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출받아 집 사니 ‘건보료 폭탄’…말뿐인 개선 약속 ‘이제 그만’

남지원 기자

③ 건보료 개편

건강보험 지역가입자 박애란씨

18만3000원. 지난해 7월 박애란씨(65)는 집으로 날아온 국민건강보험료 고지서에 찍힌 금액을 보고 깜짝 놀랐다. 몇 해 전 월세를 감당하기 어려워 은행 대출을 끌어모아 산 집이 화근이었다.

은퇴 후 지역가입자가 되며 건강보험료가 대폭 인상돼 집까지 내놓은 박애란씨가 지난 14일 보험료 납부 독촉장을 보여주고 있다. 정지윤 기자

은퇴 후 지역가입자가 되며 건강보험료가 대폭 인상돼 집까지 내놓은 박애란씨가 지난 14일 보험료 납부 독촉장을 보여주고 있다. 정지윤 기자

중·고등학교 컴퓨터 교사로 30여년간 재직한 박씨는 2012년 명예퇴직하고 연금생활자가 됐다. 젊은 시절 가족의 생활은 늘 빠듯했다. 남편이 수차례 사업에 실패하는 바람에 돈이 제대로 모이지 않았다. 일본에서 공부한 두 자녀의 유학비도 댔다. 교직생활을 접은 뒤 매달 손에 쥐게 된 공무원연금은 230만원. 국민연금으로 생활하는 사람들보다는 나은 형편이었지만 수입이 갑자기 줄어든 것은 타격이었다. 보증금 5000만원에 월세 50만원짜리 빌라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월세가 가장 부담스러웠다.

차라리 대출을 받아 집을 사기로 마음먹었다. 당분간 원금은 갚지 않은 채 이자만 내면서 월세 생활을 청산할 생각이었다. 마침 금리가 높지 않았다. 2013년 박씨는 은행 2곳에서 대출 9500만원을 받아 보증금과 합쳐 서울 관악구 신림동에 있는 73㎡ 크기의 1억4500만원짜리 빌라를 구입했다.

집을 살 때 세금 문제는 생각해 봤지만 건강보험료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 교직에 있을 때는 직장가입자로 월 15만원가량의 건보료가 월급에서 원천징수됐고, 퇴직 후 지역가입자로 전환돼 월 8만3000원 정도를 냈다. 얼마 뒤엔 아들이 취직하면서 아들의 피부양자로 등재돼 건보료를 내지 않았다. 하지만 아들이 회사를 나와 프리랜서로 일을 시작하면서 다시 지역가입자가 됐고, 새로 구입한 집에 건보료가 부과돼 ‘건보료 폭탄’을 맞게 된 것이다.

박씨는 “처음에는 뭔가 잘못됐는 줄 알고 건강보험공단에 찾아가 민원을 제기했다”고 말했다. 자동차도 없고 집값 중에서도 대출이 반인데 건강보험료를 10만원이나 더 내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수차례 건보공단을 찾아갔지만 “법이 그러니 보험료를 다 내야 한다”는 답변만 돌아왔다. 정부가 지역가입자의 건보료 부담을 낮추는 부과체계 개편안을 마련하다가 발표 직전 백지화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고는 화가 치밀었다. 가족들이 만류해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지만 국회 앞에 나가 1인 시위를 할 생각까지 했다. 박씨는 “지역가입자는 소득자료가 투명하지 않아 재산에 부과한다고 하는데, 나는 연금소득자라서 소득이 투명하다. 재산에 부과한다 해도 대출은 부과대상에서 빼줘야 하는 게 아니냐”고 말했다.

박씨는 여력이 되지 않아 지난해 7~11월 건보료를 내지 못했다. 5개월 동안 밀린 건보료 96만7250원을 분할 납부하고 있는 상황이다. 지난해까지 아들의 학자금 대출을 월 24만원씩 상환했던 그는 “대출 상환이 끝나면 좀 숨통이 트일 줄 알았는데 ‘폭탄’을 맞았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박씨는 최근 다시 집을 내놓았다. 월세라도 줄여보겠다는 계산과 달리 은행 이자 50여만원과 세금, 건보료를 더하니 오히려 부담이 늘었기 때문이다.

박씨는 “생활비 중 10%가 넘는 돈을 보험료로 내고 있지만 ‘건강보험 하나만 있으면 만약의 경우에도 걱정 없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고 말했다. 식습관에 신경 쓰고 운동을 하는 등 건강관리를 하고 있는 편이라 지금까지 크게 아픈 적은 없었지만, 나이가 더 들어서 큰 병에 걸린다면 저축도 없는 형편에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다.

몇 해 전 친정어머니가 대퇴골 골절로 수술하고 한 달 정도 입원한 적이 있었다. 6인실을 쓰고 형제들이 돌아가며 간병했는데도 이런저런 비용을 합치니 병원비가 400만원이나 나왔다. 박씨는 “어머니가 아픈 걸 보면서 무서워졌다. 작년 건강보험 흑자가 17조원이나 된다는데, 적어도 의료비 때문에 생계가 곤란하지 않도록 건강보험 보장성을 더욱 강화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박씨는 “직장가입자들은 자기 일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지금의 부과체계를 유지한다면 누구나 은퇴한 뒤 나 같은 문제를 겪을 수 있다”며 “모든 정당들이 불합리한 지역가입자 건보료를 감당할 수 있는 수준으로 개선하겠다는 말만 하는데 이번 총선과정에서 제대로 된 논의와 실천 방법들이 나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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