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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우리나라의 역사요..^^ 꽤쉬움..저중2임..ㅇㅇ
cdya**** 조회수 1,689 작성일2008.05.28

1950년부터 지금현재 2008년까지 특별한일이 일어난 날짜 와 그에대한 설명과 꼭 평민들이 그당시 대충 무엇을 했는지...정도요

년도도 적어주세요..ㅇㅇ

예를들면 6.25전쟁이 몇년도 에일어났고 평민들이 뭘했고..ㅇㅇ 전쟁은 무엇으로 인하여 전쟁하게됬따

요정도요....ㅎㅎ 좀 혁명 같은것도 해주면 좋죠..^^ 꼭 우리나라 여야겠죠..ㅇㅇ

그때당시 사진도 올려주시면 좋아요..ㅎ^^

한.. 평균 5개정도의 사건을 말해주시면 좋죠..ㅎㅎ 많으면 많을수록

해줄 채택 가능성 많습니다..^^

6월15일 까지니까 천천히 하셈..ㅎ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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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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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개 답변
1번째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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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ll****
중수
수학 분야에서 활동

아아아 평민 ㅋㅋㅋ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초대 대통령 이승만]

1950년 6월 25일  6-25 전쟁

 

1960년 3월 15일 3,15 부정선거 [이승만]

1960년 4월 19일 4,19 혁명 [이승만 하야]

1961년 5월 16일 5,16 군사정변 [박정희]

 

1972년 10월 17일 유신헌법 개정

1979년 10월 16일 부산마산 항쟁

1979년 10월 26일 10,26 사태 [박정희 암살]

1979년 12월 12일 12,12 사태 [전두환 반란]

 

1980년 6월 민주항쟁

1980년 6월 29일 직선제 개헌

 

 

2008.05.29.

  • 채택

    지식인 채택 답변입니다.

2번째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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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d8****
고수
국방무기, 한국사 분야에서 활동

 

1948년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이승만 대통령이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하게 됩니다. 그리고 나서 1950년에 6,25전쟁이 발발하게 되지요. 1950년 6월부터 1953년 7월까지 3년에 걸친 전쟁은 수많은 인명피해를 냈습니다.  한국군과 유엔군이 18만명의 전사자를 냈으며 북한군 50만명 중국군 90만명이 전사 합니다. 민간인의 피해도 심각해서 약 100만명 정도가 사망하거나 부상당하게 됩니다.  또 안그래도 후진국이었던 한국의 공업시설과 다리, 도로등이 거의 대부분 파괴되었으며, 민주주의 또한 발전하지 못했지요. 50년대 국가의 주요 산업은 농업이었습니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농업에 종사했으며, 공업시설은 거의 없었습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그 당시의 한국은 미래가 전혀 없었습니다. 국민들의 교육수준이 높은것도 아니며, 자원은 거의 없었고, 그렇다고 기술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습니다. 또 50년대 한국에 대해서 빼먹지 말아야 할 중요한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은 우리나라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 이라는 사람입니다. 이 사람은 원래는 52년 부산에서 실시된 대통령 선거에서 떨어졌어야 했던 사람입니다. 하지만 자신의 권력에 눈이 멀었던 이승만은 자신의 재선이 어렵게 되자 자유당을 창당하고 계엄령을 선포했으며 반대파 국회의원을 감금하는 등 변칙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선거 방법을 직선제로 바꿔 대통령에 재선되었습니다. 또한 1954년 자신의 경우에만 적용되는 종신대통령제 개헌안을 발의, 국회에서 1표 부족으로 부결되었는데, 사사오입의 해석논리를 변칙적으로 적용하여 번복, 통과시킴으로써 1956년 대통령에 3선되었습니다. 1958년 12월 차기 대통령 선거에 대비하여 국가보안법 등 관계법령을 개정하고 경제시책의 빈곤으로 인한 특정재벌에 대한 특혜 등으로 국민의 지탄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이승만 대통령의 이런 부정적인 방법에 학생과 시민들은 분노하게 되지요. 그래서 4.19 혁명이 일어나게 되었고 그로인해 이승만은 대통령에서 사임하고 하와이로 망명하게 됩니다.  12년에 걸친 장기 집권이 그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되는 순간이었지요. 그다음에 윤보선이 대통령에 선출되지만 그는 61년 에 일어난 군사정변의 주역인 박정희때문에 63년 대통령에서 물러나게 됩니다.60년대  박정희는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하고 그 계획을 단계적으로 실시함으로서 경제개발에 크게 기여하였으며 60년대 말에는 베트남에 수도기계화사단(맹호부대) 육군9사단(백마부대)해병2사단(청룡부대)를 베트남에 파병했고, 그로 인해 한국군의 장비 현대화에도 크게 기여 했습니다.박정희 대통령이 한국 경제에 미친 영향은 분명 커다란 것이었으나 그의 집권 초기였던 1960년대에는 그다지 커다란 성과를 이루지는 못했었습니다. 당시의 생활은 50년대와 별반 나은것이 없었습니다. 당시의 산업은 여전히 농업 이었습니다.  파병을 끝마 치고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어느정도 성과를 이루고 새마을 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1970년대에 들어와서야 한국은 어느정도 가능성을 보여줬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70년대의 한국도 어느정도의 가능성만 보여준 것이지 지금의 자동차,조선,반도체 가전제품, 첨단IT기술등은 80년대 에서 90년대에 생겨난 기술들입니다. 70년대의 산업은 농업에서 공업으로 바뀌는 과도기 시절이었으며 그당시 공업은 대부분 경공업(섬유, 가발) 등등이었지 중화학 공업이나 첨단 기술등은 당시의 한국에서는 구경하기 힘든 것이었습니다. 한기지 예를 들어보자면 현재 세계 1위의 한국 반도체도 삼성에서 개발한 64KD 램이 최초 인데 이것 역시 1980년대 초반에 만들어 진 것입니다.

