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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서울시 금호동의 유래에대해써주세요
ince**** 조회수 21,137 작성일2008.03.08
너무 복사한티내지마시구용~ 성동구금호동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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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nda****
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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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동구★

▶ 상 ·하왕십리동

상·하왕십리동은 왕십리 윗쪽과 아랫쪽에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으로 왕십리라는 이름은 조선초에 무학대사가 도읍을 정하려고 이곳까지 왔다가 한 노인으로 부터 십리를 더 가라는 가르침을 받았다고 해서 유래되었습니다.


▶ 홍익동

단군의 건국이념인 '홍익인간'의 홍익을 따서 지어졌습니다.


▶ 도선동

통일신라때 도선대사가 무학봉에서 수도했다는 전설과 조선초 무학대사가 한양을 도읍지로 물색하던 중, 서북쪽으로 십리를 더 가라는 지시를 한 노인이 도선대사라는 전설에서 동명이 유래되었습니다.


▶ 마장동

청계천을 끼고 있는 마장동은 조선초부터 말을 기르던 양마장이 있어 유래된 동명입니다.


▶ 사근동

청계천을 끼고 있는 사근동의 동명은 신라때 세워진 매우 낡은 사근절(사근사)이 있었던 데서 불려진 이름입니다.


▶ 행당동

응봉산 북쪽 일대에 위치한 행당동의 동명은 행당초등학교 동쪽 산 일대, 즉 '아기씨당'이 위치한 곳에 옛부터 살구나무와 은행나무가 많이 심어져 있어서 행당이라는 마을이름이 생겼다고 전해오고 있습니다.


▶ 응봉동

응봉산 남쪽 경사면에 위치한 응봉동의 동명은 이 산의 이름을 따서 붙인 것으로 응봉의 산 이름은 산모양이 매처럼 보이기 때문에 붙여졌다고도 하며, 조선시대의 역대 왕이 이곳에서 매사냥을 하였기 때문에 매봉이라 하였다 합니다.


▶ 금호동

응봉산 서쪽에 위치한 금호동은 무수막, 즉 수철리(水鐵里)가 한자음화해서 금호동이 되었는데 이곳을 무수막, 무쇠막, 무시막, 수철리로 칭한 것은 조선시대에 무쇠솥, 농기구 등을 만드는 대장간이 많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 옥수동

일제 때 옥정수라는 유명한 우물이 있어 옥정숫골이라고 불리었던 마을을 옥수정이라고 하다가 광복 후에 옥수동으로 부르게 되었습니다.


▶ 성수동

옛날에 성덕정이라는 정자(亭子)와 뚝도 수원지(水源地)가 있던 곳이라 하여 각각 첫머리를 따서 성수(聖水)라 했다는 설이 있는가 하면, 한강을 끼고 있는 물가 마을로 한강물을 식수로 사용할 만큼 깨끗하고 고마운 물이라는 뜻으로서 성수라는 동명이 붙었다는 설이 있습니다.


▶ 송정동

중랑천 하류 남북으로 걸쳐있는 송정동은 조선시대에 국가에서 숫말을 기르던 목장이 이 일대에 있으므로 숫마장이 변음되어 솔마장벌이라 하던 것이 한자어로 바뀐 것으로 추측되고 있습니다.


▶ 용답동

청계천 하류지점의 동쪽에 위치한 용답동의 동명은 용두동 지역과 답십리 지역의 일부를 통합하여 새로운 동을 만들면서 용두동의 '용'자와 답십리동의 '답'자의 머릿글자를 따서 붙인 이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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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동구(江東區)★


1. 강동구 연혁


오늘날의 강동구 지역은 백제시대의 왕도였던 하남(위례성) 및 한성지역이었으며,
고구려가 한강유역을 차지했을 때는 고구려 남평양성에 속하였었다 그후 신라가 이
지역을 차지한 후인 문무왕 때는 이 지역을 한산주라 했다가 다시 남한산주로 이름
을 바꾸었다.

고려 성종 때에는 다시 광주목으로 개편되어 내려 오다가 조선 선조10년 (1577) 광
주부로 승격 되었고 당시 23개면 중 하나인 구천면 일대가 현재의 강동구 지역이
며, 구천의 명칭은 조선 성종때 명신 판중추부사 어효첨의 아호인 구천의 음을 따
서 붙었다고 한다.

조선말 갑오개혁으로 모든 제도가 개혁되면서 1895년 광주군으로 개편되었고, 1914
년 일제에 의한 전국 도, 부, 군, 면의 통폐합이 있었으며 당시 구천면사무소는 상
일리(현 상일여·중고)에 설치 되었다가 1915년 면사무소를 명일동 321번지에 신축
이전하였다.

1963. 1. 1. 서울특별시 행정구역 확장에 따라 서울특별시 성동구로 편입되어 5개
의 행정동을 관할하는 천호출장소가 신설되었으며 현 강동구의 전신이기도 하다.

1975. 10. 1. 강남구로 분구되었고 1979. 10. 1. 천호출장소를 강동구로 승격시켜
강남구에서 분리 신설 하였고, 1988. 1. 1. 송파구를 분리시킴으로서 오늘에 이르
게 되었다


① 고덕동(高德洞)


유래 : 고려말에 형조참의를 지낸 李養中이 태조 이성계의 조선 건국을 반대하여 이곳
에 와서 숨어 살면서 벼슬 제의도 거절한 채 굳은 절개를 지켜 주위 사람들로부터 덕
이 높은 인물로 추앙을 받은데서 비롯됨.

조선시대 : 京畿 廣州牧 龜川面 高德里
1895 : 漢城府 廣州郡 龜川面 高德里
1896 : 京畿道 廣州府 龜川面 高德里
1906 : 京畿道 廣州郡 龜川面 高德里
1914 : 京畿道 廣州郡 九川面 高德里
1963 : 城東區 高德洞
1975 : 江南區 高德洞
1979 : 江東區 高德洞


② 길동(吉洞)


유래

① 마을로부터 江이 멀리 떨어져 있고 주위에 높은 산이 없기 때문에 물난리 또는 산
사태 등의 천재지변이 없는 살기 좋은 吉한 곳이라는 뜻에서 유래.

② 洞의 모양이 나뭇가지처럼 길다 하여 붙은 「기리울」이라는 마을이름에서 유래되
었다고 하기도 함.

조선시대 : 京畿 廣州牧 龜川面 기리울
1895 : 漢城府 廣州郡 龜川面 기리울
1896 : 京畿道 廣州府 龜川面 기리울
1906 : 京畿道 廣州郡 龜川面 기리울
1914 : 京畿道 廣州郡 九川面 吉里
1963 : 城東區 吉洞
1975 : 江南區 吉洞
1979 : 江東區 吉洞


③ 둔촌동(遁村洞)


유래 : 廣州李氏의 시조이며 고려말의 隱士인 遁村 李集이 일시 거주한 사실이 있으므
로 그의 號를 따서 둔촌동이라 함.

조선시대 : 京畿 廣州牧 龜川面 遁村
1895 : 漢城府 廣州郡 龜川面 遁村
1896 : 京畿道 廣州府 龜川面 遁村
1906 : 京畿道 廣州郡 龜川面 遁村
1914 : 京畿道 廣州郡 九川面 遁村里
1963 : 城東區 遁村洞
1975 : 江南區 遁村洞
1979 : 江東區 遁村洞


④ 명일동(明逸洞)


유래 : 고려 성종 11년(994) 이곳에 明逸院이라는 숙박소를 두고 출장하는 관리나 여
행하는 사람들의 편의를 제공해 주었는데 그 이름을 따서 명일원・원텃골이라
한데서 유래.

