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④ 우리가 외치면 공약이 된다] ‘나이보다 능력’ 40만 당원 이끄는 청년들 ‘새 정치’ 희망 쏘다

마드리드 | 정대연 기자

“정치가 당장 내일을 기다릴 수 없는 극빈자들을 살폈다면 우리가 ‘25법(레이25)’을 의회에 제출할 일은 없었을 것이다.”

지난달 25일 스페인 마드리드의 ‘안토니오 마차도’ 문화센터 대강당. 녹색 스웨터와 검은색 바지를 입은 서른셋 청년이 팔을 휘저으며 목소리를 높였다. 지난해 12월 스페인 총선에서 프랑코 독재 후 40년간 이어진 국민당·사회당 양당체제를 무너뜨린 ‘포데모스(우리는 할 수 있다)’의 원내대변인 이니고 에레혼(33)이었다.

지난해 12월20일 스페인 총선에서 제3당으로 떠오른 신생정당 포데모스 대표 파블로 이글레시아스(가운데)와 원내대변인 이니고 에레혼(왼쪽에서 네번째), 원내부대변인 이레네 몬테로(오른쪽에서 네번째)가 당원들과 함께 환하게 웃고 있다.  AP연합뉴스

지난해 12월20일 스페인 총선에서 제3당으로 떠오른 신생정당 포데모스 대표 파블로 이글레시아스(가운데)와 원내대변인 이니고 에레혼(왼쪽에서 네번째), 원내부대변인 이레네 몬테로(오른쪽에서 네번째)가 당원들과 함께 환하게 웃고 있다. AP연합뉴스

에레혼은 “정치인들은 법까지 바꿔가며 도산 위기에 처한 기업들과 파산 직전의 은행을 구했다. 하지만 전기요금을 납부하지 못한 서민들에겐 더욱 힘들게 하는 단전 조치를 취했다”면서 “25법은 또 한번의 역사적 변화이며 우리의 존재 이유”라고 외쳤다. 강당을 메운 지지자 400여명은 ‘UN PAIS CONMIGO, PODEMOS(나와 함께하는 국가, 포데모스)’라고 적힌 보라색 띠를 손에 들고 “Si se puede!(그래, 할 수 있어!)”를 연호했다. 에레혼 옆에서는 16세 때부터 사회운동에 참여한 이레네 몬테로 원내부대변인(28)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청중석엔 청소년부터 노인까지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꽉 들어찼다.

[부들부들 청년][3부④ 우리가 외치면 공약이 된다] ‘나이보다 능력’ 40만 당원 이끄는 청년들 ‘새 정치’ 희망 쏘다

포데모스가 의회에 제출한 ‘25법’ 설명회에서 2014년 1월 창당한 신생정당의 열기가 그대로 후끈 느껴졌다. 법안은 주거·건강·에너지·최저임금 등에 대한 ‘최소한의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인권에 대한 보편적 선언문 25개 조항”을 담고 있다. 시민·청년단체들과의 논의 끝에 만들어진 법안이다.

한국과 같이 ‘청년 대변인’을 따로 두는 것일까. ‘진짜 대변인’은 따로 있고, 젊은당처럼 보이도록 에레혼은 청년 몫으로 뽑혔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당원들이 정한 ‘단 한 명의’ 대변인이었다. 설명회 막바지에 한 노인이 일어나 “당신은 나보다 젊고 건강하고 능력 있고 똑똑하다. 해결될 때까지 우리를 위해 일해야 한다. 당신에게 감사한다”고 말하자 박수가 쏟아졌다. 에레혼은 그를 향해 손가락으로 ‘브이(V)’자를 그려 보였다.

지난달 25일 스페인 마드리드 ‘안토니오 마차도’ 문화센터 대강당에서 시민들의 주거·건강에 관한 ‘최소한의 권리’를 담은 ‘25법(레이25)’ 설명회가 열리고 있다.  정대연 기자

지난달 25일 스페인 마드리드 ‘안토니오 마차도’ 문화센터 대강당에서 시민들의 주거·건강에 관한 ‘최소한의 권리’를 담은 ‘25법(레이25)’ 설명회가 열리고 있다. 정대연 기자

■ ‘청년정치’가 아니라 ‘정치’…“나이보다 능력과 방향이 중요”

2011년 5월15일 정부의 긴축정책을 더 버틸 수 없던 스페인 시민 800만명이 거리로 나와 실업과 빈부격차 해결을 요구했다. 청년들은 시위가 끝나도 남아 마드리드 ‘솔광장’을 점거했다. ‘분노하라(Indignados) 시위’나 ‘15M 운동’으로 불리는 시민들의 외침이었다.