60년대 국민들의 생활을 들여다 보면 당시는 아직까지 보릿고개가 존재하는 시기였으며 경제적으로도 상당히 좋지 않던 시기 였습니다. 대부분의 가정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농업에 종사하였고 자녀들도 잘해야 고등학교를 나오는 수준이었습니다. 당시의 대학은 지금과는 달리 말 그대로 엘리트 집단이었으니까요. 하루 세끼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판국에 공부를 하기는 힘들었지요. 하지만 당시의 아버지 어머니들은 자기들이 못배웠던 고통을 알기에 자녀들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공부를 시키려 했습니다. 교육열이 대단했지요. 지금의 그 대단했던 교육열은 예전부터 있었습니다. 그러한 교육열이 한국의 젊은이들을 공부시켰으며, 열정으로 똘똘 뭉친 당시의 학생이던 지금 우리의 아버지들은 배웠던 지식을 지금 남김없이 사용해 전쟁후 최악의 빈국이었던 한국을 50년만에 세계 경제 10위의 경제 대국으로 바꿔 놓았습니다.

또한 60년대 한국의 정치 상황을 살펴 보자면 말 그대로 암울 그 자체 였습니다. 419 혁명으로 인해 한국의 민주주의를 실현하려고 했던 국민들은 516군사정변으로 그 희망을 접어야 했지요. 박정희 대통령은 분명히 경제적으로는 대단히 성공적인 대통령임에는 틀림없지만 인권적인 문제나 정치적으로는 그다지 좋은 대통령은 아니었습니다. 경제에서 성장과 배분의 문제는 상당히 다루기 민감한 문제입니다. 당시의 박정희 대통령은 지나친 성장만을 추구한 나머지 배분은 등한시 하였습니다. 그 때문에 저임금 노동자의 인권은 상당히 무시되어 왔습니다. 예를 들어보면 전태일과 같은 사람을 들을 수 있겠지요. 예전에 평화시장에서 일용직으로 근무하시던 지금의 우리의 아버지 어머니께서 희생하지 않으셨다면 지금의 한국은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한국의 민주주의의 발전은 60년 4.19혁명에서 전두환 집권에 반대한 79년 부마사태, 80년 5.18광주 민주화 운동, 그리고 전두환을 대통령에서 끌어내린 87년 6월 민중항쟁으로 이어지지요~~

 여기까지가 80년대 까지구요 80년대 중요한 사건인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해서  한마디 쓸테니 잘 읽어보세요~

 

광주 민주화 운동을 이야기하려면 전두환의 등장부터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전두환의 등장부터 살펴보자.

