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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광주5.18은 민주화 운동인가요? 폭동인가요?
정보가 없는 사용자 조회수 17,719 작성일2013.04.06
우선 제가 역사 시간에 배운 내용은 민주화 운동이라고 배웠습니다.

하지만 요즘 제가 접하는 내용은 전혀 다른 내용이더군요..

정확히는 의견이 극명하게 상반 되어 혼란스럽네요 

광주사태를 주제로 더 나아가 지역으로 갈라지기도 하고.. 

요즘 5.18에 관해서 관심이 많은데 도대체 정답이 뭔가요? 

민주화 운동인가요? 폭동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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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개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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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ro****
영웅
국어 어원, 어휘, 한국사, 국어 맞춤법, 문법 분야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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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화 운동이 맞습니다

다른거 다 건너뛰고 제3자인 외국에서도 민주화사례로 인정하는데 왜 국민들이 부정하는지 이해가 잘 안되네요

이런말하면 저도 같은사람이지만 보통 폭동이라 말하는 사람들의 대다수가 지역 감정 유발하는 사람이 많더라고요

2013.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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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금한돈
지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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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답은 폭동이 맞습니다.

 

우리나라 교육중 5.18부분은 반쪽짜리만 배우신겁니다.

 

 민주화라 외치는 자들은 성역화 되어야 할 5.18을 더욱 성역화 하기 위해 자신들이 한 짓거리는 모두 감추고

 

미화하여 교육을 시킨겁니다.

 

어떻게 보면 반 사기성 교육이였다고 보시면 됩니다.

 

 당시 국내외적으로 혼란한 상태였다는 거 배우지 못했을겁니다.

 

그런 와중에 5월 16일 김대중이 최규하 정권에게 나가라고 하며 협박한 내용도 배우지 못했을것이며

 

 5월 15일 시위대에 의해 정경 5명이 버스로 깔아 버린 사건이 발생되었고 그 중 1명은 사망하고 나머지는 중경상을 입힌것도 배우지 못했을것이며

 

최규하에 의해 전국계엄으로 확대 실시된것을 전두환이 계엄선포한것 처럼 배웠을것이고 그렇게 안배웠다면 그나마 다행 입니다. 전두환이 한거로 배웠다면 이부분 사기입니다. 분명하게 최규하 대통령이 하였고 본인이 강압이나 그런거 없이 계엄선포 하였다고 말까지 하였습니다.

 

5.18시위도 불법이지만 처음부터 폭력시위 한거 배우지 못했으겁니다.

 폭력시위 말이 폭력시위지 돌멩이 하늘에서 날라와 보세요 그것도 수백개의 돌멩이가요 무시무시한겁니다.

그걸 얼굴이나 온몸으로 맞아 보십시요 상상가시나요?

미국에서도 시위할때 꼭 허가를 얻고나서 시위합니다.

그럼 폴리스 라인 정하여 평화적으로 시위하게 되고요.

그런데 평화적 시위에서 갑자기 폭력을 행사하면 그자리에서 경찰은 그자리에서 폭력행사한 자들은 어떠한 강압이라도 동원하여 구금 체포합니다. 때로는 총기를 사용하기도 합니다.

집단 폭력행위를 잡아들이지 방치한다면 사회의 기강이 무너지는 것이죠.

저들은 처음부터 저런 폭력을 행사한 자들입니다.

처음 시위부터 군인들 부상자가 속출하였고 감정적으로도 매우 상해 있었습니다.

 

최초의 희생자가 청각장애인 김경철씨라 합니다.

이부분도 사기 입니다. 5.18이후 처음 사망자는 맞습니다. 그런데 누가 죽였는지 모르는 사망자 입니다.

그리고 당시 저들 시위자중 그가 죽었다고 알고 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는 것이고요.

또 저 김경철씨는 군인이 병원으로 후송하였습니다.

군인에 의해 죽었는지 저들에 의해 죽었는지 모른는 사람을 군인이 죽였다는 식의 교육을 합니다. 이 부분 사기 입니다.

최초 정확한 사망자는 저들에 의해 버스로 깔려죽은 경찰병력 4명이 공식적인 최초의 사망자로 봐야 합니다.

 

영화 화려한 휴가를 보면 군인이 조준사격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당시 조준사격한적이 없습니다.

다만 저들에 의해 교도소 습격(6차례)시 습격하던 폭동들에게 조준사격하였습니다.

님도 생각이 있다면 10만이라는 인파가 있는곳에 몇백명이 조준사격한겁니다.

 21일을 말하는 것이고 그날 총기에 의해 사망한 사망자는 민간인 13명이고 카빈총에 의한 사망자는 9명 나머지 4명은 총기 불상입니다.

또 이날은 군인과 시위자간 거리가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총기에 의한 접전아니면 부상이나 사망이 나올수 없는 상황인데 민간인 총사망자 33명 20명이 자상(칼에의한 사망), 차량에 의한 사망입니다.

 칼에의한 죽음은 저들이 자기들끼리 죽인겁니다. 

카빈총에 의한 죽음도 폭도의 총에의해 폭도가 죽은겁니다.  

10만이란 인파 정말 많은 인파 입니다.

M16 하자루면 그 많은 인파에 조준사격이 아니라 연발로 쏴도 몇 백은 죽입니다.

 

 

 폭동이라 주장하는 저들에게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무엇이 진실인지 TV토론으로 끝장내자고요.

메이저 신문광고로 냈고, TV에서도 끝장토론 하자고 몇차례 말했습니다.

그런데 저들은 묵무 부답이였습니다.  

누가 거짓말 하는것 같습니까?

당당하지 못한 쪽이 거짓말하고 있다 보시면 그게 답입니다.

저들은 지금 님처럼 혼란스러워 하는 분들이 많은데도 나오지 않고 그냥 혼란스럽게 가고자 하는 파렴치한 자들입니다. 역사의식이 전혀 없는것이지요.

이런 식으로 후손들에게 물려주면 지금 이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의 얼굴이 무엇이 되겠습니까.

분명하게 할 수 있는 일을 어영부영 넘어 가려하는 민주화 운동이라 외치는 자들에게 경멸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2013.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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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5.18이 민주화운동인 이유

헌법재판소, 대법원, 정부, 국회 등 국가기관은 진상규명을 거쳐 5.18을 민주화운동이라고 인정했습니다. 교과서에서 5.18 민주화운동으로 실려있습니다. 새누리당 등 보수 세력도 민주화운동으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5.18민주화운동에 참여한 시민은 신군부의 반민주적 5.17 쿠데타에 맞섰고, 신군부의 과격진압에 희생됐기 때문입니다. 5.18은 정치적인 입장을 떠나서 범국가적으로 기념하죠.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중심으로 하는 신군부는 1980년 5월 초부터 학생 시위 과열을 명분으로 비상시국으로 몰아가 '비상계엄 전국확대', '국회 해산', '국보위 설치'를 골자로 하는 집권 시나리오에 따라 정권을 장악하려고 했습니다. 1980년 5월 15일 전두환의 지시를 받은 보안사령부는 김영삼, 김대중은 '국기문란', 김종필은 '부패혐의'로 잡아 가둔다는 계획도 세웠죠. 신군부의 집권 시나리오는 비상계엄 확대를 명분으로 군병력을 국회에 투입하고 정치인을 체포하여 국회를 해산하고, 신군부 인사로 채워진 국보위라는 기구를 설치하여 정부를 장악하겠다는 의도에서 세워졌으며, 실제로 신군부의 의도에 따라 정국 흐름이 진행됐죠.
 
