④ 제약업계 ‘감성영업’

고영득·허진무 기자

병원장 ‘성형시술 마루타’ 요구

“거래 끊길라” 성희롱도 꾹 참아

“이건 뭐 노예나 다름없지요.”

최근 한 국내 제약업체의 불법 리베이트를 적발한 경찰 수사팀 관계자는 “의사들의 갑질이 너무 심한 거 아니냐”며 이같이 말했다.

[영업사원의 비애] ④ 제약업계 ‘감성영업’

경찰의 혀를 내두르게 한 건 제약업계의 관행인 이른바 ‘감성영업’이다. 쌍벌제 도입 등 리베이트 규제가 강화되면서 제약사 영업사원은 자사 제품 처방률을 높이기 위해 의사들의 ‘감성’을 자극하는 데 집중한다.

이 때문에 제약사 영업직원의 일상은 무슨 일이든 척척 해내는 ‘가제트’ 수준이다. 아침마다 병원에 빵을 배달해주는 ‘빵 셔틀’은 기본이다. 매진된 프로야구 암표 구하기는 물론 의사 출퇴근과 그 자녀들의 등·하교를 책임지는 ‘운전기사’ 역할도 한다. 의사 차량의 세차와 정비도 도맡는다. 병원장 자녀와 놀아주기, 병원 수도꼭지 고쳐주기, 휴대전화 대신 개통해주기, 의사 여자친구에게 선물 전달하기…. 영업맨이 아니라 머슴 수준이다.

특히 여성 영업사원의 처지는 더욱 열악하다. 여성 사원들은 감성영업 과정에서 각종 성희롱에 시달리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이다.

김영미씨(30·가명)는 이름만 대면 다 아는 국내 제약업체에서 수년째 영업사원으로 일하고 있다. 비뇨기질환 약품을 담당하는 김씨의 주 거래처는 개인병원으로 하루 10~13군데를 다닌다. 김씨는 “타사와의 경쟁에서 이기려면 의사와의 친밀도를 높이는 데 몰두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2014년 8월쯤 김씨는 거래처 병원장의 개인모임에 참석한 적이 있다. 워낙 깐깐한 원장이었기에 ‘점수’를 받기 위한 발품이었다. 김씨는 이 자리에서 한 성형외과 원장으로부터 보톡스·필러 시술 시연회에 함께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김씨는 거절했다. 거래처가 아니어서 실적 향상에 도움이 되지 못할 것으로 판단했다. 무엇보다 김씨는 시술 부작용을 우려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거래처 병원장이 요청을 하자 김씨는 울며 겨자 먹기식으로 시술에 응했다. 결국 시술 부작용으로 김씨 피부는 괴사했다. 완치가 되지 않아 김씨는 지금도 치료를 받고 있다. 그는 성형외과 원장에게 치료비를 요구했지만 이 원장은 무료 시술이라는 이유로 ‘나 몰라라’ 하고 나왔다. 김씨는 “영업사원을 우습게 아는 것”이라며 “치료비만 수천만원이 넘었다”고 말했다. 김씨는 이 원장을 상대로 민사소송을 제기한 상태다.

일부 비뇨기과 원장은 김씨가 보는 앞에서 남성 성기 모형을 만지작거리는가 하면, 여성 환자들의 회음부 차트만 가득 모아 김씨 앞에 내놓기도 했다. 김씨는 “내가 어떤 반응을 나타낼지 보는 것”이라며 “그런데서 희열을 느끼는 것 같다”고 말했다.

김씨는 종종 의사들로부터 “어제 남자친구랑은 뭐 했어” “아기 한 번도 가진 적 없니” 등의 노골적인 성희롱 발언도 들었다. 한 병원장은 김씨가 여름휴가 간다고 하자 “수영복 입고 찍은 사진 보내라”고 요구했다.

김씨는 후배 여성 영업사원의 치욕적인 경험담도 들려줬다. 진료실을 나오는데 한 병원장이 “이봐, 신고 있는 스타킹 벗어놓고 가라”고 했다는 것이다. 또 다른 신입사원은 의사들과의 술자리에서 성추행을 당하고 회사를 그만뒀다. 김씨는 “병원장이 ‘갑’인 데다 단단한 네트워크를 자랑하는 의사단체에서 불매운동을 벌인다고 하면 회사로서도 별 도리가 없다”고 말했다.

김씨 역시 퇴근한 후에도 술자리에 오라는 의사들의 요청을 거절할 수 없다고 한다. 그는 “무엇보다 의사들의 ‘변태적 행위’를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대학에서 수학을 전공한 김씨에게 의사들이 자녀들의 수학 과외를 요청하는 일도 다반사다. 물론 무상 과외다.

김씨는 “근본적인 문제부터 고쳐야 한다”며 “R&D(연구·개발)에 집중해 좋은 약을 만들어야 이런 병폐가 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국내 제약업체들이 외국회사 약품의 복제품을 만들어 경쟁하다보니 인권유린적인 감성영업에 치중하게 된다는 이야기다.

외국계 제약회사 영업사원인 박모씨(32)도 “우리는 오리지널 약품을 취급하다보니 의사들은 우리에게 그렇게 막 대하지 않는다”며 “우리 영업 방침은 제품의 가치를 전달하는 것이지, 자녀를 데려다주거나 형광등을 갈아주는 일은 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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