스페인은 국내총생산(GDP)과 5000만명에 육박하는 인구, 독재정권 경험과 민주화 이후 양당 구도까지 한국과 유사한 점이 많다. 지금은 20% 넘는 실업률과 50%에 달하는 청년실업률, 살인적인 주거비와 저임금이 나라를 짓누르고 있다. 불황으로 가게는 문 닫고, 청년들은 일자리를 찾아 독일 등지로 떠난다. 생활고는 노소를 가리지 않았다. ‘분노하라 시위’ 참여 후 포데모스 창당 때부터 활동해온 카스티야라만차대학의 호세 엔리케 교수(47)는 “젊은이들이 포데모스의 중추적인 역할을 해왔고 노인들이 후원했다”고 말했다. 그는 “정치인들은 그간 ‘우리가 해결해줄 수 없다. 더 노력하라’고만 해왔다”며 “청년들과 노인들 모두 자신이 원하는 삶을 계획하고 꿈꾸는 게 불가능한 상황은 다르지 않다”고 덧붙였다. 포데모스가 나쁜 일자리와 주거문제를 청년에게만 국한하지 않고, 청년문제 해법도 넓게 접근한 이유였다. 일할 능력과 방향을 보여주면 나이는 당원들의 신뢰를 얻는 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청년 비례대표 몫을 따로 두고 청년에게 응축된 사회문제를 마치 ‘청년정치인’만의 과제인 것처럼 벽을 쳐 놓은 한국이 떠올랐다. 한국에선 40대 정치신인이 “동네 어르신들에게 ‘너무 어리다’는 소리를 들었다”고 토로하는 상황이다.

지난달 23일 스페인 마드리드 ‘니콜라스 살메론’ 문화센터에서 열린 차마르틴 시르쿨로스. 포데모스 시의원 이사벨 세라(왼쪽 창 앞) 등 참석자들이 토론을 벌이고 있다. 정대연 기자

지난달 23일 스페인 마드리드 ‘니콜라스 살메론’ 문화센터에서 열린 차마르틴 시르쿨로스. 포데모스 시의원 이사벨 세라(왼쪽 창 앞) 등 참석자들이 토론을 벌이고 있다. 정대연 기자

포데모스는 2014년 1월 “거대한 음모”를 꾸미며 출범했다. 시민들로부터 부정부패·무능·불통의 딱지가 붙여진 정치권에 새롭게 등장한 것이다. 창당 넉 달 만에 포데모스는 유럽의회 선거에서 5석을 얻으며 신선한 충격을 줬다.

한때 당 지지율 1위에 오르기도 했던 포데모스는 지난해 12월 총선에서 21%를 득표해 전체 350석 중 69석을 차지한 제3당이 됐다. 당원수는 어느덧 40만명에 육박해 국민당에 이어 2위다.

시민들이 포데모스를 선택하는 데 나이는 중요한 고려사항이 아니었다. 소속 유럽의원들은 전부 30대다. 36세 때 당선된 당 대표 파블로 이글레시아스(38)가 최고령이었다. 기성 정당들도 젊은 정치인을 중용하며 따라하기 시작했다. 스페인 의회는 젊어지기 시작했다. 한국의 경우 19대 국회의원 당선자가 평균 58세이고, 40세 이하는 5명에 불과하다. 엔리케 교수는 “포데모스에서 함께 활동하는 친구 중엔 나보다 스무 살 어린 20대 초반이 다수”라며 “나이가 어려도 ‘준비돼 있는 사람’을 선택해야 한다”고 말했다. 아들 빅토르 리오스(20)와 함께 ‘25법’ 설명회를 찾은 여성도 “어려도 상관없다. 변화를 잘 실현할 수 있는지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사람들은 이틀 뒤에 열 시위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고 했고, 리오스는 “당장은 아니어도 분명 변화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세 사람의 말을 들으면서 청년 ‘칸’을 따로 두는 한국의 방식이 청년이 정치의 주체로 서는 일을 방해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스쳤다. 배려가 또 하나의 차별과 벽을 만드는 역설이다.