조선시대 : 京畿 廣州牧 龜川面 원터골
1895 : 漢城府 廣州郡 龜川面 원터골
1896 : 京畿道 廣州府 龜川面 원터골
1906 : 京畿道 廣州郡 龜川面 원터골
1914 : 京畿道 廣州郡 九川面 明逸里
1963 : 城東區 明逸洞
1975 : 江南區 明逸洞
1979 : 江東區 明逸洞


⑤ 상일동(上一洞)


유래 : 上一洞과 下一洞의 사이를 흐르는 게내[蟹川]의 윗쪽에 위치한데서 유래.

조선시대 : 京畿 廣州牧 龜川面 게내․게내안말․동자골
1895 : 漢城府 廣州郡 龜川面 게내․게내안말․동자골
1896 : 京畿道 廣州府 龜川面 게내․게내안말․동자골
1906 : 京畿道 廣州郡 龜川面 게내․게내안말․동자골
1914 : 京畿道 廣州郡 九川面 上一里
1963 : 城東區 上一洞
1975 : 江南區 上一洞
1979 : 江東區 上一洞


⑥ 암사동(岩寺洞)


유래 : 이 마을 산 23번지 일대에 백제 때의 절이 있었다고 전해지며,『신증동국여지
승람』에 伯仲寺 일명 岩寺가 下津站 동쪽에 있다는 기록을 통하여 암사, 즉
바위절이 있었던데서 유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 京畿 廣州牧 龜川面 바위절
1895 : 漢城府 廣州郡 龜川面 바위절
1896 : 京畿道 廣州府 龜川面 바위절
1906 : 京畿道 廣州郡 龜川面 바위절
1914 : 京畿道 廣州郡 九川面 岩寺里
1963 : 城東區 岩寺洞
1975 : 江南區 岩寺洞
1979 : 江東區 岩寺洞


⑦ 천호동(千戶洞)


유래 : 원래 이 지역을 曲橋里라 하였는데, 1963년 서울특별시에 편입되면서 이곳이
人家 數千戶가 살만한 지역이 되리라는 풍수지리설에서 洞名을 따온 데서 유
래.

조선시대 : 京畿 廣州牧 龜川面 曲橋里
1895 : 漢城府 廣州郡 龜川面 曲橋里
1896 : 京畿道 廣州府 龜川面 曲橋里
1906 : 京畿道 廣州郡 龜川面 曲橋里
1914 : 京畿道 廣州郡 九川面 曲橋里
1963 : 城東區 千戶洞
1975 : 江南區 千戶洞
1979 : 江東區 千戶洞


⑧ 하일동(下一洞)


유래 : 上一洞과 下一洞의 사이를 흐르는 게내[蟹川]의 아래쪽에 위치한데서 유래.

조선시대 : 京畿 廣州牧 龜川面 능골․벌말․말우물․강매터․가려울
1895 : 漢城府 廣州郡 龜川面 능골․벌말․말우물․강매터․가려울
1896 : 京畿道 廣州府 龜川面 능골․벌말․말우물․강매터․가려울
1906 : 京畿道 廣州郡 龜川面 능골․벌말․말우물․강매터․가려울
1914 : 京畿道 廣州郡 九川面 下一里
1963 : 城東區 下一洞
1975 : 江南區 下一洞
1979 : 江東區 下一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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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남구★

◆개포동 (開浦洞)

開浦란 洞名이 붙여진 것은 이 지역이 개벌에 있으므로 개펄이라 하던 것이 변하여 개패 또는 한자명으로 개포(開浦)라 하였다. 실제 개포동 옛마을 이름으로서 지금도 개패, 개포의 옛 지명이 전하여지고 있다.

◆대치동 (大峙洞)

大峙洞 洞名의 유래는 당시 자연부락 7, 8개 마을 중 큰 고개 밑에 있는 한티(또는 한터) 마을을 漢字名으로 大峙라 한데서 비롯되었다.

◆삼성동 (三成洞)

三成洞 동명의 유래는 봉은사(奉恩寺), 무동도(舞童島), 닥점의 세마을을 병합하여 三成里라 명명하였던 데서 연유한다.

◆일원동 (逸院洞)

逸院洞名의 유래는 옛날 이 마을에 일원(逸院)이라는 書院이 있었으므로 일원 또는 변하여 일언이라 한데서 연유하고, 또는 이 근처에서 가장 오래된 마을이므로 本洞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일설에는 이 마을의 사방이 大母山에 가리워져 「숨어져 있는 마을」또는 「편안한 마을」이라 해서 일원동이라고 불리어졌다고도 한다.

◆논현동(論峴洞)

論峴洞 동명의 유래는 이 동에 논고개가 있은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즉 현재 151∼3번지에 있는 논현동 천주교회 마루턱이 높은 고개였으며, 또 영동우체국 위에서 반포아파트까지의 산골짜기 좌우로 벌판이 펼쳐져 논밭이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논현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세곡동(細谷洞)

細谷洞 동명은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을 조정하면서 자연부락 명칭인 세천리(細川里)의 「細」자와 은곡동(隱谷洞)의 「谷」자를 따서 제정한 것이다.

◆자곡동(紫谷洞)

紫谷洞은 이곳의 자연부락명인 자양동(紫陽洞)의 「紫」字와 지곡동(池谷洞)의「谷」字를 따서 紫谷里라 칭한 것이 서울시에 편입되면서 자곡동이 된 것이다.

◆신사동(新沙洞)

신사동(新沙洞) 동명의 유래는 이 지역에 있던 부락 한강새말(新村) 과 사평리(沙坪里)의 이름에서 각각 따와 신사리(新沙里)라 한데서 연유하다.

◆압구정동(狎鷗亭洞)

압구정동(狎鷗亭洞) 동명의 유래는 이 곳에 조선 세조(世祖)때 권신(權臣) 한명회(韓明澮;1415∼1487)가 지은 압구정(狎鷗亭)이라는 정자가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원래 압구(狎鷗)는 한명회의 호로서 일찍이 중국 송(宋)의 재상이던 한기(韓琦)가 만년에 정계에서 물러나 한가롭게 지내면서 그의 서재 이름을 압구정(狎鷗亭)이라고 했던 고사에서 따온 것이다.

◆청담동(淸潭洞)

청담동(淸潭洞) 동명의 유래는 현재 청담동 105번지 일대에 옛날 맑은 못이 있었으며, 또 현 134번지 일대 한강변의 물이 맑아 이 부락을 청숫골이라 하였는데, 여기서 붙여진 이름

◆도곡동(道谷洞)

도곡동(道谷洞) 동명의 유래는 이 마을 뒤에 매봉산이 둘러 있고 물 아래쪽 산부리에 돌이 많이 박혀 있으므로 독부리라 하던 것이 변하여 독구리, 독골이 되어 도곡(道谷)이라 명명하였다.