 신군부는 1980년 5월 17일 전군주요지휘관회의를 열어 정부에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할 것을 강요했습니다. 정부는 군의 압력을 받고 비상계엄 전국확대을 선포했고, 신군부는 계엄 확대와 동시에 정치인 체포, 정치활동 금지, 국회 폐쇄 등 정치탄압을 감행했습니다. 그리고 이에 반발하는 시위가 일어날 것을 예상하여 사전에 강도높은 시위진압 훈련을 받은 공수부대를 서울, 대전, 광주 등 주요 도시로 파견했습니다. 5월 18일 광주에서 전남대 학생 600여명의 계엄확대 반대 시위가 발생했는데, 공수부대가 무자비하게 전남대 학생 시위를 진압하면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광주시민이 분노한 것이 발단이 되서 5.18 민주화운동이 일어났습니다. 5.18 민주화운동을 강경진압한 신군부는 1980년 5월27일 국보위를 설치하여 실질적인 정권장악을 완료했습니다.  
 
아래 링크는 5.18 민주화운동에 대한 국가기관의 조사결과입니다. 더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으시면 참고하세요.
 
(1)국방부 과거사위 5.18 보고서

 

http://pds23.egloos.com/pds/201205/26/27/12.12_5.17_5.18.pdf


http://dlps.nanet.go.kr/SearchDetailView.do?cn=MONO1200962222

 

(2)검찰의 5.18 조사결과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4046748

 

(3)5.18 대법원 판결문 

 

http://www.law.go.kr/%ED%8C%90%EB%A1%80/(96%EB%8F%843376)



2. 5.18왜곡이 틀린 이유

극우, 일베에서 5.18 왜곡 주장을 할 때마다 바로 반박할 수 있는 증거를 제시하도록 정리했습니다.

[주장 1] 5.18은 김대중 정권 때부터 민주화운동으로 불리게 되었다?

 

● 5.18은 1988년 초에 가동된 민주화합추진위원회를 거치면서 노태우 정부로부터 처음 광주민주화운동이라는 명칭을 공식 인정받았다. 1988년 11월부터 제13대 국회는 5.18광주민주화운동 진상조사특별위원회를 구성하고 청문회를 열어 진상규명에 나섰다.

http://media.daum.net/breakingnews/newsview?newsid=19930416164800533



● 1993년 5월 김영삼 전 대통령의 5.13 담화, 1995년 12월 5.18 특별법 제정, 1997년 4월 대법원의 5.18 진압 혐의 유죄판결 확정, 1997년 5월 정부의 5·18민주화운동기념일 제정을 통해 민주화운동이란 평가가 점차 확고해졌다.

http://terms.naver.com/entry.nhn?cid=200000000&docId=1209892&categoryId=200000431



[주장 2] 5.18 최초 사망자는 5월20일 밤에 사망한 경찰이다? 

 

● 5.18 최초 사망자는 1980년 5월19일 오전 3시 구타후유증으로 사망한 청각장애인 김경철이다. 5.18의 두번째 사망자는 19일 밤 10시 사망한 김안부다. 이를 뒷받침하는 사망진단서, 사망자 검시 자료가 있다. 

 

● 5.18 당시 국방부장관이었던 주영복은 1996년 5월6일 열린 12.12 5.18 사건 7차공판에서 공수부대원이 시위 진압하다 김경철이 최초로 사망했다는 소식을 5월19일 밤 들었다고 증언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4094030 

 

- 김경철의 사망자 검시 자료

http://i.imgur.com/7Iv8Wfm.jpg

http://i.imgur.com/sVLaaLU.png

- 김안부의 사망자 검시 자료

http://i.imgur.com/DVO907u.png

 

 

[주장 3] 광주시민이 먼저 무장해서 계엄군에 발포했다?

 

● 1995년 검찰, 2007년 국방부 과거사위 조사결과에 따르면 계엄군이 선제발포했다. 계엄군은 1980년 5월19일 오후 5시 광주고 부근, 5월20일 밤 11시 광주역 일대, 5월21일 오후 1시 전남도청 앞에서 발포하고, 금남로 주변 건물에 저격병을 배치해 시위대를 향해 조준사격을 가했다. 시민이 본격적으로 무장에 나선 시점은 21일 오후 1시 전남도청 앞에서 공수부대의 발포가 있은 뒤이다.

 

● (1995년 7월 검찰발표) 광주에서의 최초 발포는 5월19일 오후 5시께 광주고 부근에서 있었던 바 (중략) 20일 밤11시께 3공수여단이 광주역 일대에서 3공수여단장은 경계용 실탄을 예하대대에 전달하고 대대장은 이를 장교 위주로 분배해 자신들을 향해 돌진하는 차량을 향해 발포했으며 광주역으로 실탄을 전달하러 가던 특공지원조가 시위대와 마주쳐 진로가 막히자 위협사격을 하는 한편 (중략) 본격적으로 시위대가 무기탈취에 나선 것은 21일 오후 1시께 전남도청 앞에서 공수부대의 발포가 있은 후로 시위대는 광주 인근지역으로 진출, 화순, 나주 등 지방의 지.파출소와 화순광업소, 한국화약 등 방위산업체 등에서 대량의 무기와 실탄을 탈취했음.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3902648

 

● (2007년 7월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보고서) 당시 군수뇌부는 자위권 발동을 논의했다. 5월21일 수기로 작성된 문서에는 '전두환 각하: 초병에 대해 대해 난동시 군인복무규율에 의거 자위권 발동 강조'라고 돼있다. 5월21일 전남도청 앞에서 시위대가 계엄군을 향해 먼저 총격을 가했다는 주장을 입증할 만한 자료는 발견하지 못했다. 같은 날 오후 1시경 계엄군의 발포 후 계엄군에 의한 조준사격이 있었다. 계엄군이 광주관광호텔 옥상 등 주변 건물로 올라가 조준경이 달린 소총으로 시위대 맨 앞에 주동자를 향해 조준사격했다는 증언이 나왔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1706007

 


[주장 4] 5.18을 민주화운동이라고 평가할 이유가 없다?


● 5.18이 민주화운동으로 인정받고 있는 이유는 5.18항쟁 시기 시위에 참여한 광주시민이 신군부가 집권하기 위해 불법적으로 일으킨 5.17 비상계엄 확대조치에 맞섰고, 공수부대의 과격한 진압에 희생됐기 때문이다.

 

●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중심으로 하는 신군부는 1980년 5월 초부터 학생시위 과열을 명분으로 비상시국으로 몰아가 '비상계엄 전국확대', '국회 해산', '국가보위비상기구 설치'를 골자로 하는 집권 시나리오를 세우고 정권을 장악하려고 했다. 1980년 5월15일 전두환의 지시를 받은 보안사령부는 김영삼, 김대중은 '국기문란', 김종필은 '부패혐의'로 잡아 가둔다는 계획을 세웠다. 이러한 집권 시나리오와 정치인 체포 계획은 비상계엄 확대를 명분으로 군병력을 국회의사당에 투입하고 정치인을 체포하여 국회를 해산하고, 군 출신 인사로 채워진 국보위라는 기구를 설치하여 정부를 장악하겠다는 의도에서 세워졌으며, 실제로 신군부의 의도에 따라 정국 흐름이 진행됐다.