■풀뿌리에서 크는 토론…“의회에 갇히면 우린 죽은 것”

지난달 23일 저녁 마드리드 ‘니콜라스 살메론’ 문화센터의 작은 회의실에 주민들이 하나둘 모이기 시작했다. 대학생으로 보이는 젊은 여성이 들어왔다. 그는 나이가 2배는 많아 보이는 주민들과 포옹하며 반갑게 인사했다. 지난해 6월 지방선거에서 마드리드 시의원에 당선된 이사벨 세라(27)였다. 그는 고등학생 때부터 페미니스트·반자본주의 운동에 참여했다. 2011년엔 동료들과 ‘미래가 없는 청년들(Juventud Sin Futuro)’ 깃발을 들고 거리로 나섰다.

세라 의원이 참석한 이 자리는 포데모스를 굳건하게 하는 풀뿌리조직 ‘시르쿨로스(서클)’이다. 시르쿨로스에는 “함께하고자 하는 의지만 있으면” 누구나 미리 신청하지 않고 참여할 수 있다. 2011년 ‘분노하라 시위’ 후 정치에 관심을 갖게 된 사람들이 대다수라고 했다.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시르쿨로스가 스페인 전역에 900여개 있다.

2011년 ‘분노하라 시위’에 참여한 시민 수백명이 마드리드 중심가에서 경찰과 대치하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2011년 ‘분노하라 시위’에 참여한 시민 수백명이 마드리드 중심가에서 경찰과 대치하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차마르틴 시르쿨로스에 모인 주민 33명은 모임 이름처럼 둥글게 둘러앉았다. 세라 의원은 “불평등과 부정부패 시정에 주력하고 있다”며 “하지만 집 없는 젊은층을 위한 법안이 의회에 방치돼 있다. 땅과 집이 남는데도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다”고 의회 소식을 전했다. 지역 현안 논의가 이어졌다. 한 주부가 0~6세 아이들을 보낼 육아시설이 없다고 했다. 한쪽에선 공립학교 폐교를 막기 위해 실력 행사를 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이어졌고, 40대 남성은 “교복·식비 지원이 확대돼야 한다”고 말했다. “국민당이 제4당인 시우다다노스와 손잡기 전에 포데모스가 시우다다노스와 협력하는 게 낫지 않으냐”는 정치적 얘기나, “함께 문화활동을 했으면 좋겠다”는 말도 섞였다. 세라 의원은 주민들의 말을 수첩에 받아 적었다. 그는 “이런 모임에서 논의되는 작은 사항도 의회 결정에 영향을 미친다”며 “의회라는 틀에 갇히면 우린 죽은 것과 다름없다”고 말했다.

모임이 진행되는 동안 A4용지만 한 갈색 주머니가 주민들 손에서 손으로 건네졌다. 시민들은 호주머니에 있던 1유로·2유로 동전을 주머니에 넣었다. 시르쿨로스 운영에 쓰일 돈이다. 이날은 39.58유로(5만2000원)가 모였다.

포데모스 의원들은 지난 1월 등원에 앞서 의원들에게 주어지는 퇴직연금을 받지 않기로 했다. 월급도 최저임금의 3배 수준인 월 1930유로(256만원)만 받기로 했다. 젊은 정치인들이 과감히 특권을 버린 것이다.

포데모스 지지자들은 공통적으로 “ ‘할 수 있다’는 희망을 봤지만 이제 시작일 뿐”이라고 말했다. 모든 정당이 과반 획득에 실패한 선거 후 석 달이 지나도록 연립정부 구성에 실패하면서 6월 재선거가 유력한 상황이다. 시민들의 궁핍한 삶은 5년 전 분노한 시민들이 거리로 나왔을 때나 지금이나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그래서 “의회에 진입했지만 거리에서의 운동은 항상 필요하다”고 했다. 정치인들이 시민들의 요구를 실현하도록 지지자들이 끊임없이 압박하고 감시해야 한다는 거였다.