◆역삼동(驛三洞)

역삼동(驛三洞) 동명의 유래는 조선시대 역촌(驛村)이었던 말죽거리(馬粥巨里), 상방하교, 하방하교 등 역촌의 세 마을을 합친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율현동(栗峴洞)

율현동(栗峴洞) 동명의 유래는 이 동에서 세곡동(細谷洞)으로 넘어가는 고개에 밤나무가 많이 있었으므로 밤고개, 변하여 반고개, 방고개 또는 한자명으로 율현(栗峴)이라 한데서 연유한다.

◆수서동(水西洞)

수서동(水西洞) 동명의 유래는 이 동리의 서쪽에 한강물이 흐른다 하여 수서(水西)라 하였다. 수서동은 옛부터 궁말 또는 궁촌(宮村)이라고도 불리었다. 그것은 이 마을에 조선 태조(太祖)의 제7子 무안대군(撫安大君) 방번(芳蕃) 내외와 그 봉사손(奉祀孫) 광평대군(廣平大君) 내외 및 그 자손들의 묘소가 있기 때문이다.

◆포이동(浦二洞)

포이동(浦二洞) 동명의 유래는 이 마을에 큰물이 지면 한강물이 들어와 갯들이 되므로 그뜻을 따서 포이동이라 했던 데서 연유한다.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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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진구의 유래★

중곡동
아차산 서쪽 기슭에 위치하고, 동명의 유래는 위치가 능동과 면목동 중간에 있으므로,
간뎃말 또는 한자음으로 중곡리라 하였음.



능동
어린이대공원이 자리잡고 있으며,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 순종의 비, 순명황후 민씨 유릉이
있었으므로 능말, 능리라 하였고, 마장의 안쪽에 있어 안말, 장안말, 또는 한자음으로 내리
(內里), 장내리(場內里라) 하였음.


구의동

아차산 기슭에서 한강변에 이르는 긴 지형으로 자연촌락 구정도(九井洞)의 九자와 산의동
(山宜洞)의 宜자를 따서 구의리라 하던 것이 구의동이 됨.


광장동

아차산 줄기 남쪽 한강변에 위치하며, 광나루는 강폭이 넓은 나루를 일컬으며 조선시대 자연
촌락 광장리(일명 광나루)의 廣자와 장의동(壯 義洞)의 壯자를 따서 광장동이 됨.



자양동
잠실대교 북쪽 좌우편 한강변에 위치하고 조선시대 국가에서 말 1,000 마리를 기르면 용마
(龍馬)가 난다하여 자마(雌馬) 즉, 암말을 길렀기 때문에 자마장이라 칭하였고 동명을 자마
장리라 부르다가 자양동으로 전 음(轉音)됨.



노유동
제방이 없을 때 잔디밭인 이 일대가 가을에 누렇게 변하여, 누런 잔디 산이라 불리다가
누런산으로 다시 노룬산으로 전음됨. 풍류객이 늙어감을 서러워하지 않고 즐기는 곳이라
어느 때부터인가 노유산으로 전하여짐.



화양동
조선시대 화양정이 세워져 있어서 유래. 일설에는 조선초 왕위를 빼앗 긴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봉(降封)되어 영월로 귀양갈 때 이곳에서 송씨 부인과 이별하면서 회행하기를 기원했다하여
회행리라고 호칭했다는 설도 있으며 화양정을 회행정(回行亭)이라고도 했다.



모진동
건국대학교가 대부분을 점하고 있으며 조선시대 전곳평의 양마장(養馬場)지역으로 가끔 방목된
말이 실족하여 건국대학교 정문근처 수렁에 빠져 죽으면 이곳 여인들이 말을 건져내어 그 고기를
나누어 먹었다하여 인근 주민들이 이 여인들을 모진여인이라 부르던 것이 모진동네로 바뀌었다는
유래로 모진동이라 부르게 됨.


군자동

천호대로 남쪽 중랑천 우측에 위치하고, 동명의 유래는 옛날 어느 왕 일행이 거동하다가 동2로변
남일농장터에서 묵게 되었는데, 동행하던 왕비가 옥동자를 낳은 곳이라 하여 군자동이라 하였고
지금도 이곳을 명려궁터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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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평구★
은평구의 역사와 변화모습
- 석기시대부터 일부 지역에서 혈연을 같이 하는 씨족끼리 집단을 이루어 취락생활을 했던 은평구 지역은 서울의 일부로써 백제 때에는 위례성, 신라시대에는 신주, 통일신라시대에는 한산주로 부르다가 경덕왕 7년(757년)에 한주로 고쳤다. 그리고 서울 지방에는 한양군을 설치했는데 서울이라는 이름의 하나인 한양은 여기에서 유래한 것입니다.

- 고려시대에는 한양군을 양주라 고치고 문종 21년(1087년)에 양주를 남경으로 승격시켜 서경(평양), 동경(경주)과 더불어 3소경이 되어 지리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습니다. 이후 충렬왕 34년(1308년)에 한양부로 개칭하였습니다.

- 조선 태조 3년(1394년)에 한양부로 도읍, 한성부로 고치고 서울지역은 5부 52방으로 개편했는데, 지금의 구(區)에 해당하는 5부(동, 서, 남, 북, 중)중 은평구 지역은 북부의 성외인 연은방, 상평방 지역에 해당되었으며 은평은 이 두 지명에서 유래된 것입니다.

- 한일합방이후 한성부가 경성부로 바뀌고 성안(방)과 밖(면)을 구분, 5부 35방 8면제(1911년 4월 1일 경기도령 제3호)로 만들었으며, 1913년 12월 총독부령 제111호로 각 도의 위치 및 관할지역과 부(府), 군(郡)의 명칭이 결정되고 이듬해 4월부터 실시되었는데 연은방 상평방 지역에 은평면(36개 동, 리 관할)이 설치(경기도령 3호)되었습니다.

- 이때 경성부의 관할지역이 대폭 축소되어 은평면 지역이 경기도 고양군으로 떨어져나갔고, 서울시로 편입된 것은 해방 이후인 1949년 8월 13일(대통령령 제159호)에야 이루어졌습니다. 그간의 서울지방의 행정구역 변천을 보면 1936년 2월 14일 조선 총독부령 제8호로 경성부의 구역을 확장, 변경했는데 은평면의 일부인 5개리(홍제외리, 홍제내리, 부암리, 홍지리, 신영리)가 설치되고 이어 1940년 7월에는 서부출장소를 신설, 업무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1943년 6월 경성부령 제163호로 출장소를 폐지, 구(區)제를 실시했는데 용산출장소를 용산구, 동부출장소를 동대문구와 성동구로, 서부출장소를 서대문구로, 영등포출장소를 영등포구로 하고 4대문안에 종로구와 중구가 설치되어 7구제가 시행된 다음에 10월에는 연희면의 일부를 경성부로 편입하면서 서대문구, 용산구의 일부를 분할, 마포구가 신설되어 8개구로 관할하게 되었습니다.

- 해방후 1946년 9월에 경성부가 서울시로 되었고 경기도 관할에서 분리, 서울특별시로 승격(서울특별시 군정법령 제 106호)되었으며 1949년 8월 고양군 은평면 11개리, 연희면 7개리가 서대문구에 편입, 이 구역을 관할할 은평출장소를 설치(1949년 8월 13일 대통령령 제161호)하면서 비로소 은평구 지역이 서울시로 편입되었습니다.