 1979년 10월26일 그때까지 대통령이던 박정희가 당시 중앙정보부장관 김재규에게 총 맞고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 당시 국무총리였던 최규하가 권한대행을 수행했고, 12월6일에 보궐선거로 당선됐으니, 바로 우리나라 4대 대통령인 최규하 대통령의 정권이 수립된 것이다.

 그러나 최규하에게 비운의 사건일 일어난다. 12.12 사태가 바로 그것이다. 당시 보안사령관이던 전두환소장이 박정희 대통령살해사건의 합동수사부장을 겸하고 있었다. 그런데 당시 육군참모총장이자 계엄사령관이던 정승화대장과 전두환은 서로 인사문제로 트러블이 몇 가지 있었다. 기회를 잡은 전두환은 10.26사건 때 김재규가 정승화에게 돈을 줬고, 수사에 비협조적이라는 이유로 정승화를 체포하는 계획을 수립했다. 그리고 12일 저녁에 육참총장 관저를 습격해 정승화를 체포하고, 국방부와 육군본부를 습격해 장악했다. 당시 계엄군사령관은 대통령의 명령 없이는 체포할 수 없는 존재였다. 즉 전두환은 불법으로 정승화를 체포하고 육군본부를 장악한 것이다.

 전두환의 만행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정승화를 체포하고 군의 지휘체계를 완전 장악한 후에  최규하 대통령에게 재가를 해달라고 협박하기에 이른다. 최규하는 처음에는 거절하다가 마침내는 전두환과 당시 국방장관이던 노재현에게 굴복해 쿠데타가 일어 난지 하루만인 13일 재가를 승인해 주게 된다. 이로서 전두환을 주축으로 한 신군부가 정권을 장악하게 되는 것이다. 

 유신이후 박정희 대통령 사망과 함께 최규하를 대통령으로 뽑은 국민들은 다시 신군부가 정권을 장악하자 분노했다. 1980년 3월 신학기부터 각 대학에 학생회와 평교수회가 부활되고 긴급조치로 밀려났던 해직교수와 제적학생들이 학교에 복귀함으로써 학원민주화 열풍이 일기 시작했다. 노동자들도 노조 민주화, 근로조건 개선을 내세우며 전열을 가다듬었다.

 4월14일 전두환이 중앙정보부장 서리로 임명되고, 4월30일 계엄사령관 지휘관회의에서 노사분규, 학원소요 등 폭력 엄단키로 결의하자. 마침내 민중들은 폭발했다. 27개 대학 학생대표들은 힘의 응집을 위하여 집회와 가두시위를 일제히 전개하기로 결의하고 5월 14일 광화문, 종로 등에 5만 여명, 15일에는 서울역 광장에 학생, 시민 20만 명이 운집하여 계엄철폐, 민주화 추진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다. 학생지도부는 국민의 의사가 충분히 전달된 것으로 판단하고 17일부터 정상수업을 받으면서 시국을 관망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계엄사령부는 학생시위가 소강상태에 접어든 틈을 타서 5·17 비상계엄확대조치를 선포했다. 그리고 신군부는 1980년 5월 18일 0시를 기해 비상계엄 전국 확대를 단행하였다. 계엄사령부는 모든 정치활동의 중지 및 옥 내외 집회 시위의 금지, 언론 출판 보도 및 방송의 사전 검열, 각 대학의 휴교령, 직장이탈 및 태업파업의 금지 등의 조치를 취했다. 이로써 정치인의 손발을 묶고 학생과 기층민중의 투쟁에 쐐기를 박은 데 이어 18일에는 김대중, 김종필 등 26명의 정치인을 학원, 노사분규 선동과 권력형 부정축재혐의로 연행하고 김영삼을 연금시키는 등 정치적 탄압을 감행했다. 이러한 조치는 헌법에 규정된 국회통보 절차도 거치지 않고 계엄군을 동원, 국회를 무력으로 봉쇄한 채 취해진 불법조치였다.