 

● 신군부는 1980년 5월17일 전군주요지휘관회의를 열어 정부에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할 것을 강요했다. 정부가 비상계엄을 선포하는 과정에서 군의 부당한 압력을 받았고, 헌법에 규정된 국회통보절차를 밟지 않은 채 국회가 계엄군에 의해 무력으로 봉쇄한 가운데 선포됐기 때문에 불법이다. 신군부는 계엄 확대와 동시에 정치인 체포, 정치활동 금지 선포, 국회의사당 폐쇄 등 정치탄압을 감행했다. 그리고 이에 반발하는 시위가 일어날 것을 예상하여 사전에 강도높은 시위진압 훈련을 받은 공수부대를 서울, 대전, 광주 등 주요 도시로 파견했다. 


● 1980년 5월18일 광주에서 전남대 학생 600여명의 계엄확대 반대 시위가 발생했는데, 공수부대가 무자비하게 전남대 학생이 일으킨 시위를 진압했다. 공수부대의 잔혹한 시위진압 광경을 지켜보던 광주시민이 분노하여 대거 시위에 참여한 것이 발단이 되어 5.18 민주화운동이 일어났다. 5.18 민주화운동을 강경진압한 신군부는 1980년 5월27일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를 설치하여 실질적으로 정권을 장악했다.  


-1996년 1월 5.18 사건 검찰발표 요약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4046748

-1997년 4월 5.18 사건 대법원 판결문 요지

http://media.daum.net/breakingnews/newsview?newsid=19970417161500243 



[주장 5]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판결이 존재하기 때문에 민주화운동이라고 부를 수 없다? 

 

●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은 2004년 1월29일 재심에서 무죄 판결이 내려졌다. 따라서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에 대한 1980년 판결은 취소가 되어 법적으로 무효다.


●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재심을 맡은 재판부는 '내란음모'에 대해 김 전 대통령이 국헌을 문란할 목적으로 음모했거나 회동한 사실이 없고, 단순 정치이념을 같이하는 지식인과 종교인들끼리 회동해 순수한 민주회복을 위한 의사표시의 방법으로서 학생운동을 통해 국민여론에 반영토록 시도한 것에 불과하다고 설명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 행위는 방법이나 실력으로 보아 국헌을 문란하게 할 아무런 위험성이 없었고 내란음모죄의 구성요건인 국헌문란의 목적과 범죄주체가 되는 집단이 특정되지 아니하는 등 공소는 부적법하다고 판결문을 통해 판시했다.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재심 무죄판결 기사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47&aid=0000041760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22&aid=0000021816

 


[주장 6] 민주화운동은 항상 평화적으로 해야 한다?


● 독립운동, 동학농민운동은 참여자가 무장했지만 운동이라고 부른다. 최근 아랍 국가에서 일어난 민주화 요구 시위에서 시위대가 무장을 했지만 민주화를 추구하는 사건으로 인정받고 있다. 운동이라는 단어는 '어떤 목적을 이루려는 노력'이라는 뜻으로 폭력 사용 여부와 무관하다.


● 비폭력적인 민주화운동이 바람직하다고 하나, 민주화운동이 일어났던 당시에 비폭력적으로 민주화운동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195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정부는 모든 시위를 불법으로 규정하고, 강경진압에 나섰기 때문이다. 


● 5.18 민주화운동 뿐만 아니라 4.19혁명, 6.3항쟁, 부마항쟁, 6월항쟁 등 다른 주요 민주화운동도 어느정도 폭력성을 띠었다. 예를 들어 4.19 혁명 시기 경찰이 발포하기 시작하자 시위대가 경찰서 무기고에서 들고 나온 무기로 무장하여 경찰과 총격전을 벌였다. 5.18 민주화운동 때 역시 계엄군이 발포하기 시작하니까 시민이 경찰서, 파출소 예비군 무기고에서 무기를 탈취하여 무장해서 맞섰던 것이다. 대한민국 역사에서 시민은 정당하지 못한 공권력이 폭력을 행사하는 정도만큼 대응하여 폭력을 행사했다.

 

-4.19 혁명 시기 시위대의 무장투쟁 사례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5060200209204008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5060400209204010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0042100209103002

 

 

[주장 7] 최규하 반대 구호가 있었기 때문에 최규하 퇴진 시위에 불과하다?

 

● 1980년 5월18일 이전 광주시민은 경찰의 경호를 받으면서 평화시위를 했다. 5월17일 밤 5.17 비상계엄 확대조치 선포를 기점으로 시위가 격렬하게 됐다. 광주시민은 누가, 어떤 의도로 비상계엄 확대조치를 내렸는지 정확하게 알지는 못 했지만 휴교령, 집회시위 금지로 기본권이 침해당했으며 군에 의한 정치인 체포나 시위진압 군대투입으로 정상적으로 민주화가 이뤄지지 않으리라고 예감했다. 실제로 일련의 조치를 신군부가 주도했다고 하더라도 표면적으로 보기에는 비상계엄은 정부가 선포했으므로 시위 도중 정부나 대통령을 규탄하는 구호가 충분히 나올 수 있었다.  


● 민주화라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항상 정치권 동향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학생운동권 세력은 사태의 근본적인 원흉이 전두환 보안사령관이라고 정확하게 파악했다. 이들이 배포한 유인물의 내용을 보면 최규하 정부 자체에 불만을 가지고 있다기 보다는, 최규하 정부 내에서 전두환 쿠데타 세력이 득세하기 때문에 정부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만약 신군부가 정부 내에서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았으면 굳이 시위대가 최규하를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전두환 쿠데타 세력을 규탄하는 민주시민회보 제10호

http://i.imgur.com/4nCEQaF.png

-껍데기 과도정부와 계엄당국을 규탄한다는 유인물

http://i.imgur.com/k9SQvfd.png

 


[주장 8] 시위대원이 장갑차를 조종했는데, 일반인이 어떻게 장갑차 조종을 할 수 있나?

 

● 5.18 당시 시민이 조종했던 장갑차는 KM900(피아트 CM6614)이다. KM900은 궤도 장갑차가 아니라 차륜식 장갑차이며, 핸들로 방향 조절을 할 수 있어 일반인이 조종하는 데 큰 어려움은 없다. 군에서도 KM900 운전병은 기갑이 아닌 수송 병과(2816 경장갑차 운전)로 분류된다. 1980년 5월20일을 기점으로 버스기사, 트럭기사 수백명이 차량시위를 벌이면서 시위에 참여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시위대의 KM900 조종이 불가능했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다.

 

 

[주장 9] 광주교도소가 습격당했다?

 

● 광주교도소는 광주-담양 국도와 호남고속도로 사이에 있으며, 두 도로의 옆에 바로 붙어있어 통행이 빈번한 교통요충지에 위치하고 있다. 

 

● 1980년 5월21일 19시 30분 계엄사령부는 전투교육사령부(전교사)에 광주시 외곽 도로망을 완전 차단하라는 지시(작전지시 80-5호)를 내렸다. 이때부터 광주시내로부터 철수한 계엄군은 광주의 모든 출입도로를 차단하는 외곽봉쇄작전을 수행했다. 그중 제3공수여단은 호남고속도로와 광주-담양 도로 사이에 위치한 광주교도소를 주둔지로 삼아 도로를 봉쇄했다. 제3공수여단은 교도소에서 500m~1km 떨어진 주변 도로 위에 바리케이드 설치하고, 무장여부와 관계없이 통행하는 차량에 무차별 발포했다. 따라서 시민은 도로통과는 물론 접근조차 제대로 못했다. 이런 상황을 군 측은 '교도소 습격'이라고 왜곡했던 것이다.