- 1973년 3월 12일 법률 제2569호로 그해 7월 1일을 기하여 경기도 고양군 신도면 관내 구파발리와 진관내, 외리를 서울시로 편입하여 현재의 은평구 지역으로 관할하게 되었으며 1979년 10월 1일 대통령령 제9630호로 서대문구에서 분구되어 출장소를 폐지하고 은평구(15개동 : 녹번, 불광1, 불광2, 갈현, 구산, 대조, 응암1, 응암2, 응암3, 역촌, 신사, 증산, 수색, 진관내, 진관외)로 되었습니다. 1988년 5월 1일 지방자치제를 실시, 희망과 신뢰속에 사랑을 나누는 주민들이 살고 있는 전원도시 은평구(1989년 9월 1일 이후 행정동20개동, 법정동 13개동)로 발전하게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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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은평구 연표
- 삼국시대
백제 온조왕(BC18 ~ AD28)이 부아악(북한산)에 오름
신라 진흥왕 16년(550) 북한산 순행 북한산순수비 건립
- 통일신라
경덕왕대(742~765) 한양군에 소속
- 고려
940 태조 23년. 양주에 소속
1012 현종 3년. 양광도에 소속
1068 문종 22년. 남경유수부에 소속
1307 충렬왕 34년. 한양부
14세기 공양왕대(1352~1374), 경기좌도
- 조선
1394 태조 3년, 한성부(북부) 소속 연은방(延恩坊)·상평방(常平坊)
- 근현대
일제시대 경기도 고양군 은평면
1949 서울시 서대문구 은평출장소 설치
1973 7월 1일. 경기도 고양군 신도면 구파발리, 진관내 외리 편입
1979 10월 1일. 서대문구 은평출장소에서 은평구로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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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로구★
종로5가(鍾路 5街)
종로는 조선왕조 500년동안 밤에는 인정, 새벽에는 파루를 쳐서 도성 8문을 여닫게 하는 종루가 있어 유래된 것이다. 이거리에는 조선초부터 시전이 있었던 번화가였으므로 일명 운종가로 칭한 서울의 중심가였다.

종로3가(鍾路 3街)
종로는 조선왕조 500년동안 밤에는 인정, 새벽에는 파루를 쳐서 도성 8문을 여닫게 하는 종루가 있어 유래된 것이다. 이거리에는 조선초부터 시전이 있었던 번화가였으므로 일명 운종가로 칭한 서울의 중심가였다.

종각(鍾閣)
종각은 조선왕조 500년동안 밤에는 인정, 새벽에는 파루를 쳐서 도성 8문을 여닫게 하는 종루가 있었는데 보신각이라는 편액을달면서 보신각으로 유래하였고, 현재는 종각이라고시민들에게 널리알려져 있다. 3.1절, 광복절, 새해를 알리는제야에 종을 쳐 우리에게희망을 주는 종으로 사랑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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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구★

중구의 유래

중구를 비롯한 기수민속은 중국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중국은 한대(漢代) 이래로 중구절에 상국(賞菊)·등고(登高)·시주(詩酒)의 풍속이 있었고, 당송대(唐宋代)에도 관리들의 휴가일로서 추석보다도 더 큰 명절이었다.

우리 나라에서도 예로부터 중구의 풍속이 전해오고 있다. 신라시대에는 안압지의 임해전(臨海殿)이나 월상루(月上樓)에서 군신이 중구에 연례적으로 모여서 시가를 즐긴듯하며, 고려시대에는 중구의 향연이 국가적으로 정례화하였다.

조선 세종 때에는 삼짇날과 중구를 명절로 공인하 였으며, 성종 때에는 추석에 행하던 기로연을 중구로 옮기고 유생들에게 과거를 실시했다. 조선 후기에 간행된《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9월 조에 의하면 "서울의 풍속을 보면 중구날 남산과 북악산에 올라가 먹고 마시며 단풍놀이를 한다." 라는 기록이 있는데, 이로 보아 중구는 선대로부터 이어온 우리의 풍속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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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구★

吉音洞의 동명은 기리묵골을 한자로 고쳐 쓴데서 연유된다. 기리묵골은 의정부 방면에서 惠化門(東小門)을 통과하여 도성 안으로 들어오는 길목인 미아리고개의 북쪽에 있는 마을인데 의정부 쪽에서 도성 쪽으로 넘어오는 이 고개는 경사가 완만하고 또 貞陵천이 흐르고 있기 때문에 자연히 골짜기가 길게 형성되었다. 따라서 골짜기가 길게 놓여있는 동네라는 뜻으로 기리물골 또는 기레미꼴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또는 이 계곡을 흐르는 물소리가 하도 말고 고와서 물소리를 들으면 저절로 기분이 맑아지므로서 좋은 노래소리가 들리는 동네라는 뜻으로 길음동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도 한다.

길음동은 조선 英祖 때까지는 한성부 동부 崇信坊의 城外의 한 지역으로 되어 있었으나 高宗 2년(1864)에 편찬된 六典條例에 의하면 한성부 동부 숭신방(성외)의 미아리契에 속하였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漢城府 東部
崇信坊(城外)
東小門外契의 彌阿里

1910년 漢城府가 京城府로 개칭되면서 경기도에 예속되었다가 1914년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 미아리가 되었다.
1949년 8월 東大門區에서 城北區가 분리 신설되면서 숭인출장소에서 관할하게 하였다. 1970년 5월 길음동이 포함된 미아리는 미아1동, 미아2동, 미아3동으로 분할되었다가 1973년 7월 도봉구가 분리 신설됨에 따라 도봉구 미아 제 1,2,3동에 속하게되고 다시 1975년 도봉구 미아동 일부가 성북구로 편입되어 길음동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통칭 미아리고개라 부르는 되너미고개는 병자호란때 오랑캐 즉 되놈이 서울에 침입할 때 이 고개를 넘어왔으므로 하여 되너미 고개라 불렀다. 또한 여러가지 명칭의 유래가 전하는데, 남쪽인 돈암동 쪽에서 길음동을 지나 의정부 방면으로 가는 길목인 이 고개가 끝나면 고개가 없으므로 끝에 이른 고개, 마지막고개라는 뜻으로 되너미고개라고 불렀으며, 또 돈암동 쪽에서 길음동 쪽으로 오를 때에는 경사가 몹시 심하기 때문에 너무 힘이 들어서 온몸의 기운이 다빠지므로 다시 요기를 해야된다는 뜻인, 밥을 되먹는 고개라는 말이 변하여 되너미고개라고 불렀다고도 전해져 온다.



장위동 (長位洞)

長位洞 洞名의 유래는 알 수 없다. 주민들의 말에 의하면 朝鮮時代의 大臣 尹容求가 이곳에 隱居했을 때부터 붙여진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갖고 있으나 시대적으로 보아 윤용구의 활동시기는 조선후기 哲宗 高宗年間이기 때문에 이해가 가지 않는다. 이 마을은 조선시대초에도 長位里라 불리어 온 것으로 보아 高麗朝 때 名臣이 이 마을에 있었기 때문에 그때부터 붙여진 이름이 아닌가 추측되기도 하고, 또 하나는 마을 뒤 獐位山이 있으므로 이 산의 이름을 따서 長位洞으로 하지 않았나 하는 의혹도 갖게 한다.