 비상계엄의 확대에 따라 전북 금마에 주둔하고 있던 7공수부대가 17일 저녁 10시경 광주에 투입되어 전남대, 조선대, 교육대 등에 진주하였다.

 광주에서 계엄군과 국민들의 최초 충돌은 전남대에서 행해졌다. 5·17비상계엄 전국 확대로 휴교령이 내려진 전남대 정문 앞에서 5월 18일 10시경 등교 중이던 전남대생들과 출입을 제지하는 7공수의 계엄군이 최초로  부딪쳤고, 그로 인하여 광주항쟁의 단초가 제공되었다. 무장 계엄군의 통제에 항의하는 학생 수는 삽시간에 100여명으로 불어났고 그들은 일정한 거리를 두고 "계엄군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쳤다. 등교를 원하는 당연한 권리였고 평화적이고 자연발생적인 시위였다. 그런 학생들에게 계엄군은 무차별 진압을 시작하였고,  전남대 학생들이 금남로에서 가두시위를 시작하자 오후 3시부터 작전명“화려한 휴가”가 전개되었다. 3~4명씩 짝을 이룬 계엄군은 시민들을 무차별로 폭행했다. 계엄군의 무차별 폭행으로 당시 24살이었던 정신지체 장애자 김경철이 최초의 사망자로 기록된다. 그러한 계엄군의 과잉진압과 폭력이 광주에서는 학생뿐만이 아니라 일반인까지 시위에 가담하게 된 것이다.

 작전명 화려한 휴가의 무자비한 진압으로 인해 시민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그러자 계엄군은 그 소강상태를 이용해 광주시내에 통금시간을 밤9시로 앞당긴다. 그렇게5월18일이 지나갔다. 시민들의 저항이 생각보다 강하자, 계엄군은 군을 증파하기로 결정하고 증파된11여단이 19일 오후3시에 광주역에 도착했다. 무리하게 무력으로 시민들을 진압하려 했으나, 시민이 더욱 세게 반발하자 더욱더 무력을 시민에게 행사하려는 신군부의 의도가 확실하게 들어난다.

 5월 20일 항쟁 3일째, 3공수 여단이 광주로 증파되었다. 오전에는 소강상태였으나 오후가 되면서 광주 시가지는 다시 팽팽한 대치국면으로 긴장감이 고조되었다. 오전 10시에 카톨릭 회관 앞에서 남여 30명이 속옷만 입혀진 채 계엄군에게 무차별적으로 폭행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로 인해 시장의 상인들까지 철시하고 시위에 나서기 시작하여 그 인파는 10만 여명이 넘었다. 윤상원 등 사회운동 진영에서 계엄당국의 거짓된 선무방송에 맞서기 위해 만든『투사회보』가 시내도처에 수천 매씩 뿌려지면서 항쟁의 열기가 고조되었다. 공수부대의 만행에 격분한 택시기사들이 200여대의 차량시위를 감행함으로써 소강상태에 빠져있던 시위군중들의 전의에 불을 질렀다. 시내 곳곳에서는 자발적인 시위대가 형성되었다.

 시위대는 시위로끝내려 한게 아니라 계엄군과 협상도 시도했었다. 하지만 계엄군은 시민의 의견을 들어보려고 하지도 않았었다.여러 차례 협상을 통해 시위를 보장받으려던 사람들이 협상이 안 되니까 급기야는 차량을 몰고 돌진하기 시작하였고, 이에 다급해진 군부대의 장갑차가 급히 퇴각을 하면서 넘어진 군인을 덮치게 되고, 그가 현장에서 즉사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는 특전사에 배속된 지 얼마 안 되는 신참내기 병사였다. 공수부대도 더 이상 사건을 관망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비록 무차별적인 진압을 한 것은 공수부대였지만 그들은 상부의 명령에 의해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도 살기 위해서는 진압을 할 수 밖에 없는 지경에 까지 이른 것이다. 당시 진압에 참가한 군인들도 전두환과 신군부에 의해 조종된 피해자라는 것이다. 

 당시의 광주는 무차별적인 진압으로 인한 폭력시위, 폭력시위로 인해 더욱더 격렬해진 과잉진압 이렇게 악순환이 반복되어지고 있었다. 