 

-광주교도소 사진 (가운데 운동장이 보이는 건물이 광주교도소)

http://i.imgur.com/3TYpVaK.jpg 


● (1980년 당시 한도희 광주교도소장의 증언) 시민군이 80년 당시 광주교도소를 습격했다는 계엄사의 발표는 사실이 아니다. 시민군이 교도소를 습격했다면 교도소 주변에 시체가 있어야지 어떻게 도로에 있을 수 있겠는가. 당시 교도소에는 3공수여단 병력이 중무장하고 있어서 교도소 습격이란 상상할 수도 없었고 계엄군이 시 인근 지역의 시위 확산을 막기 위해 무차별 발포한 것으로 알고 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3964241

 

● (1995년 12월 검찰 현장조사 결과) 광주교도소는 광주~담양 간 국도와 호남고속도로 사이에 위치, 시외곽으로 빠져나가려던 시민군과 계엄군 사이에 다수의 교전이 발생했다. 이 과정에서 시위와 무관한 시민들이 도로를 지나다 매복병사들로부터 사격을 받았다.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5122900329101009

 

● (2007년 7월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보고서 100쪽) 외곽도로 봉쇄작전 중 계엄군의 발포로 인해 가족과 함께 광주교도소 앞을 통과하던 차량, 아이들과 함께 광주를 떠나던 사람, 계엄군 주둔지역의 마을주민 등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쳤다. 

 

 

[주장 10] 어떻게 꼭꼭 숨겨져 있던 무기고 38개를 모조리 털어 무기를 탈취할 수 있었나?

 

● 1990년대 초 예비군 무기를 군부대로 이관하는 사업이 추진될 때까지 향방 무기는 경찰서, 파출소의 예비군 무기고에서 보관하고 있었고, 직장 무기는 직장 예비군이 있는 기업에서 보관하고 있었다. 전라남도의 경찰서, 파출소에 설치됐던 예비군 무기고만 해도 적어도 269개 이상이었으며, 5.18 민주화운동 도중 시위대에 의해 탈취된 38개 무기고는 전체 무기고 수에 비하면 일부분이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0013822

 

 

[주장 11] 시위대가 쓰던 카빈에 맞은 사망자가 계엄군이 쓰던 M16에 맞은 사망자보다 많다?

 

● 제5공화국의 국방부는 1982년 펴낸 '계엄사'를 통해 총상에 의한 사망자 88명이 폭도 자신들의 난동으로 죽었다고 규정했다. '계엄사'에 실린 이 내용은 총격에 의한 사망자 69%가 카빈에 맞아 사망했다는 표현으로 전환돼 언급되고 있다. 하지만 '계엄사'는 뒷받침할 근거를 전혀 제시하지 않았다.

 

● 현존하는 5.18 사망자에 대한 검시자료는 1980년 6월 초 민군 합동 조사를 통해 작성된 보안사의 '광주사태 검시참여보고', 광주지검의 '5.18관련 사망자 검시 내용', 광주시청의 '광주소요사태 사망자 조서'가 있다. 이 중에서 카빈에 의한 총상에 의한 사망자 수는 보안사 검시 자료에서 카빈 사망자 21명, 광주지검의 검시 자료에서 26명, 광주시청 검시 자료에서 12명이다. 세 자료에서 공통적으로 카빈에 의한 총상으로 분류된 사망자는 8명이다. 5.18 사망자 검시자료의 출처는 아래와 같다.

 

-보안사 검시자료 출처 :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 12.12 5.17 5.18 사건 조사결과보고서 중 참고자료 부분

-광주시청 검시자료 출처 : 국가기록원 광주사태사망자철

-광주지검 검시자료 출처 : 광주광역시 5.18 민주화운동자료총서 20권


 

[주장 12] 신원미상 시신이 12구이며, 신원미상 시신의 정체가 의심스럽다? 

 

● 2001년 광주광역시에서 실종자, 장기 가출자, 행방불명자 가족 282명의 유전자 대조작업을 벌여 신원미상 시신 11구 중에 6구의 신원을 확인했다. 그 결과 권호영(당시 16세)·김기운(17세)·김남석(18세)·김준동(16세)·양민석(20세)·최숙일(21세)씨 등 6명의 시신이 가족의 품으로 돌아갔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143&aid=0001949099


● 나머지 5구의 시신 중에서도 40세 가량의 남자, 4세 가량의 남자아이, 목포에서 비무장 상태로 차량 위에서 시위하다 추락해서 사망한 남성 등 적어도 3구는 불순세력과 연관짓기 어렵다.

http://media.daum.net/society/others/newsview?newsid=20130523084304765


-40세 가량으로 추정되는 남자의 검시자료

http://i.imgur.com/cIM7D4E.png

-목포에서 차량 시위 도중 추락사한 23세 가량으로 추정되는 남자의 검시자료

http://i.imgur.com/2U0atGT.png

-효덕동 뒷산에서 사망한 4살 가량으로 추정되는 남자아이의 검시자료

http://i.imgur.com/9xTOsfg.png 


● 사망자, 실종자가 수백명이 되는 대형참사에서 모든 시신의 신원을 확인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삼풍백화점 사건에서 신원미상 시신이 30구, 대구지하철 참사에서 신원미상 시신이 6구인채로 아직도 남아있다는 점을 비추어 보면, 5.18 민주화운동의 신원미상자는 다른 사건에 비해 전혀 많은 편이 아니다.

http://media.daum.net/society/others/newsview?newsid=20130204080211729

http://media.daum.net/society/people/newsview?newsid=20121103031007344

 

 

[주장 13] 다이너마이트는 누가, 왜 설치를 했는가?

 

● 5.18 당시 이성전을 비롯한 화순광업소 직원 13명은 계엄군이 광주에서 잔혹하게 시위를 진압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계엄군의 광주진입을 막아야 겠다는 마음에 화순광업소에 있는 폭약을 조립하여 5월21일 밤 전남도청에 있는 광주시민들에게 전달했다.

 

● 전남도청에서 폭약을 관리하던 신만식의 증언에 따르면 떡밥과 뇌관 결합 작업을 벌인 것은 사실이지만 마지막 과정으로 도화선을 연결하지 않아 실제로 폭발하지 않도록 주의를 했다고 한다. 시민군 모두가 폭약이 실제로 사용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고 한다.

http://cafe.naver.com/enature/21



[주장 14] 6.25유공자보다 5.18유공자 혜택이 더 많다?


● 6.25 유공자는 가족사망, 본인장애와 같은 피해사실이 있거나 보국훈장 이상 공훈기록이 있어 혜택이 많은 국가유공자, 참전했지만 피해사실이 없어 혜택이 덜한 참전유공자로 나눠진다. 5.18유공자는 단순히 시위에 참여했다고 지정되는 것이 아니라 가족사망, 본인장애, 구속 및 수감과 같은 피해사실이 있어야 유공자로 지정될 수 있다. 


● 같은 피해를 입었을 경우 6.25 유공자가 5.18 유공자보다 혜택이 좋다. 국가유공자와 달리 5.18 민주유공자는 매달 연금을 받지 않는다. 반면 국가유공자는 상이군경의 경우 매달 116만원~422만원, 전몰군경 유가족은 매달 48만원~143만원의 연금을 받고 있다. 국가유공자는 자녀 혹은 형제 1인에 한해 보충역 6개월 복무 병역혜택을 주지만 5.18민주유공자에게는 병역혜택이 전혀 없다.

 

● 6.25 국가유공자, 5.18 민주유공자, 6.25 참전유공자의 혜택을 비교하면 6.25 상이군경-6.25 전몰군경 유족-5.18부상자-5.18사망자 유족-5.18 관련 수감자-6.25참전유공자 순으로 많다고 할 수 있다. 5.18유공자 혜택이 더 많다는 오해는 피해사실이 존재하는 5.18민주유공자와 피해사실이 없는 6.25참전유공자를 비교하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다.

