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 한 식품회사 직원의 죽음

김원진 기자, 김서영 기자

직장 안팎서 ‘머슴’ 취급…고객 갑질에 시름, 실적 압박에 빚내기도

지난 8일 풀무원 한 계열사 직원들이 노래방에서 함께 술을 마시던 20대 직영점주 한모씨(29)를 폭행하고 숨지게 한 혐의로 경찰에 구속됐다. 지난 4일 술자리에서 한씨가 “왜 우리 지점을 홀대하느냐”고 항변하면서 갈등이 시작됐다. 한씨의 입사 동기인 영업사원 김모씨(29)가 “선배에게 말을 함부로 한다”며 말다툼을 하다 몸싸움으로 이어졌다. 동석한 영업관리팀장 변모씨(42)는 “너네가 내 앞에서 싸우면 되느냐”며 폭행에 가담했다. 한씨는 얼굴 등을 주먹과 발로 맞아 뇌출혈 증세를 보였고,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뇌사 상태에 빠졌다. 한씨는 지난 8일 오후 끝내 사망했다.

사건이 알려진 후 본사와 영업사원의 ‘주종관계’를 비판하는 여론이 일부 형성됐다.

최근 경기침체로 인해 실적 경쟁에 더욱더 내몰리고 있는 영업사원의 처지를 안타까워하는 목소리도 나왔다. 사건 관련자들이 모두 영업사원이라는 점에서 극한의 스트레스에 시달리는 영업맨들의 비극이라는 말도 나왔다.

풀무원 관계자는 9일 “본사에 입사하면 직영점장으로 파견 갈 수도 있고 거기서 본사로 복귀할 수도 있는 구조”라며 “본사 직원이 대리점 직원을 폭행한 것이 아니라 직원 간의 폭행”이라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또한 “당사자들이 개별적으로 사적인 술자리를 가졌다. 그런 과정에서 언행이 높아지고 말다툼이 생기다가 폭력까지 이어진 것”이라고 말했다.

영업사원은 한때 한국 경제 발전의 견인차 중 하나로 묘사되곤 했다. 세계를 무대로 누비는 상사 영업맨은 진취성과 근면성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무한 실적 경쟁에 시달리는 기업의 ‘노예’라는 인식이 강해졌다. 특히 한국 경제가 장기 저성장 국면에 빠져들면서 한때 샐러리맨의 신화였던 영업맨들도 벼랑 끝에 몰린 신세가 됐다. 이번 사건을 접한 대중이 한씨에게 감정이입을 한 것도 ‘영업사원의 비애’가 그만큼 한국 사회에서 공감을 얻고 있기 때문이다.

‘영업직’은 상품을 선전해 구매하도록 하는 직군을 일컫지만, 일상에서 ‘영업한다’는 표현은 ‘접대’ ‘비위 맞추기’ 등의 의미까지 포괄한다. 영업사원은 ‘감정노동’의 최전방에서 일하는 셈이다. 실적을 강요하는 회사와 이를 맞추기 위해 고객들에게 무한정 엎드려야 하는 ‘이중의 감정노동’이 영업맨들에겐 운명과도 같다.

영업사원이 ‘머슴’ 취급을 당하는 가장 대표적 분야는 제약업계다. 지난 7일 제약업체로부터 리베이트를 받아온 의사·병원 사무장들이 무더기로 붙잡혔다. 제약업체 영업사원들이 의사들에게 건넨 건 금품만이 아니었다. 이들이 “사무실 컴퓨터가 고장났다” “수도꼭지가 이상하다” “휴대전화를 바꿔야 하는데 시간이 없다”는 의사들의 ‘주문 아닌 주문’에 재깍 ‘시중’을 들어왔단 사실이 드러났다. 제약업계에서 통용되는 소위 ‘감성영업’이었다. 이들은 의사 및 의사 자녀들의 등·하교 기사를 자처했고, 집안 가사 도우미 역할을 해야 했다. ‘빵 셔틀’은 기본이었다. 한 제약사 영업직원은 “내가 ‘가제트’도 아니고 ‘홍반장’도 아니지만 거래처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만능맨이 될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영업사원들은 물리적 폭행과 폭언, 모욕에도 쉽사리 노출된다. 이모씨(21)는 지난해 한 대기업 통신 계열사에 영업사원으로 취직했지만 4개월 만에 그만뒀다.