조선 太祖5년(1396)에 都城 및 城底를 5部(東西南北中) 52坊으로 구역을 획정할 때 동부에 소속되었으며 조선후기 英祖 27년(1751)에 간행된 守城冊字「都城三軍分界總錄」에
東部
仁昌坊(城外)
長位里契
로되어 御營廳 前營에 소속되어 都城防禦에 일익이 되기도 하였다. 그뒤 갑오개혁(1894)때에도 한성부 동서 인창방(성위) 東小門外契의 長位里가 되었다. 日帝의 침략으로 漢城府를 京城府로 고친 다음 1911년 4월 1일 장위동을 경성부 인창면에 편입시켰다. 1914년 4월 1일 장위동은 城外지역에 해당된다 하여 경기도 고양군 숭인면으로 편입시켰다.
1945년 8월 15일 일제식 명칭이었던 경성부를 서울市로 고친뒤에 이어 1946년 10월 1일 일제식 명칭을 우리의 고유명으로 개칭할 때 고유명 그대로 장위리로 불리어졌다. 1949년 8월 13일 성북구가 분리 신설될 때 장위동은 고양군 숭인면에서 서울시로 편입됨과 동시에 성북구 관할아래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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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장위동의 자연부락을 살펴보면 웃말, 아랫말, 명덕굴, 간대마을 활량(한량)리 등 5개의 자연부락이 합쳐 현재의 장위동으로 형성되었다.



종암동(鍾岩洞)

鐘岩洞의 동명은 고려대학교 뒷산에 북(鼓)처럼 생긴 커다란 바위가 있는 마을이라 하여 漢字로 鍾岩(또는 鼓岩)이라고 부른데서 연유되었다.

종암동은 高宗 2년(1864)에 편찬된 六典條例에 의하면 東部 崇信坊(城外)의 鍾岩洞契로 되어있었다.1894년 갑오개혁시 종래 漢城府의 5部를 5署로 고침과 동시에 契와 洞도 증가시켰는데 종암동은 이때에

漢城府 東署
仁昌坊(城外)
東大門契의 大鍾岩 小鍾岩
으로 되었다.
1910년 10월 1일 漢城府는 京城府로 고쳐져서 경기도의 소속으로 되었다. 1914년 9월 종암리는 경성부의 동부 출장소의 관할하에 있게 되었다가 이듬해 6월 경성부의 직할로 된다.1936년 4월 대종암리 소종암리는 종암리로 통합되어 경성부로 편입되었다.1943년 동부출장소는 동대문구와 성동구로 나뉘면서 鍾岩町은 동대문구의 소속이 되었다.1946년 日帝式 명칭인 町, 丁目등이 우리말인 洞, 街등으로 바뀜에 따라 鍾岩町도 鍾岩洞으로 개칭되었고 1949년 8월 東大門區에서 城北區가 분리, 신설됨에 따라 종암동은 성북구의 관할이 되었다.
1970년 종암동은 종암1동과 종암2동으로 分洞되고 1978년 종암동의 일부가 下月谷洞으로 되었다.

종암아파트가 위치한 뒷산의 이름은 陳石山이다. 이 산은본래 이름이 없던 돌산(石山)이었으나 산의 주인이 陳씨 성을 가졌고 산 또한 전체가 돌로만 이루어졌기 때문에, 陳씨 성을 가진 사람이 주인인 돌산이라는 뜻에서 陳石山이 라 불렀다. 陳石山의 돌은 집지을 때 석재로 사용되었는데 石質은 물론 쌀뜨물 빛을 띄운 색깔까지도 좋았기 때문에 돈이 많거나 세도가 당당한 사람들이 집을 지을 때는 반드시 陳石山의 석재를 이용했다고 하며 중앙청(舊 조선총독부)을 지을 때에도 이 곳의 석재를 일부 사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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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구★
용산구 유래

용산구는 행정구역상으로는 1896년 4월 17일 한성부 용산방으로 시발되었으며, 광복후인 1945년 10월에 용산구역소의 명칭이 용산구로 개칭되었으며, 1946년 10월 18일부터 [서울 특별시 용산구]로 개칭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동제의 실시는 1955년 4월 시조례에 의거 종전의 동회를 행정동으로 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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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초동(瑞草洞)★

瑞草洞은 이 곳에 서리풀이 무성했다 하여 불리어졌다고 한다. 그래서 일명 상초리(霜草里), 서리풀이라고 칭했다.

조선말까지 경기도 果川郡 東面 瑞草里와 明達里로 칭해 오던 곳이었다. 1914년 경기도 구역획정 때 이곳은 서초리와 명달리를 합쳐 시흥군 신동면 서초리로 칭하게 되었고 1963년 서울특별시 행정구역 확장에 따라 서울특별시 영등포구에 편입되면서 서초동이 되었다.
그후 1975년 강남구가 신설되어 이곳이 속하게 되었다가 1988년 서초구가 분리 신설되어 서초구에 속하게 되었다.

자연부락에 대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산밑(山底)동네는 우면산 아랫마을로 신중초등학교 일대에 있었다. 신중초등학교 남쪽은 돼지막굴이라고 칭했는데, 이는 여기에서 양돈을 했기 때문이며, 과수원도 이 곳에 있었다.
궁너머(宮峴)는 교육대학 서쪽에 있었던 마을로서 시림이라고도 칭했다. 궁너머는 궁째마을 너머에 있었으므로 붙여진 마을 이름으로서 조선시대 어느 왕이 지나다가 이 곳에 별궁을 지었으면 했던 곳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司都甘마을은 현재 영동중학교가 자리잡은 일대에 있었는데, 옛날 사또가 머물렀기 때문에 사도감이라고 불리우게 되었다는 것이다.
鄭谷은 현재 법원단지와 그 남쪽일대를 지칭하는데 예부터 정씨가 모여 살았기 때문에 불리어진 것이다. 마을 입구에 어른키만한 높이의 자연석 2개에 「鄭谷」이라고 각자(刻字)한 것을 세워 놓았는데 현재 이 돌은 반포대로변 海州정씨대종친회 건물 앞에 각각 이전해 놓았다. 이 각자는 白石 鄭重萬의 필적이다.
장안말은 외인주택단지, 즉 삼풍아파트단지 남쪽에 있었는데, 이 마을에는 世宗의 4男인 臨瀛大君(임영대군)의 후손이 대대로 살아 왔다고 한다.
분토골은 서울 교육대학 남쪽에 위치했던 마을로서 일명 富谷洞이라고 칭했다. 전에는 이 마을이 부유한 편이었으므로 붙여진 마을 이름이고 분토골은 마을 근처에서 고운 흙이 나온다 해서 붙여진 것이다.
그밖에도 서초동에는 귓말, 구석말, 상남배기, 王村, 가천동, 무당골, 土谷마을 등의 마을이 있었다.

서초동은 조선시대의 유명인물이 묻혔던 明堂으로서 八明堂의 하나인 草堂 許燁(허엽)의 묘와 神道碑가 경복여상 동쪽 고속도로에 있었다. 1970년초에 경부고속도로가 놓이면서 이 묘와 신도비는 이전되었다.



양재동(良才洞)

良才洞은 이곳에 어질고 재주있는 사람이 많이 산다 하여 지은 동명이라 한다.