 

-6.25 국가유공자의 혜택 (국가보훈처 사이트)

http://www.mpva.go.kr/support/support124.asp

-5.18 민주유공자의 혜택 (국가보훈처 사이트)

http://www.mpva.go.kr/support/support143.asp

-6.25 참전유공자의 혜택 (국가보훈처 사이트)

http://www.mpva.go.kr/support/support133.asp

-6.25유공자, 5.18유공자의 혜택 비교표

http://i.imgur.com/8FhwF5P.png

 


[주장 15] 1991년 윤기권의 월북은 북한이 배후조종했다는 근거다? 

 

● 윤기권은 1962년 전북 정읍 출신으로, 1980년에는 광주 대동고등학교 학생이었다. 5.18의 충격과 고문후유증으로 정신질환을 앓다가 1991년 3월 영국의 북한 대사관을 통해 월북했다. 

 

● 윤기권은 5.18 당시 신원이 확실한 고등학생이었으므로 북한이 파견한 간첩이라고 보기 어렵다. 5.18 주역들의 집단 월북도 아니고, 단 한명이 월북했다고 5.18에 참여한 시민 20만여명 전부를 북한과 관련지어 매도할 수 없다.

http://altair.chonnam.ac.kr/~cnu518/board518/bbs/board.php?bo_table=sub6_03_01&wr_id=986

http://altair.chonnam.ac.kr/~cnu518/board518/bbs/board.php?bo_table=sub6_03_01&wr_id=987

 

 

[주장 16] 북한이 5.18을 광주인민봉기라고 부르고, 매년 5.18 기념식을 여는게 의심스럽다?

 

● 북한은 5.18민주화운동 뿐만 아니라 4.19혁명(남조선인민봉기), 6.3항쟁(남조선청년학생봉기), 6월항쟁(6월 인민항쟁), 부마항쟁(10월 민주항쟁) 등 남한의 주요 민주화운동을 모두 기념한다. 괄호 안은 북한에서 부르는 명칭이다.


-북한의 4.19혁명 기념식 기사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38&aid=0002065002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3232746

-북한의 부마항쟁 기념식 기사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4480395

-북한의 6월항쟁 기념식 기사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79&aid=0000165622

 

● 북한은 남한의 민주화운동을 반미투쟁이라고 왜곡하여 북한 주민에 대한 선전수단으로 삼는다. 북한에 있을 때 5.18 등 남한의 민주화운동을 반미투쟁으로 잘못 알고 있었던 탈북자들은 남한에 와서야 사실이 아니라는 점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http://www.rfa.org/korean/in_focus/nk_518-05182009134816.html

 

 

[주장 17] 5.18 북한군 특수부대 개입설을 주장하는 임천용 자유북한군인연합 대표의 증언이 있다?

 

● 북한 특수부대가 5.18에 개입했다는 임천용의 증언은 북한군의 침투인원, 침투경로, 퇴각경로, 귀환인원이 매번 달라지고 일관성이 없다. 또한 임천용의 주장을 뒷받침할만한 물증은 전혀 없다. 


-임천용의 인터뷰 발언 정리 표

http://i.imgur.com/5c7Kyt0.png

 

●  임천용은 2006년 8월 한국논단과 인터뷰에서 서해안 쪽으로 북한군 450명이 침투하고, 3분의 1이 귀환했다고 말했다. 특히 절반은 군복을 입고 계엄군 쪽에 침투하고, 절반은 시민군 쪽에서 활동했다고 말했다. 2006년 12월 기자회견에서는 북한군 특수부대 1개 대대가 침투해서, 3분의 2가 귀환했다는 주장이 나왔다. 2007년 임천용은 뉴스한국과 인터뷰에서 북한군 특수부대가 서해안과 동해안으로 각각 1개 대대씩 침투해서 절반이 귀환했다고 말했다. (※북한군 특수부대 1개 대대는 300명으로 구성됨)

 

 임천용은 2006년 한국논단의 인터뷰에서는 계엄령 중이라 육지가 봉쇄되어 북한군이 전부 서해안으로 들어왔다고 주장했으나, 2013년 TV조선 인터뷰에서는 북한군이 땅굴로 내려와서 육로로 이동하여 광주까지 내려왔다면서 자신의 예전 주장을 완전히 번복했다. 2007년 뉴스한국 인터뷰에서도 철수 과정에서 침투가 불가능하다고 한 육지를 통해 이동하여 북한군 60~70명이 강원도 중부전선을 타고 넘어갔다고 말한 바 있다.

 

 침투 방법도 각각 다르다. 2006년에는 오직 배를 타고 침투했다고 했지만, 2007년부터는 잠수함 침투를 언급했고, 특히 2013년 TV조선의 남침땅굴 특집방송 때부터 땅굴 침투를 언급하기 시작했다. 

 

-한국논단 인터뷰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368300

-2006년 기자회견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119&aid=0000017557

-뉴스한국 인터뷰

http://www.newshankuk.com/news/news_view.asp?articleno=k2007021120301185542

-TV조선 인터뷰

http://vod.tv.chosun.com/vod/index_vod_detail.cstv?prog_id=C201200117&epis_sub_cnt=233 

 

● 2006년 임천용이 북한군 사망자가 민주화 투사로 둔갑된 사례가 있다면서 한 사망자의 시체 사진을 제시했는데, 사진 속 인물은 1980년 5월22일 총에 맞아 쓰러진 외삼촌 손광식을 구하러 갔다가 화정동 국군통합병원 앞에서 사망한 임정식이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79&aid=0000125614



[주장 18] 탈북자 단체의 5.18 증언집 '화려한 사기극의 실체'는 신빙성이 있나?

 

● 자유북한군인연합 소속 탈북자들이 북한에 있을 때 5.18 당시 상황을 TV에서 생중계로 지켜봤다는 증언이 이 책의 포인트다.

 

● 이 책에서는 몇몇 탈북자가 북한에서 5.18 당시 광주 상황을 TV를 통해 생중계로 지켜봤다고 주장하는데, 1980년 기술로 송신소, 중계소 하나없이 광주에서 수백km 떨어진 평양에 생중계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 이 책에서는 몇몇 탈북자가 북한 TV에서 여자만 골라 도끼, 칼로 잔인하게 죽이는 장면을 보았다고 주장하는데, 5.18 민주화운동에서 사망한 여자는 11명에 불과하며, 모두 M16에 맞아 사망했다.

 

● 자유북한군인연합 소속 몇몇 탈북자는 북한 TV에서 전기톱으로 머리를 갈라 잔인하게 죽이는 장면을 보았다면서 한 시신의 사진을 제시했는데, 5.18 사망자 검시자료에 머리가 전기톱에 갈려 죽은 사람에 대한 기록은 없다. 머리에 총상을 입어 사망한 시신 사진을 가지고 왜곡한 것이다.

http://asegaew.egloos.com/3406357


● 2013년 5월15일 서울중앙지법은 5·18 광주민주화운동 때 김대중 전 대통령이 북한 김일성 주석과 짜고 북한 특수부대가 광주 시민을 학살했다는 글을 작성한 보수논객에게 사자명예훼손 유죄를 선고하면서 "탈북자의 수기(화려한 사기극의 실체) 내용은 출처나 증언자들이 불분명하고 내용이 검증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객관적인 근거도 없다"고 판시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86&aid=0002155661

 

 

[주장 19] 5.18 광주에 침투했다 사망한 북한군을 기리는 비석이 북한에 있다?

