왔다.

설장수는 태조 3년(1394) 역관들의 부서인 사역원 제조(司譯院提調)가 되자 역과(譯科)에 위구르(偉兀)어를 시험 과목으로 채택했다. 몽고어 역관은 위구르어까지 알아야 제1과로 급제할 수 있었다. '신당서(新唐書)' 회골열전은 그 선조를 흉노라고 전하고 있는데, 안녹산(安祿山)의 난 때 당 숙종(肅宗)의 요청으로 군사도 파견했던 강국이었다. 현재는 중국이 점령해 신장 웨이우얼(위구르)자치구를 설치하고, 서북공정을 진행해 그 역사를 중국사로 편입시켰다. 동북공정으로 공격당하고 있는 우리로서는 동병상련을 느낀다. 위구르 출신의 아리예 위샌(32)이 서울시 공무원이 되었다는 소식에 두 나라의 오랜 인연이 생각났다.

2. 본의 종류

설씨는 조사에 의하면 10개파로 나누어져 있으며 그 본관은 경주설씨, 밀양설씨, 순창설씨, 순천설씨, 옥천설씨, 진주설씨, 창원설씨, 결성설씨, 광주설씨, 개성설씨로 되어 있고 또 조사결과 기타 11명 미상 57명이 됩니다.

 

2-1 본관정리

설(薛)씨의 본관은 개성, 결성, 경주, 광주, 밀양, 순창, 순천, 옥천, 진주, 창원 등 총 10개의 본관에 인구는 2000년 현재 38,766명이 있다.

 

 순창설씨(淳昌薛氏)의 시조는 설호진(薛虎珍)이다. 순창설씨는 조선시대에 설위(薛緯),설경관(薛慶觀), 설관징(薛觀徵), 설시민(薛時敏), 설언룡(薛彦龍), 설거일(薛居一), 설당, 설욱준(薛煜俊), 설장영(薛長榮), 설원개(薛元凱) 등 문과 2명, 무과 2명, 사마시 8명, 율과 1명 등 모두 13명의 과거 급제자를 배출했다.

 순창설씨는 1985년에는 총 5,863가구 24,181명, 2000년에는 총 8,607가구 27,926명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옥천설씨(玉川薛氏)는 조선시대에 설만동(薛萬東), 설휘(薛徽), 설규징(薛奎徵), 설정(薛晸) 등 사마시 4명의 과거 급제자를 배출했다. 옥천설씨는 1985년에는 총 123가구 518명, 2000년에는 총 318가구 1,070명이다.

 

 개성설씨(薛氏)는 1985년에는 총 59가구 229명, 2000년에는 총 241가구 787명이다. 결성설씨(薛氏)는 1985년 조사에서는 나타나지 않았고, 2000년에는 총 3가구 6명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광주설씨(光州薛氏) 조선시대에 설수철(薛守哲) 등 무과 1명의 과거 급제자가 나왔다. 광주설씨는 1985년 조사에서는 나타나지 않았고, 2000년에는 총 1가구 2명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밀양설씨(薛氏)는 1985년에는 총 19가구 62명, 2000년에는 총 196가구 601명이다. 순천설씨(薛氏) 1985년에는 총 160가구 687명, 2000년에는 총 473가구 1,582명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진주설씨(薛氏) 1985년에는 총 21가구 136명, 2000년에는 총 126가구 421명이 있다. 창원설씨(薛氏) 1985년에는 총 9가구 47명, 2000년에는 총 79가구 243명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한편 한글이 같을 뿐 전혀 뿌리가 다른 설(偰)씨가 있다. 위구르계(회골계.回鶻系)의 귀화 성씨로 본관이 경주(慶州) 단본이다. 한국 성씨 가운데 위구르계는 설씨 외에 임천이씨(林川李氏)가 있다.

설(偰)씨의 시조는 원나라의 참지정사를 지낸 설문질(偰文質)이다. 그러나 한국에 귀화한 것은 그의 손자인 설손(偰遜)이다.

설(偰)이란 성은 그의 선대가 설련하(偰輦河.중국.몽골 국경지대)에서 살았기 때문이다. 설손은 원나라 순제 때 단본당(端本堂) 정자(正字)로서 학문이 깊고 문장이 뛰어난 시인이다. 그는 1358년(고려 공민왕 7년) 홍건적의 난을 피해 우리나라에 귀화했다. 공민왕이 그를 대접하여 부원후에 봉했다. 그리고 그의 아들 설장수가 경주로 본관을 하사 받아 본관을 경주로 하였다.

설손의 아들 5형제 중에서 설장수(偰長壽)가 대표적 인물이다. 설장수는 공양왕 때 문하찬성사를 거쳐 판삼사사를 역임했으나 정몽주의 일당으로 몰려 유배되었다. 그 뒤 조선 개국 후 다시 등용되어 검교문하시중에 오르고 경주에 사적(賜籍)되었다.

설장수의 아우 설경수(偰慶壽)와 설미수(偰眉壽)도 문과에 급제했다. 설미수는 태종 때 예조판서와 검교우참찬을 역임했다. 설경수의 아들 설순(偰循)은 세종 때 동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경주설씨(慶州偰氏)는 조선시대에 설순(偰循), 설순(偰循), 설홍(偰泓), 설겸(偰謙), 설동인(偰同寅) 등 문과 2명, 무과 1명, 사마시 2명 등 모두 5명의 과거 급제자를 배출했다.

 

3. 경주설씨 항열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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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29

30

항렬자

行列子

 
 
4. 전국의 인구수

2000년 기획원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설씨(薛氏)는 남한(南韓)에 총 11,931가구, 38,766명인 것으로 나타났다.

 

끝으로 님의 건강과 행복이 충만 하시기를 두 손 모아 빌겠습니다.

 

2008.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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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퇴한 사용자 답변

1.시조 같음

2.내

3.있긴한데 잘모름

4.ㅈㅅ모름

2008.07.06.

3번째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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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ghm****
시민

이순신 장군의 시조 중...

한자음이 '일휘(단칼을 휘둘러)'라는 말이 들어가는 듯 하고

 

전쟁에 앞서 왜군을 쓸어버리겠다는 시조가 있는데 제가 기억이 안나네요.

 

파일을 저장했었는데 날려버렸네요.

 

제발 좀 알려주세요.

 

한자/한자음/풀이 까지요..

2008.07.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