양재동은 조선말까지 경기도 果川郡 東面의 양재동이라 칭해 오던 것을 1914년 일제가 경기도 시흥군 新東面 良才里로 정했다가 1963년 서울특별시에 편입되면서 양재동이라 개칭되어 오늘에 이른다. 1973년 영등포구에서 성동구로 편입되면서 영동출장소 관할이 되었고 1975년 강남구가 신설되자 이에 속하게 되었다. 이후 1988년 서초구가 신설 분리되면서 서초구에 편입되었다.

양재동 지역은 탄천으로 유입하는 양재천 연안의 농경지가 있던 곳으로 벼농사가 행해졌던 중심지였다. 이후 1970년에 경부고속도로가 개통되고 성남시로 이어지는 도로가 통하면서부터 급속도로 농경지가 택지로 조성되었다.
양재동에 남아있는 자연부락으로 거여, 비석거리, 상촌, 흥진동, 웃방아다리, 아랫방아다리등이 있다.

양재동에는 널리 알려진 말죽거리(馬粥巨里)마을이 있었다.

말죽거리는 제주도에서 올려보낸 말을 서울로 보내기 전에 이곳에서 최종으로 손질하고 말죽을 쑤어 먹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서울에서 충청도, 경상도로 가려면 한남동 나루터에서 배를 타고 한강을 건너야 했다. 말죽거리는 이 대로의 첫 길목이었다. 이와 반대로 지방에서 서울에 들어오는 사람들도 한강을 건너기 전에 마지막으로 휴식하는 곳이 말죽거리였다.
조선초부터 말죽거리에는 公務로 여행하는 이들에게 마필과 숙식을 제공하는 양재역이 있었고 근처에는 주막도 적지 않았다. 즉 먼 길을 걸어 入京하려는 여행자들은 타고 온 말에게 죽을 끓여 먹이도록 하고 자신도 저녁을 먹은 뒤 이곳에 묵었던 것이다.

또 다른 說로는 이괄(李适)의 亂때 仁祖가 피난을 가는 길에 이곳에 이으러 말위에서 팥죽을 들고 갔기 때문에 말죽거리라는 이름이 유래했다는 것이다.

그밖에 다른 說은 역시 병자호란때 仁祖가 淸軍의 침입을 피하기 위해 남한산성에 들어가자 청군은 이 성을 완전히 포위하였다. 이 때 이곳은 청군의 장수 龍骨大가 지휘하는 우익군의 병참기지였다. 즉 청군의 기마병들이 산성을 향하여 공격을 가한 후에는 교대로 이곳 병참기지에 물러나 말의 피로를 회복시키고 말죽을 쑤어 먹였다 하여 말죽거리라고 칭하였다는 것이다.

말죽거리에 있었던 양재역(良才驛)은 조선시대에 시행된 역원제도에 따라 설치된 주요 역이었다.

한편 이 洞에는 1960년 초까지 北方式 지석묘 6基가 있었다. 1950년대말 김무룡에 의하여 조사된 양재동과 우면동 고인돌무덤은 당시에 경기도 시흥군 신동면 관내에 소재하고 있었는데 1963년에 서울시로 편입되면서부터 도시계획에 의하여 밀려나서 지금은 그 흔적조차 찾을 길이 없다.



잠원동(蠶院洞)

蠶院洞은 조선초에 국립양잠소격인 蠶室都會가 이 곳에 설치되어 蠶室里라 칭하던 것을 1963년에 서울에 편입될 때 이미 현재 송파구에 蠶室洞이 있으므로 중복을 피해 잠실리의 「蠶」자와 인근의 新東面 新院里의 「院」자를 따서 蠶院洞이라 칭하게 된 것이다.

조선말까지는 경기도 과천군 상북면 잠실리와 사평리로 칭해 오던 곳이었다. 그런데 일제 때인 1914년에 경기도 구역획정때에 시흥군 신동면 잠실리로 칭하였다가 1963년 서울특별시에 편입되면서 잠원동이 되어 오늘에 이른다.

이 동의 원래 명칭이던 잠실리는 현재 신동초등학교 정문 건너편부터 잠원로를 끼고 뉴코아예식장 부근까지 있었던 마을로서 신동초등학교 정문 남쪽의 마을을 웃마을 또는 사거리라고 칭하고 뉴코아예식장 부근의 마을을 아랫마을이라 했으며, 그 중간의 마을을 간데말 또는 비석거리라고 칭했다.

사거리로 부르는 웃마을을 동서로 관통하는 노폭 8m도로는 옛날에 三南道路로 일컫는 주요한 길이었다. 즉 수원, 용인에서 서울을 오려면 원지동, 말죽거리를 거쳐 이 길을 지나 현재 변전소와 한신아파트 119동 사이의 길을 따라 강변의 잠실나루에 이를 수 있었다. 잠실나루는 일명 점말나루터, 서빙고나루터라고도 불렀는데, 이 나루터에서 나룻배를 타고 용산구 점말과 서빙고로 건너갈 수 있었다.

할떡거리마을은 현재 뉴코아예식장 부근에 있었으며, 마을명칭은 옛날에 떡 하나로 다투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한다.

조선전기 각종 문헌에서 볼 수 있는 蠶室은 일반 민가의 잠실이 아니라 국립양잠소격인 잠실도회(蠶室都會)를 의미한다. 태종은 양잠을 국가적인 산업으로 육성하기 위해 잠실도회를 설치, 운영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판단하여, 우선 지방에 시범 잠실도회를 설치하니, 이 조치가 잠실도회의 효시이다.
서울의 잠실은 아차산, 연희궁의 東西잠실이 존속되다가 新蠶室이 증설된다. 東잠실과 西잠실은 임진왜란을 계기로 그 자취를 감첬지만 新蠶室이 설치되었던 현재 잠원동 지역은 조선말기와 일제침략기까지도 넓은 지역이 뽕나무밭이었다.



반포동(盤浦洞)

盤浦洞은 이 마을로 흐르는 개울이 서리서리 구비쳐 흐른다해서 「서릿개」곧 蟠浦(반포)라 하다가 변음되어 盤浦로 칭하게 되었다고 전한다. 또 一說에는 이곳이 홍수 피해를 입는 상습침수지역이므로 반포라고 칭했다고 한다.

조선말까지 경기도 果川郡 上北面 上盤浦里·下盤浦里 지역이었다. 일제때인 1914년 전국의 행정구역을 조정하면서 이곳은 시흥군 신동면 반포리로 칭하게 되었다. 1963년 서울특별시에 영등포구에 편입되면서 반포동으로 개칭되었다. 1973년 성동구 영동출장소에 편입되었다가 1975년 신설된 강남구 관할에 속한다. 그 후 1988년 서초구가 신설 분리되면서 이에 속하게 된다.

반포동은 1960년대만해도 신반포路 以西지역의 대부분은 강물속에 있었다. 약간 높은 지역에 공동묘지가 있었고 갈대밭과 뽕나무밭이 우거져 있었으며 채소농업과 양잠이 행해졌던 곳이다. 그러나 큰비가 내려 한강의 수위가 높아지면 이곳 대부분이 침수되어 농작물이 피해를 입곤 했다.

반포 1동지역은 고속버스터미널 뒤쪽 일대로서 전에는 周興洞 또는 전나무골로 부르던 지역이었다. 주흥동은 일제때 부호 김주용씨의 이름을 붙여 그가 부흥시킨 마을이란 뜻에서 생긴 이름이다. 1925년 을축년 대홍수때 잠실리의 주민들이 수재로 집을 잃자 이 곳에 집 20채를 건립하여 입주하게 했다. 이 부근에는 전나무가 있었으므로 전나무골로도 칭했다.