 

● 뉴데일리는 함경남도 청진시의 '인민군영웅들의 렬사 묘'라는 비석 사진을 게재하면서 5.18과 관련있다는 기사를 보도했다. 비석 사진에는 5.18과 관련된 어떠한 문구도 없지만, 뉴데일리는 김주호 박사라는 사람의 말을 인용해 비석이 5.18과 관련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사진 속의 '인민군영웅들의 렬사 묘'라는 비석은 우리나라의 현충탑처럼 북한에서 시군마다 하나씩은 있는 흔한 비석이다. 

 

북한의 베트남 전쟁 참전을 보도한 기사에 따르면, 북한의 노동신문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베트남전쟁에서 희생된 비행사들을 한시도 잊지 않으시다가 이국땅에 묻혀있는 그들을 조국에 데려다 인민군영웅 렬사묘에 안치하도록 하신데 대해 뜨겁게 회고했다"고 보도한 적이 있다. 인민군영웅 렬사묘는 6.25 전쟁에서 전사한 청진시 출신 북한군을 추모하는 비석이거나, 베트남 전쟁에서 사망한 북한군과 관련된 비석일 가능성도 높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79&aid=0002355393

 

● 김주호는 어떤 문건과 비석의 명단에 있는 사망자 명단을 비교해서 5.18에 침투했다 사망한 북한군 158명을 확인했다고 주장하는데, 정작 김주호는 자신이 본 문건이 무엇인지 정확히 밝히고 있지 않다. 비석과 5.18이 관련이 있다는 것을 확실히 입증하기 위해서 김주호는 자신이 본 문건을 공개하고 검증받아야 한다.  


● 국정원은 함경남도 청진에 있는 비석과 5.18과의 관련성을 부인했다. 국정원 고위 관계자는 "북한 정보원을 통해 현장조사를 했지만 묘비 속 이름들과 광주민주화운동을 연결 지을 증거를 찾지 못했다"며 "특수부대원의 이름을 나열하고 특수임무를 공개하는 것도 상식에 맞지 않다"고 말했다. 

http://media.daum.net/foreign/others/newsview?newsid=20130523220310255



[주장 20] 황장엽이 5.18에 북한이 개입했다고 쓴 메모가 있다?

 

● 2013년 4월 김용삼 전 월간조선 기자는 월간조선, TV조선을 통해 황장엽이 남긴 메모에 '광주학생문제는 북의 공명주의자들이 책임전가한 일이다'는 구절이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김용삼은 해당 구절이 있는 메모를 공개하지 않았고, 언론보도에서도 그 구절을 부각시킨 사진은 없었다. 확실한 물증도 없으며, 제3자를 거친 전언인 이상 황장엽의 메모에서 5.18을 언급하는 구절이 정말 존재하는지 여부는 불확실하다.


● 황장엽은 2007년 10월15일 자유북한방송에서 김일성은 5.18에 편승하여 북한 정권에 유리하게 만들자는 의견을 거부했다고 직접 증언했다. 황장엽은 "지금까지 미군이 주둔하고 있었기 때문에 전쟁을 못 일으켰습니다. 김일성도 늘 그랬습니다. '지금은 안돼'라고 말입니다. 유리할 때가 광주 폭동 때였는데도 자꾸 이야기 해도 그것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그렇게 하더라도 실패할 것이 뻔했기 때문이었습니다."라고 말했다. 만약 북한이 사전에 북한군을 투입할 계획을 세웠거나 사건 발생후 긴급하게 광주로 북한군을 보냈다면 김일성이 저런 식의 반응을 보였을 리가 없다. 

http://www.fnkradio.com/board.php?board=fnkradiob201&page=4&command=body&no=119

 


[주장 21] 5.18 시기 광주에 직접침투한 북한군인의 증언이 있다?


● 김명국이라는 가명을 쓰는 한 탈북자에 따르면 김명국은 1980년 5월19일 오후 평양 부근에서 출발해 배를 타고 21일 새벽에 광주 인근 바닷가에 도착했다고 한다. 이후 이들은 광주 시민군 행세를 했으며 27일 오전 9시 상부로부터 철수 명령을 받고 후퇴하면서 남한 특전사 3명을 직접 사살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1980년 5월27일 상황을 기록한 계엄군 작전일지를 살펴보면 사실과 전혀 다르다. 진압부대로 투입된 육군 보병 제20사단 및 이에 배속된 공수여단의 진압작전기록에는 27일 새벽 계엄군이 광주 재진입 작전을 실시해 새벽 5시 20분 전남도청을, 새벽 6시 20분 YMCA 건물을 점령하고 무장 시위대를 체포하면서 5·18 민주화운동 진압을 완료했다고 적혀있다. 5월27일 계엄군 사망자는 2명이었으며, 새벽 6시 30분 이후에는 전투 기록이 전혀 없다.

http://media.daum.net/politics/others/newsview?newsid=20130518164205737


● 김명국에 따르면, 북한 특수부대는 5월27일 전라남도에서 출발해 경상남도와 경상북도 문경을 거쳐 태백 산맥을 따라 5월 30일에 강원도에 위치한 휴전선에 도착했다고 한다. 계엄령이 내려져 검문, 경계가 심한 상황에서 북한 특수부대가 지리도 제대로 모르는 한반도 남쪽을 전라남도-경상남도-경상북도(문경 세재)-강원도 순으로 돌아서 단 3일 안에 휴전선까지 간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http://mirror.enha.kr/wiki/5.18%20%EC%97%AD%EC%82%AC%EC%99%9C%EA%B3%A1/%EC%B1%84%EB%84%90A


 

[주장 22] 5.18 당시 북한군이 활동했다는 것은 북한 사람, 탈북자 사이에서 상식이다?

 

● 인민군 출신 탈북자 단체인 탈북군인협회 회장은 5.18 북한군 침투설을 제기하는 자유북한군인연합에 대해 "5.18 광주에 북한특수부대가 투입되었다는 주장은 현실과 맞지 않다."고 비판한 바 있다. 

http://www.dailynk.com/korean/read.php?cataId=nk06100&num=53887

 

● 북한군 특수부대에서 사관장 계급으로 복무했던 한 탈북자는 “특수부대 병력이 600명이나 내려왔다면 그것은 게릴라 작전이 아니라 전면전에 해당된다”며 “한 도시에서 일어난 사건에 특수부대 군인들을 대거 보내는 것은 상식적으로 말이 안된다”고 잘라말했다. 그는 “소문에 불과한 얘기를 증거나 확인 없이 그대로 전달하면서 거짓이 진실이 됐다”고 평가했다. 20년간 국가보위부와 정찰국 장교로 복무한 한 탈북자는 “북한군이 만약 5·18 당시 개입했다가 북한에 돌아왔다 하더라도 해당 군인들이 전역할 때는 작전에 대해 비밀에 부치는 서약서를 쓴다”며 “더구나 대대급 규모의 작전이었다면 처음부터 극비리에 진행되기 때문에 소문이 날 수가 없다”고 말했다. 북한재향군인협회는 “상당수 회원들이 북한개입설을 허황된 발언으로 판단하고 있다”며 “더 이상 광주민주화운동 희생자들에게 상처를 입혀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다”고 밝혔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143&aid=0002117551

 

2014.0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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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자들은 항쟁이라는말을 더 적절하게 보는게 많은 듯 한데, 폭동이나 아니다는 갈리지 않습니다. 요즘 나타나는 극우들이 조작된 팩트로 거짓말하는거지요.