■정보기술(IT)이 꽃피운 소통과 참여

거리로 나선 시민들의 목소리가 포데모스라는 결실을 맺는 데는 ‘디지털 도구’를 활용한 직접민주주의가 큰 역할을 했다. 시민들은 포데모스 당원이 아니라도 누구나 인터넷과 휴대전화 앱을 이용해 후보자를 정하고 정책을 제안할 수 있다. ‘플라자 포데모스’라는 온라인 공론장에서는 누구나 의원에게 질문하고 의원은 답한다. 포데모스 내 다양한 집단은 ‘루미오’라는 앱을 통해 의사를 결정한다.

총선 후보도 모두 시민 수만명의 온라인 투표를 통해 결정됐다. 공교육 개선(45%), 부패 근절(42%), 주거권 보장(38%), 공공의료 강화(31%), 가계부채 조정(23%) 등 5대 공약도 마찬가지다. 에레혼은 “포데모스 전까지 더 이상 나아질 거란 희망이 없던 시민들은 투표 자체를 포기한 상태였다”며 “총선은 우리를 지지해달라는 선거운동이 아닌, 이미 패배자가 된 그들을 설득해야 했던 선거운동이었다”고 설명했다.

2011년 6월11일 스페인 발렌시아에서 리타 바르베라 시장이 재선되자 취임식이 진행되는 동안 청년들이 등에 ‘Indignados(분노한)’라고 적고 시위를 벌이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2011년 6월11일 스페인 발렌시아에서 리타 바르베라 시장이 재선되자 취임식이 진행되는 동안 청년들이 등에 ‘Indignados(분노한)’라고 적고 시위를 벌이고 있다. 경향신문 자료사진

포데모스의 디지털 전략을 짜는 데 주도적으로 참여했던 야고 아바티는 “온라인이 정보 전달을 넘어 정치에 직접 참여하고자 하는 시민들의 요구를 실현할 수 있다”며 “거리의 운동이 실현되는 데 기술이 도움을 주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이 만든 ‘디사이드마드리드’에 접속해 보이며 “마드리드 시민이 직접 의견을 올리면 다른 시민이 그 안건을 완성할 수 있다”면서 “어떤 안건에 대한 지지가 유권자의 2%(약 5만3000명)를 넘으면 정식으로 상정된다”고 전했다. 이전에는 정치인이 혼자 판단해 의사결정을 했다면 이젠 정치인이 온라인에 나타나는 시민 의견에 따라 철저하게 시민의 ‘대리인’ 역할을 하게 된다는 설명이었다.

특히 온라인 환경에 익숙한 젊은 세대는 남의 일로만 느끼던 정치에 쉽게 참여할 수 있게 됐다. 의견을 개진하고 실현할 수 있는 통로만 마련되면 청년들이 열성적으로 정치에 참여하더라는 것이다. 이는 포데모스에 젊은 당원과 정치인이 많은 이유 중 하나다. 아바티는 “정치에 무관심하던 청년들이 휴대전화 앱 등 디지털 도구를 활용해 쉽게 정치에 접근하는 게 가능해졌다”며 “디지털 도구는 적은 비용으로 이용이 가능하기 때문에 젊은 신생정당이 사람을 모으는 데 유용하다”고 말했다. 그는 본인이 개발한 사이트의 소스를 공개해 비영리 목적이라면 세계 어디서나 활용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포데모스는 ‘투명한 포데모스’라는 사이트에 의원·당직자 개개인의 구체적인 정보와 수입·지출 내역을 꼼꼼하게 공개하고 있다. 기업 후원금을 일절 받지 않는 포데모스는 “경제적 독립과 투명성이 정당에서 민주주의가 작동하는 데 필수 요소라고 믿기 때문에 자금 출처를 일일이 밝히고 있다”고 했다. 이 사이트를 보면, 포데모스 수입의 98.5%는 5유로(6600원) 이상의 기부를 통해, 나머지는 자체 수익활동으로 벌어들였음을 알 수 있다.

특별취재팀

박재현 송윤경 이혜리 이효상 정대연 김서영 김원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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