 밤 11시경 광주역을 지키고 있던 공수부대와 시위대의 공방전이 격렬해지고 시위대가 차량을 앞세워 군의 저지선을 돌파하려하자 일제히 발포를 하였다. 이것이 시민을 향한 공수부대의 최초 발포였다. 비슷한 시각에 세무서 앞과 조선대 부근에서도 발포가 있었다. 광주역 광장에서 계엄군의 발포로 인해 시민 두 명이 사망했다.

 21일에는 육군 20사단이 광주로 증파되었다 이로서 광주에 무장한 군인들은 모두 2만 여명에 달했다. 이날 시외전화가 두절되었다. 시민들은 새벽4시에 시체2구를 리어카에 싫고 금남로에 모여들었다. 이에 계엄군은 시민들에게 일제히 발포를 명하게 되고 오전10시에 실탄을 지급받은 11공수의 공수부대원이 맨 앞으로 교체된다. 그리고 오후 1시에 도청 스피커에서 애국가가 흘러나오면서, 도청광장에 모여있던 수만 명의 시민들에게 계엄군은 경고사격도 없이 일제히 조준사격을 실시했다. 사격은 메가폰을 통해 사격중지라는 명령이 내려질 때까지 10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국민을 지키기 위해, 국민의 세금으로 조직된 군인이 국민을 학살하는 참담한 장면이 연출된 것이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누가 발포명령을 내렸는지 또 도청광장에서 얼마만큼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는지 진실은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

 그런데 애국가는 왜 틀었을까? 그건 시민들에게 발포를 꺼려하는 일부 군인들에게 애국심을 자극하기 위해서였다. 시위대에게 총질을 해서라도 시위를 막는 것이 애국이라고 이야기 한 것이다. 그리고 더 황당한 것은 전라도지사가 그렇게 시민들이 죽어간 후 금남로 일대에서 헬기로 시위대 해산을 설득하는 방송을 했다는 것이다. 발포하기 전에 해산방송을 했더라면 이러한 참극을 막을 수도 있었을 텐데 그들은 일단 발포하고 시민들을 죽인 다음에 해산방송을 한 것이다.

 오후3시40분경에 계엄군은 광주시내 주요 건물 옥상에서 시위대에게 조준사격을 실시했다. 계엄군의 총격에 시민들도 무장의 필요성을 느끼고, 무기고와 자동차공장에서 무기와 군용트럭 등을 획득했고, 오후4시경에 시가전이 전개되었다. 광주에 시민군이 탄생한 것이다. 시민군의 무장에 계엄군은 당황했다. 전남대병원 옥상에 배치된 시민군의 LMG기관총 두정이 결정적으로 계엄군을 몰아붙였고, 계엄군은 오후 5시30분부로 광주시내에서 철수하게 된다.

 5월22일부터 충정작전이 개시되기 직전인 5월26일까지 광주시는 무정부 상태였다. 군대도, 관공서도, 경찰도 없었고, 오로지 시민들뿐이었다. 시민들도 무장한 시민들이었다. 그러나 그들만의 도시였던 5일간의 광주에서는 단 한건의 범죄사건도 발생하지  않았다. 적십자병원의 헌혈차와 시민군의 지프가 환자들을 위한 헌혈을 호소하자 시민들은 기꺼이 헌혈에 응하였으며, 총기회수작업도 자체적으로 실시했다. 도청게시판에 사망자 명단과 실종자 인상착의가 게시되었고, 학생들이 시민들에게 청소를 협조하자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청소에도 응해주었다. 22일 12시에 검은 리본과 함께 태극기가 반기 게양되어 죽은 이들의 넋을 기렸으며, 시민들은 도청광장에 시체를 안치하고 시민대회를 열기도 했다.

 도청을 점령하고 있던 시민군은 계엄군과 협상을 시도하려 하지만 계엄군은 무장한 상태에서는 어떠한 협상도 있을 수 없다며 그들의 협상제의를 일축해 버렸다. 시민군은 그들이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상대는 우리나라 최정예 부대인 중무장한 공수특전사였고, 시민군들은 수적으로나 화력으로나 열세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물러설 수 없었다.