일단 전두환은 12.12 쿠데타, 5.17 쿠데타를 벌였으니 반란군입니다.
1심부터 대법원까지 전부 쿠데타라 판결내렸습니다.
http://blog.naver.com/rapid81/120187464157
http://blog.naver.com/rapid81/120187464378
판결문 내용입니다.

5.18 광주민중항쟁이 일어난건 5.17 전국비상계엄때문에 여기엔 조금도 정당한게 없습니다.

첫번째는 북괴남침설인데, 이거 과장이고 조작이라는게 밝혀졌습니다.
 당시 육국본부 정보참모부과 당시 미군 양쪽다 아무 근거가 없다고했습니다.
그리고 정작 북괴남침설의 출처인 곳에선 그런 말 한적 없다고 말해서 조작인 것도 밝혀졌죠.

두번째는 당시 국무회의 하기전 무장군인들이 중앙청에 진입했고 전화선을 끊고 공무원들을 쫒아냈습니다.
무장군인들이 중앙청에 진입한건 쿠데타란 근거가 없다쳐도 전화선을 끊고 공무원들을 쫒아낸건 반박할께 없죠.

그리고 당시 정치활동금지조치를 내렸는데 최규하 대통령에게 허락을 받은게 아닙니다.

그리고 5.17 비상계엄을 내린 뒤 공수부대는 학교에서도 아무것도 모르고 공부하던 대학생들을 구타한후 연행합니다.
여기서 중요한건 계엄령 때는 군사관련으로 긴급상황이 아닐경우 영장없이 구속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위에 말했지만 북과남침설은 과장과 조작입니다. 다시말해 이 연행을 불법입니다.
불법연행을 하자 학생들이 돌을 던지면서 시위를 한겁니다.
그리고 충돌한 후 학생들은 금남로 가서 시위를 합니다.

공수부대는 시위를 진압하러 금남로로 오는데. 문제는 공수부대는 시위대던 일반시민이던 구별도 없이 체포명령을 내리고 구타를 하고 불법연행을 했다는겁니다.

거리에 있는 사람 모두 체포하라고 했으며 그냥 지니가던 사람들을 대학생들이라 판단해 끝까지 쫒아가서 구타후 불법연행했고, 시민들이 출판사로 도망가자 그 출판사직원과 도망간 시민을 때려패서 불법연행 한적도 있고, 시민들을 태우던 택시기사나 신혼부부가 탄 차를 향해 공격을 해댔으며 시위나 전남대와 관련없는 대학생(5.18에 시위했던 대학생들은 보통 전남대쪽이였습니다.)들도 무자비하게 구타한후 역시 불법연행했습니다. 5월 18~19일동안 김경철씨와 김안부씨가 사망했습니다.

당시 무차별 구타, 무차별 불법연행은 이 논문을 참고해보세요.

가끔 김경철 씨가 계엄군에게 타박사 당했다는걸 인정 안 하시는분들이 있던데
http://tesada.egloos.com/2941900 당시 보안사 내부에서 작성한 보고에도 계엄군에게 사망했다고 적어있고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4094030 당시 국방부 장관도 당일날 보고받았습니다.

이런 무자비한 구타와 무차별 구타, 그리고 불법연행과 무차별 불법연행에 민중들이 분노한겁니다. 민주화운동은 방향이었고 정확히는 '계엄군의 폭력에 성난 민중들이 민주화운동을 방향으로 폭력을 휘두르는 누구(전두환, 계엄군)를 향해 분노를 터트린'겁니다.

 5.18을 왜곡하시는분들도 있는데 그거에 대한 반박은 이것들을 참고해주세요.
http://blog.naver.com/rapid81/120173046911
http://blog.naver.com/chiyahn/20171304853

2013.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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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마 그럴 리가 있습니까...?

 

 

 

총정리&반박)광주 민주화운동인 이유 총정리

5.18은 민주화운동이 맞습니다

12.12사태부터 아셔야합니다.

12.12사태는 반란입니다.

하물며 박정희의 5.16쿠데타조차 '반란'은 아닙니다.무력으로 합법정권을 뒤엎기는 했어도

2년간의 군정을 국민들에게 동의 받았으며 2년뒤에 국민들의 지지로 대통령이 됬으니 어쨋든 약속을 지킨겁니다.

나중에 문제가된게 3선개헌 유신헌법이지오히려 5.16쿠데타는 그저 쿠데타입니다.

하지만 12.12사태는 국가적인 반란입니다.

박정희를 이어서 최규하가 임시로 대통령직을 하고있었고 임시적으로 비상계엄령을 내리고

일정시간이 지나면 민주적으로 선거를 하여 정권을 이양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이때 다짜고짜 군대 끌고와서 이 나라를 맘대로 먹은게 전두환이고 12.12사태입니다.

국가반란으로 규정됬고 그로인해 사형선고도 받았습니다.


이런상황에서 결코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가 제대로된 정통적인 공권력을 가졌다 보기 힘듭니다.

불법적인 권력입니다.

따라서 당연히 전국적으로 전두환을 반대하는 데모가 일어났습니다.

전두환은 이들을 어떻게 할 권리가 없었습니다.

5.18때 북한이 개입했냐 안했냐 시민이 먼저 경찰을 떄렸냐를 떠나서

전두환이 경찰,군대를 동원하는것조차 일단 불법입니다.


폭동에 대하여..

폭동이라는 단어는 매우 모호합니다.

폭동의 정확한 의미는 조직되지않는 집단이 일으킨 소요로 엄밀히말하면 왠만한 데모,시위같은것도 폭동이라고 부를수도있습니다만

폭동이라는 단어가 부정적인 뜻을 담고있습니다. 인류역사를 바꿔논 프랑스혁명도 어찌보면 폭동 이지만

루이16세가 프랑스혁명이 일어났다는 소문을 듣고 '폭동인가?'라고 물어봤지만 라 로슈푸코 리앙쿠르 공작은

'폐하 폭동이 아니라 혁명입니다'라고 답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어느나라에서나 riot,폭동이라는 단어가 부정적으로 쓰였다는것이 드러납니다.
순수한 단어뜻으로는 그렇게 나쁜뜻이 아닙니다.
한자만 봐도 폭동은 봉기와 비슷한 말입니다. 하지만 폭동과 다르게 봉기는 좋은뜻으로 쓰입니다.

하지만 현재 우리가 말하는 폭동은 '조직되지 않은 집단이 정당하지 않게 폭력을 사용함'이겠지요.



5.18이 폭동일수도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신군부가 폭동 진압했으니 잘했다~고 말할수도없는것이죠.

가정을 해봅시다.

1.시민들이 멋대로 경찰과 군인을 죽였을경우

2.북한군이 개입하고 선동하여 국기를 뒤엎으려 한 경우

3.교과서에 나온 내용...

1,2의 가정으로 볼때 5.18폭동,사태라는 단어가 적합합니다.

하지만 그래도 신군부는 잘못한것입니다.

시민들이 먼저 멋대로 경찰과 군인을 죽이고 소란을 폈다 하더라도 지나친 과잉진압입니다.

죽은사람과 실종자는 어마어마합니다.

앞서말씀드렸듯이 전두환의 신군부는 불법정부입니다. 합법정부가 폭동이라 쳐도 저런식으로 진압하면 난리납니다.

하물며 군대동원도 못하는 불법정부가 그런식으로 탱크와 공수부대를 동원해서 진압했다면 오히려 신군부가 더 잘못입니다.

만약 북한군이 개입했다고 칩시다. 그래도 신군부는 잘못입니다.

비상계엄령 내리고 외국인출입도 제한한 마당에 겨우 북한군 하나 내려오는것도 못막았습니다.

