③ ‘을 중의 을’ 식품영업

김원진·최민지·이유진 기자

1+1 행사상품 잘 팔릴수록 ‘빚 더하기 빚’

[영업사원의 비애] ③ ‘을 중의 을’ 식품영업

대형마트의 셔터가 내려간 캄캄한 밤, ㄱ제과 영업사원인 김태원씨(33·가명)는 더욱 분주해졌다.

김씨는 ‘○○데이’처럼 기념일이나 신상품이 나오면 마트 바닥에 홀로 주저앉아 자정을 넘겨 일하곤 했다. 그는 ㄱ제과 소속이지만 담당하는 마트의 판매대를 꾸미고 다듬어야 했다. 이는 업계의 관행이다. 식품업체 영업사원은 대형마트에 상품을 납품해야 하는 ‘을’이기 때문이다. 판매대 꾸미기와 같은 잡일은 선택이 아니라 의무였다. 전직 제과회사 영업사원인 김씨는 “제과업체 마케팅 부서나 마트 쪽 직원이 아닌 제과업체 영업사원이 보통 행사상품 매대를 꾸민다”며 “미적 감각이 떨어져 판매대를 꾸미는 게 매번 고됐다”며 씁쓸하게 웃었다.

먹거리를 판매하는 식품업체 영업사원의 삶 또한 여느 영업사원과 다르지 않다. 사내에서는 상사의 실적 압박을 받고, 밖에서는 물건을 구입해주는 거래처인 크고 작은 마트 주인과 직원들에게 허리를 90도로 굽혀야 하는 신세다.

김씨는 2013년 초에 입사해 6개월 만에 회사를 그만뒀다. 동기 50명 중 40여명은 입사 1~2년 사이 모두 회사를 나왔다. ㄱ제과의 경우 비영업 부서 직원들도 입사 후 1년은 필수로 영업사원으로 근무해야 하지만 이후 각 부서로 흩어져서 ‘영업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다. 김씨는 영업사원으로 입사했기 때문에 ㄱ제과에 남는다면 평생 영업을 해야 했다.

술로 스트레스를 풀어 3개월 만에 10㎏이 찌고, 피로 때문에 주말에는 잠만 자던 김씨가 퇴사를 결심한 결정적 이유는 쌓여만 가는 ‘채권’ 때문이었다.

김씨는 “영업을 하면 경쟁사를 이겨야 하는데 보통 행사를 ‘1+1’, ‘2+1’으로 진행한다. 이때 물량이 추가 투입돼야 하는데, 본사는 지원해주지 않는다”며 “추가 분량은 결국 본인 부담인데 이게 바로 빚을 의미하는 채권”이라고 말했다. 영업사원에게 ‘채권’은 공포의 대상이다. 이 때문에 ㄱ제과에는 채권관리팀도 있다. ㄱ제과 관계자는 “모든 제과업계 영업사원에게 ‘채권’이 있다. 하지만 회사는 채권의 발생 원인을 개인의 자금 유용으로 본다”며 “정상적인 절차를 거치면 회사에서 추가 비용을 영업사원에게 승인해준다. 굳이 자기 돈 쓸 일이 없다”고 밝혔다.

‘채권’ 압박이 전부는 아니다. ㄴ제과업체에서 10년 넘게 영업사원으로 일하고 있는 ㄷ씨에게는 또 다른 걱정거리가 있다. ㄷ씨에게는 이른바 ‘쇼트’ 압박이 심하다. ‘쇼트’는 마트가 행사를 하면 행사 단가로 물건을 넣어주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 100만원어치의 음료수를 마트에 납품해도 이 가운데 10만원어치는 판촉 행사용이다. 그래서 영업사원의 실제 납품액은 90만원이 되는 셈이다. 쇼트는 재고 없이 제품을 다 팔았는데도 마이너스 매출로 기록되는 상황을 뜻하는 영업사원들의 은어다. 부족량을 뜻하는 영어 단어인 ‘shortage(쇼티지)’에서 유래했다.

ㄷ씨는 “쇼트에 맞춰 물건을 넣다 보면 월급 300만원을 받아도 쇼트로 싸게 마트에 물건을 넘기면 싸게 넘긴 만큼의 손해는 회사가 보전해주지 않는다”며 “특히 여름이 심하다. 아이스크림이 잘 팔리는데도 행사를 많이 해 쇼트가 많이 발생한다”고 말했다.

ㄷ씨는 영업사원 경력 10년이지만 조카뻘인 관리직 상사에게 폭언도 종종 듣는다. ㄷ씨는 “여기를 관두면 다른 데 밥 빌어먹을 데가 없어 어쩔 수 없이 다니는 거다. 나는 그저 회사가 시키는 대로 움직이는 로봇”이라고 말했다.

식품업체 영업사원의 처지도 비슷하다. 좋은 판매대를 차지하려는 쟁탈전이 치열하다. 식품회사 영업사원은 소비자의 시선과 손길이 가장 잘 닿는 제품 진열대에 자사 제품을 올려놓으려고 한다. 지난해 초까지 ㄹ식품업체에서 영업사원으로 일한 이현우씨(27·가명)는 채 1년도 안되어 회사를 다니지 못하고 그만뒀다.

이씨는 “제품 진열대 위치를 놓고 마트 쪽에서 협박하는 경우가 많았다. 좋은 자리를 차지하려면 그만큼의 대가를 지불해야 했다”고 말했다. 이씨는 “진열되어 있던 제품의 유통기한이 지나면 마트 측에서 우리 업체에 교환이나 환불을 요구하지만 원칙상으로는 환불이 안된다”며 “하지만 환불을 안 해주면 마트로부터 불이익을 받기 때문에 라면 한 박스라도 내 돈 써서 더 넣어주면서 무마하려는 경우도 있었다”고 말했다.

이씨는 회사 안에서도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부서 간 위계와 억압적인 상하관계 때문이었다. 이씨는 “사내에서도 영업사원은 ‘을’이다 보니 회사에 들어올 때 마실 것 좀 사오라는 유통부서 직원도 있었다”고 말했다. 감싸줘야 하는 영업직 상사는 이씨에게 동영상을 보여주며 억지로 웃으라고 강요하기도 했다.

ㄹ식품업체 관계자는 “요즘 젊은 친구들이 영업관리하는 과정에서 꾸지람을 듣고 기분 나빠할 수는 있겠지만, 군대도 아닌데 억압적인 문화는 없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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