 시민군 지도부에서는 항복해야 한다는 의견과 끝까지 결사항전 해야 한다는 의견 대립이 팽팽히 맞서고 있었고 시민군 수습위원회는 진통을 겪었으며 수차례 개편을 감행하고 과잉진압사과, 희생자 보상, 사후 보복금지, 계엄해제, 진정한 민주정부 수립 등 그들의 7개 요구조건을 담은 서한을 계엄군에게 보냈으나 계엄군은 이 또한 묵살해 버렸다. 그러는 사이에 계엄군이 정한 무기 반납 일자를 넘기고 만 것이다.

 광주에 이러한 사태가 발생했는데 타지 사람들은 광주 사건의 전모를 알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신군부의 압력으로 인한 언론의 왜곡된 보도 때문이었다. 계엄당국은 언론에게 광주의 사태는 북한의 사주를 받은 일부 폭동에 의한 것이라고 발표하게 했고 언론은 23일부터 계엄당국이 시키는 대로 보도했다. 이는 광주를 더욱 철저하게 고립시키기 위함이었다.

  한편 계엄군은 다시 광주로 진압하기 위한 작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23일에 지원동 주남마을에서 소형버스에 총격을 가해 17명이 사망하였고, 24일에는 주원동 원제마을에서 수영하던 소년들에게 사격을 가하는 만행도 저질렀다.

 5월26일이 되자. 계엄군이 화정동 앞에서 농촌진흥원까지 진출했다. 수습대책위원회는 계엄군의 진입을 막아보고자 죽음의 행진을 감행하였고, 시민군은 그날 저녁에 계엄군이 침공할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 고등학생들과 여성을 집으로 귀가시켰다. 그리고 27일 00시를 기점으로 광주시내의 시내전화마저도 모두 차단되었다. 광주시내에 불안한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었다.

 27일 오전3시 광주 시를 탈환하려는 충정작전이 개시되었다. 이와 동시에 한 젊은 여성이 시내를 돌아다니며 "계엄군이 쳐들어옵니다. 시민여러분, 우리를 도와주십시오."라는 애절한 시내 가두방송을 실시하였다. 하지만 수적으로나, 화력으로나 불리한 시민군을 도와줄 시민들은 그리 많지 않았고, 시민군들도 이미 자기들의 최후를 예감하였으며, 비록 진압당하더라도 끝까지 싸우겠다는 의지만은 변하지 않고 결사항전을 다짐했다. 아마 모든 시민들이 도왔다 해도 희생만 커졌을 뿐이었을 것이다.

 새벽4시에 계엄군은 도청주변을 완전히 포위했으며, 금남로에서 시민군과 계엄군간의 시가전이 개시되었고, 4시10분을 기해 도청의 시민군들에게 사격을 시작했으며, 5시10분에 계엄군은 도청을 비롯한 모든 지역을 장악하고, 진압작전이 종료되었다.

 당시 충정작전에서 계엄군 측이 발표한 시민군의 사망자 수는 고작 2명이었다. 그리고 다시 17명으로 수정 발표하게 된다. 하지만 당시 AP통신 기자였던 테리 앤더슨에 따르면 자신이 세어본 시체의 수만 해도 30구가 넘는다고 증언하고 있다. 그는 시체를 계엄군이 계속 어딘가로 치워버렸으므로 당시의 정확한 사망자의 수는 알 수 없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민주화를 위해 끝까지 싸우다가 전남도청에서 죽은 사람들의 이름과 정확한 숫자조차도 알 수가 없는 것이다.

 1988년 제6공화국에서 밝힌 희생자 명단에 따르면 사망 191명 부상 852명이다. 하지만 MBC에서 제시한 희생자 명단은 그를 훨씬 상회하는 것이다. MBC에서는 사망 166명 부상 후 사망 83명 행방불명 47명 부상 2170명 연행, 구금 508명이다. 행방불명을 포함한 사망자 숫자는 296명에 이른다. 그 희생은 6.25 전쟁 이후 최대의 희생자를 낸 사건이었다.


2008.0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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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번째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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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dyr****
평민
우리나라역사는5천년역사죠..국사시간즐감하세요...^*^

2008.05.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