砂平路 동쪽, 팔레스호텔 뒤쪽 일대는 서래마을이 있다. 西涯마을 또는 서릿개마을이라고 부르는 이 마을에는 예부터 살아온 원주민들이 20호 이상 있다. 서래마을이란 명칭은 마을 앞의 개울이 서리서리 구비쳐 흐르므로 불리우게 되었으며 반포동의 명칭도 이 마을에서 유래했을 것이라는 것이다. 西涯라는 마을이름은 매곡동 사람들이 이 마을이 서쪽 물가에 있는 마을이고 뒤에 깎아지른 듯한 산이 있으므로 이처럼 불렀다는 것이다.
砂平路의 명칭유래는 이 곳 일대가 漢江南岸에 위치하여 범람으로 퇴적한 백사장이 넓으므로 사평원(모래벌)이라 한데서 연유한다.



방배동(方背洞)

方背洞 동명의 유래는 牛眠山을 등지고 있는 동리라는 뜻의 方背라 한데서 연유한다. 우면산은 관악구와 강남구와의 경계에 솟은 해발 290m의 산으로서 산모양이 소가 졸고 있는 형국이라 하여 우면산이라 불리어 졌으며, 관악구의 관악산과 우면산의 고개에 해당하는 남태령(南泰嶺)이 있다.
그러나 一說에는 동의 북쪽에 흐르는 한강을 등진(背) 모서리(方)란 뜻으로 方背洞으로 불리어 졌다고 하나 확실한 것은 알 수 없다.

조선시대말까지 경기도 果川郡 上北面 方背里이었다. 1914년 경기도 구역획정때에 이 지역은 경기도 시흥군 신동면 방배리가 되었다. 1963년 서울특별시 행정구역확장에 따라 영등포구 新東출장소의 관할하에 들면서, 방배동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73년 관악구가 설치되어 방배동은 관악구에 속하게 되었다가 1980년 강남구로 편입된다. 그 후 1988년 서초구가 신설 분리되면서 서초구에 속하게 된다.

옛 지명중 홍문 앞자리라고 불리는 들은 지금의 방배 3동 신동아아파트 자리인 것으로 英祖때 세워진 文化柳氏 4旌門(정문)이 세워져 있었기 때문에 불리어진 것이다. 이 4정문은 1973년 경기도 안산시 와리로 이전되었다.
지하철2호선 방배역 부근 방배동 190-1에는 효녕대군(孝寧大君)의 묘소와 사당인 청권사(淸權祠)가 있다.
또한 방배동에는 고분이 있었는데 이 고분에서는 1970년대에 조선초기의 목우(木偶) 6점이 출토되었다.
방배동지역은 옛날에는 하절기에 한강이 범람하면 방배동의 저지대 일대는 상습적으로 침수되던 쓸모 없는 늪지대였고 班家村이 아닌 역촌(驛村;일종의 하층계급 거주지역)과 民村지역으로서 城內의 시신 매설(묘지) 및 천민거주지역(무당)으로 구분되었다.



내곡동(內谷洞)

內谷洞은 彦州面의 일부로서 本村의 안쪽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안골, 안말로 불리우던 것이 한자명으로 내곡동이 된 것이다.

조선말까지 이곳은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 안골, 내곡동으로 칭해 오다가 1914년 행정구역을 조정하면서 안골, 능안말, 구석말, 양지말을 병합하여 廣州郡 彦州面 內谷里라 칭했다.
1963년 서울특별시에 편입되면서 신설된 성동구 언주출장소 관할하에 내곡동이 되어 오늘에 이른다. 1975년 성동구로부터 분리·신설된 강남구에 속했다가 1988년 신설된 서초구에 편입되었다.

내곡동에는 안골을 위시하여 샘마을, 능안마을, 흐능날, 헌인마을, 홍씨마을, 신흥마을 등의 자연부락이 산재하고 있다.

內谷洞의 동명이 된 안골, 안말 또는 內谷은 일명 양지말이라고도 칭한다. 이 마을에는 慶州金氏가 오랜 전부터 거주해 왔다.
능안말은 헌능(獻陵) 안쪽에 위치했으므로 붙여진 명칭이고, 홍씨마을은 洪氏만의 집성촌이므로 불리어졌다.
흐능날은 30여호 정도의 주택이 헌인능(獻仁陵) 입구와 주변에 형성된 마을이다. 샘마을은 1972년도에 창경궁, 창덕궁 인근의 종로구 와룡동(臥龍洞) 철거민들이 집단으로 이주하면서 형성되었다. 원래는 박석고개 좌측에 정착했으나 1979년 취락구조개선사업 때 헌릉로(獻陵路) 건너편으로 거의 이주해서 현재 신흥마을 입구에 자리잡고 있다.
헌인능 동쪽에 위치한 헌인마을은 1970년초에 음성 나환자들의 자활촌으로 형성되었다. 당시 인근 마을에서 이들의 거주를 반대했으나, 정부의 적극 지원정책으로 마을을 이루어 양계를 시작해서 성공을 거두었다.
헌능로의 박석(薄石)고개는 일명 덕영고개라고도 칭하는데 조선시대에 헌인능에 왕의 능행(陵行)때를 대비하여 고개에 네모난 돌을 깔아 놓았기 때문에 박석고개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우면동(牛眠洞)

牛眠洞은 牛眠山 아래 골자기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유래된 동명이다.

조선말까지 경기도 果川郡 東面 牛眠洞이었다가 1914년 시흥군 신동면 牛眠里로 되었다가 1963년 서울특별시 영등포구에 편입되면서 우면동으로 되었다. 1973년 영등포구에서 성동구로 편입되면서 영동출장소 관할이 되었고 1975년 강남구가 신설되자 이에 속하였다가 1988년 서초구가 신설 분리되면서 서초구에 편입되었다.

우면동에 남아 있는 마을들의 이름과 유래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가시내꿀 : 옛날에는 가시덤불이 우거졌던 곳이라 하며, 일명 형촌(荊村) 또는 샛말이라고도 한다.
송동 : 소나무가 무성한 마을로 조선시대에 능터로 예정되었던 곳이라 하여 능안이라고도 하며, 송부원군 산소가 있다고 한다.
岩山(바우뫼·밤애) : 범바위(虎岩)라는 바위가 있는 산밑 마을명을 일컫는데 서울시공무원교육원과 경계를 이루는 산 아래에 있다.
城村(잿말, 큰말) : 산이 성처럼 둘러싸여 밤애로 넘어가는 고개 아래에 있는 마을로, 옛날에는 우마니의 중심으로 큰마을이 있었다.
우마니 : 우면리를 우면이라 하다가 변한 이름이다.



염곡동(廉谷洞)

廉谷洞은 이 곳 지형이 염통과 같이 생겼으므로 염통골 또는 한자명으로 영통곡(靈通谷), 염곡동(廉谷洞)이라 하였다 한다.

조선말까지 경기도 광주군 彦州面 廉谷洞으로 칭해왔다가 1914년 염통골의 이름을 다서 광주군 언주면 廉谷里라 칭하였고 1963년 서울특별시에 편입되면서 염곡동이 되어 오늘에 이른다. 1973년 서울특별시 영동출장서 관할이 되었고, 1975년 성동구로부터 분리, 신설된 강남구에 속하였다가 다시 1988년 서초구가 신설되면서 이에 속하게 되었다.