그는 “상사한테도 깨지고 고객한테도 욕 듣는 신세였다”고 회고했다. 이씨는 “고객들이 아무리 심한 욕, 심지어는 부모 욕을 해도 영업사원은 절대 먼저 전화를 끊을 수 없다. ‘계속 욕하시면 통화가 어렵습니다’라고 응대하는 게 지침이다. 20분간 욕을 들어먹은 적도 있다”고 말했다.

그의 팀장은 성과가 더딘 직원들의 자리를 수시로 바꾸고 왕따를 시켰다. “너는 저 구석으로 가” “회의에 들어오지 마” 하는 식이었다. 이씨는 “한 번 자리를 바꿀 때마다 컴퓨터와 비밀번호 세팅을 새로 해야 해서 밤까지 퇴근을 못했다. 일주일에 네 번 자리를 옮긴 적도 있다”고 말했다. 그는 적성에도 맞아 1등으로 들어간 영업직에서 버틸 수가 없었다.

영업사원들은 목표 실적 달성을 위해 자신의 손해를 감수하기도 한다. 국내 한 식품계열 대기업에서 영업사원으로 일했던 박모씨(27)는 영업 과정에서 발생한 손실을 자신의 돈으로 메꿨다.

그는 “식품의 경우 진열대에 놓이는 위치가 중요하다. 판매와 직결되기 때문”이라며 “이를 가지고 마트나 할인점에선 ‘원하는 가격으로 물건을 주지 않으면 진열을 불리하게 해버리겠다’고 영업사원을 협박한다”고 말했다.

박씨는 “그렇게 되면 회사에서 욕먹는 건 나니까, 내가 빚을 내가면서 가격을 맞춰줬다”고 말했다. 박씨는 “한 달에 30만~40만원 까지는 건 우습다”고 회고했다. 물건을 팔수록 손실이 발생하는 꼴이지만 박씨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박씨는 ‘이건 아니다’ 싶어서 그만뒀다.

비인격적 대우와 실적 압박에 내몰리다 보니 영업직의 정신 건강은 위태롭다. 지난해 12월 한 취업포털이 2982명을 상대로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고객상담·영업직이 ‘나는 감정노동자’라고 답한 비율은 92.2%로, 다른 직군에 비해 높았다. 또한 고객상담·영업직 71.7%는 우울증을 경험했다고 응답했다.

■영업사원이란

약·보험 등 33만명 근무…월 급여 307만원

영업사원은 흔히 매출과 이익 증대를 위해 고객을 만나 상품을 판매하는 노동자를 일컫는다. 보험설계사와 자동차 딜러, 제약회사 영업사원 등이 일상에서 접할 수 있는 대표적인 영업사원이다.

통계청 표준직업분류상(2015년 기준)으로 영업직 종사자는 33만4187명이고, 월 평균 급여는 307만7648원이다. 이외에 방문·통신서비스 판매원 등이 포함된 방문노점 및 통신판매 관련직(5만3873명)까지 합하면 수는 더 늘어난다.

흔히 영업사원은 다른 직종에 비해 노동 강도가 높고 업무 스트레스가 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날마다 다수의 낯선 사람을 만나야 하고, 낯익은 고객을 접대해야 하는 것이 일상이며, ‘갑’보다는 ‘을’의 위치에서 서비스나 물건을 판매해야 하기 때문이다.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가 2013년 외국계 제약영업 노동자 714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사회심리적 스트레스 조사에서 응답자의 50.4%가 고위험 스트레스군, 48.7%가 잠재적 스트레스군에 속했다. 우울 척도(CES-D) 측정에서는 무려 73.3%가 위험군에 포함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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