염곡동은 구룡산을 끼고 남향한 산자수명(山紫水明)한 아늑한 마을이므로 예부터 각처 사람들이 이곳에 사는 사람을 부럽게 보았으며, 이 마을을 피난골로 일컫고 있는데 이는 6.25전쟁때에도 아무런 피해가 없었던 데서 연유한다.
탑곡(塔谷) 또는 탑성골은 염통골 남쪽, 헌능로(獻陵路)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탑곡은 옛날에 탑이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것으로 이 마을에는 慶州金氏가 11대 이전부터 살기 시작했다.
이 동의 북쪽에 위치한 九龍山(283.2m)은 옛날 이 산에서 용 9마리가 승천했으므로 명명되었다고 하고 이 산의 주봉(主峰)을 국수봉(國守峰)이라고 하는데, 이 명칭은 정상에 봉수대가 있어 국가를 지킨다해서 붙여진 것으로 이 곳에는 바위굴이 있어 봉수군(烽燧軍)이 기거했다는 것이다.



신원동(新院洞)

新院洞은 조선시대 원터 아래쪽에 새로 조성된 마을이므로 「새원」이라하던 것을 한자명으로 신원동이라 한 것이다.

조선시대말까지 경기도 광주군 언주면 新院洞, 新亭洞 지역이었다. 1914년 이곳은 광주군 언주면 신원리라 칭하였다가 1963년 서울특별시에 편입되면서 신원동이 되어 오늘에 이른다. 1973년 영동출장소 관할이 되었고, 1975년 성동구로부터 분리 신설된 강남구에 속하였다가 1988년 신설된 서초구에 속하게 되었다.

신원동의 마을 이름이 있게 된 새원(新院)은 신원동의 서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새원이란 말 그대로 조선시대에 새로 이곳에 院을 설치하였던 데서 생겨난 마을이름이다.
새원마을중에서 근본이 되는 마을이 벌말 또는 本村, 坪村이다. 즉 마을이 벌판에 있으므로 벌말이라고 하고, 또는 한자명으로 평촌이라 하는데, 본촌이란 새원에서 근본이 되는 마을이므로 칭해졌다.
벌말은 金海金氏가 모여 사는 집성촌이었고, 6.25전쟁때 한강을 건너온 북한군이 이 마을에 주둔하자, 과천시 쪽에서 이동해 온 아군이 기습공격하여 북한군이 크게 패한 격전지였다.
신원동 남쪽에는 새쟁이(新亭)마을이 있다. 새쟁이란 마을 명칭은 수백년 된 느티나무가 정자같이 서 있으므로 신정이라고 칭해 온 것이다.



원지동(院趾洞)

원지동은 조선시대에 원(院)이 있었던 곳이라 하여 원지(院址)라고 하던 것이 잘못 표기되어 원지동(院趾洞)이 되었다 한다.

원지동은 조선말까지 경기도 과천군(果川郡) 동면(東面) 신원동(新院洞)으로 칭해왔다. 1914년 행정구역을 임의로 조정하면서 이 곳을 시흥군 신동면(新東面) 신원리(新院里)라고 칭했다. 1963년 서울시 행정구역을 확장함에 따라 서울특별시 영등포구에 편입되면서 현재의 신원동과 분리하여 바람골, 양수리, 원터마을의 3개 부락을 원지동이라 칭하여 오늘에 이른다.
1973년 영등포구에서 성동구로 편입되었고 1975년 강남구가 신설되어 이에 속하게 된다. 그 후 1988년 서초구가 신설 분리되면서 다시 서초구에 편입되었다.

원지동에 남아있는 마을이름은 다음과 같다.
바람굴은 새원에서 경부고속도로 밑을 통과하여 청계산 밑에 있는 마을이름으로 산이 높고 바람이 센 곳이기 때문에 불리어졌다.
양수리마을은 관현사(寬顯寺) 입구, 유원지 주차장이 위치한 곳으로 옛날 양씨와 수씨가 살았기 때문에 마을이름이 붙여졌으나 현재는 폐동되어 골짜기와 들판이름으로만 불리운다. 이 마을로 들어오는 입구인 경부고속도로 옆에는 술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는 지방에서 상경하는 나그네들이 여기까지 오면 서울에 거의 도달했으므로 이 곳에 앉아 술을 마셨다 하여 불리어진 바위로 지방에서도 잘 알려진 바위이다.
개드락이란 골짜기는 이 마을 왼쪽에 있는데 비탈이 심해 불리어진 것이다. 또한 이 마을 위쪽에 청계산 제2야영장이 있고 이 야영장 오른쪽에는 거인의 손자국과 머리자국이 있어 장사바위라고 칭하는 바위가 있다. 그리고 바위가 넓적하다 하여 붙여진 넙적바위도 장사바위 부근에 있다.

원지동과 신원동의 경계가 되고 성남시로 통하는 2차선 포장도로를 삼남도로(三南道路)라고 일컫는데 조선시대에 삼남으로 통하는 주요한 길이었다. 즉 현재 세곡동으로 나가는 헌릉로(獻陵路)보다 일 길로 많은 사람들이 달래고개를 넘어 너더리(板橋)를 거쳐 용인이나 수원으로 갈 수 있었다. 이 길을 가다보면 청계산 제 1야영장과 청계산 기도원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나타나는데 이 입구가 원터(院基)마을이다. 이 마을은 조선시대에 여행자를 위한 원이 세워져 있었던 관계로 불리어진 것이다.

그 밖에도 원지동에는 다음과 같은 들판, 바위, 골짜기 이름이 있다.
진들 : 산등성이가 길게 뻗은 곳에 발달한 들이름.
솔배 : 옛날 솔바위가 있었던 들이름.
젯상바위 : 바위가 제상(祭床)같이 생겼다고 한다.
광명고개 : 원지동에서 서울대공원으로 넘어가는 고개이름으로 일명 괭맹이고개라고 부른다.

서울에 있었던 원으로는 동대문 밖의 보제원(普濟院), 서대문 밖의 홍제원(弘濟院), 남대문 밖의 이태원(梨泰院), 광희문 밖의 전관원(箭串院)이 있었는데, 그 중 홍제원과 이태원은 지금도 지명으로 남아 전한다.
원지동의 경부고속도로변에는 선돌(立石)과 고인돌(支石)군이 4곳에서 발견되어 학계의 관심을 끌고 있다. 즉 서울톨게이트 부근과 원지동 350번지, 336,337번지에 고인돌이 있고, 선돌은 미륵당(彌勒堂) 남쪽 도로변에 세워져 있다.
원지동 고인돌무덤과 선돌은 서울지역에서는 유일한 선사시대의 거석(巨石)문화유적으로서 고인돌무덤 그 자체는 남방식(南方式) 지석묘의 전형을 이루고 있고, 아울러 선돌과 열석(列石) 및 작업장을 겸비한 선사시대 거석기념물로서는 최상의 구비조건을 갖추고 있다. 더구나 서울지구에서는 원지동 거석기념물이 유일하다고 하는 점에서 이 유적의 또 다른 중요한 가치가 있다고 하겠다.

2008.03.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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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쇠막으로 알고 잇어염

2008.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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