국가를 위기에 빠트릴뻔한 전두환의 잘못입니다.
어쩔수없이 빨갱이들을 진압했어야 한다고 쳐도 빨갱이들뿐만 아니라 시민들까지 무참하게 죽였습니다.
시민들이 빨갱이들에게 선동당하게 막지도 못하고 선동당하니깐 죽여버렸다?
더 나쁜새끼죠.


그런데 문제는 1,2의 주장이 근거가 없다는것입니다.

죽은 시체를 봐도 전경과 군인,공수부대의 시체는 손에 꼽을 정도입니다. 최초사망자또한 장애인 대학생으로 밝혀졌고요.

전두환에게 협박당하고 돈먹은 전문가들이 처음에는 시민군이 쓰던 카빈소총 총알이 더 많이 박혔다고 구라쳤으나 나중에 다시 밝혀졌습니다.

군인들이 쓰던 M16으로 대부분의 사람이 죽었다고요.

어떻게 시민들이 무기를 그렇게 잘 다루고 4시간만에 무기고를 터는게 가능하냐고 이것은 조직적으로 누군가가 선동했다고 하지요.

오히려 용어상으로 조직적이면 폭동이 아닙니다. 불법신군부를 무너뜨리려는 민중의 거룩한 저항입니다.
수꼴들이여 자폭하지 맙시다.

그리고 경찰서 위치야 동네사람들이 다알텐데 무기고 4시간만에 터는거 곰곰히 생각해보면 그리 어렵지 않은데다가

대한민국남자 대부분이 군대를 갔다오는걸 감안할때 총 잘다루는것도 무리가 아니죠.

결국 우기는게 북한개입설입니다.

이거면 문제가 있어도 전두환이의 입장이 약간 덜 난감해집니다. 과잉진압이지만 나라 위급해질뻔한걸 막았으니깐요.

근데 이것도 근거가 없습니다.

5.18을 북한이 기념한다고 하죠?

북한은 남한에서 일어난 모든 민중항쟁을 기념합니다. 4.19혁명 6.10항쟁 부마항쟁 등등..

그리고 진짜 5.18을 북한이 개입한거라치면 그거 숨길라고 기념 안하죠. 등신입니까?

어이없는건 시체중에서 신원미확인자가 손에 꼽을정도고 대부분이 시민이고 일부 군인이라는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이런상황에서 시체몇기는 신원미확인자가 나타나는건 당연한것)

북한군이 개입했고 공수부대하고 한판 붙었으면 적어도 공수부대나 북한군이나 시체가 있어야할것아닙니까?

거기다가 북한군이 내려오기도 사실상 불가능한 일입니다.

전국에 비상계엄령이 내려졌습니다. 아무리 능력좋은놈들이라도 어떻게 뚫습니까?

그리고 많고많은 동네중에 하필이면 광주일까요? 지금이나 되니깐 광주가 좀 큰 도시지 30년전 광주는 그리 큰 도시도 아니었고 이점도 없었습니다.

거기다가 광주는 미군부대가 주둔하고있었는데 미군부대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죠. 비상계엄 뚫고 내려온 물건(?)들을 미군부대가 가만히 나뒀는데

전두환이는 북한군이 내려온걸 감지하고 공수부대를 보냈다?

전두환은 슈퍼맨이나 되나봅니다.

이 슈퍼맨인 전두환이가 시민들 그렇게 학살해놓고서는 빨갱이들을 하나도 못잡았습니다.

5.18이후 신군부가 간첩잡을라고 이짓을 했습니다.

1980년 5월 21일 날 오전 8시부로 전라남도 지역에 진돗개 하나가 발령이 됐다.

5월 23일 저녁 전 해양경찰에 해안경계태세 강화지시가 떨어졌다.

전남 일대 전 해안에는 31사단 병력의 이 부대는 대간첩 침투작전 부대 3개 연대가 경계를 했는데,

93연대가 목표지역 해안, 95연대가 고흥 여수 지역 해안, 96연대가 무안 영광 지역 해안경계를 했다.

광주에서 화순으로 빠지는 길은 공수부대 7사단과 11사단이,

나주와 목포, 영광으로 가는 길은 20사단이,

담양 쪽으로 빠져나가는 길에는 3사단이 투입돼 광주 외곽을 전부 막고 있었으며 31일에는 해안까지 경계가 강화됐다.

정리해보죠.

북한특수부대가 비상계엄을 뚫고 그 많고 많은 도시중에 광주로 도착-시민을 선동함-광주옆동네 미군부대는 븅신같이 이것도모름-근데 전두환은 어떻게 알았는지 광주로 공수부대 투입해서 빨갱이잡는다고 시민들까지 학살함-북한특수부대는 시체하나 안남기고 광주 빠져나감-전라남도 간첩들 잡는다고 철통포위-이렇게 쇼하는데 정보력 더쩌는 미군은 가만히 있음-간첩잡는다고 개지랄 다떨었는데 간첩들은 북한으로 아무일 없다는듯 흔적도없이 귀화함


판타지소설을 쓰고계십니다.

이 판타지소설을 쓸정도로 북한 특수부대가 개쩌는애들이라고 칩시다.

이정도 쩌는애들이라면 북한에서도 함부로 못움직이는 애들일테고 이정도 주도적이려면 김일성정도거물이 움직여야하겠지요?

하지만 당시 김일성은 루마니아 방문중이었습니다. 이런 엄청난 특수부대 보낼정도로 중요한 작전에 루마니아 방문중?

아실분은 아시다시피 김일성이는 어느나라 방문할때는 수뇌부,정부요직 다 데려갑니다. 반란을 방지하기 위함이라나....

80년대 동유럽 지도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그렇습니다.

수뇌부,정부요직도 없이 특수부대 스스로 판타지같은 일을 했다는게 말이나 될까요?

무슨 북한은 도라에몽의 도구라도 있는걸까요?


그 외의 반박

원래 폭동이었는데 김대중,노무현때 명칭이 바뀐것이다. 김대중,노무현은 고사하고 김영삼때도 아닌 노태우때 이미 정식명칭은 5.18민주화운동이었습니다.
http://archives.kdemo.or.kr/PhotoView?pPhotoId=00755073


5.18때 김대중 석방이라는 요구가 있었다. 그냥 김대중 하나 살릴라고 일으킨거다.-부마항쟁도 김영상 석방이 원인이었다.

그리고 김대중 좋아하냐 싫어하냐를 따지지 않고 일단 멀쩡한 정치인 잡아다논거 석방하라는게 뭐가 잘못된건지 모르겠다.

탈북자단체의 증언이 있다.북한이 븅도 아니고 그런 국가기밀을 그런애들한테 알려주겠냐? 그리고 인터뷰 요청은 왜 안받아들이냐.

신상 공개도 필요없고 최소한 모자이크 해줄테니깐 얼굴까고 인터뷰좀 하라는데 그것도 안받아주고 카더라~ 하면서 우기면 뭐가 되냐?

'내가 그 특수부대였음'해도 못믿을판에..

지만원의 판결로 인해서 5.18을 폭동이라고 불러도된다? http://pds25.egloos.com/pds/201212/30/07/2010____51.pdf

판결문이나 보고 반성하시고요. 지만원 소송은 전적으로 명예훼손에 관련된 소송입니다.
오히려 96년 대법원판결에서 5.18은 민주화운동으로 종결됬습니다.


최근 인터넷에서 나돌고 있는 유언비어들과 터무니 없는 주장들을 정리해봤습니다.

대법원에서는 이미 5·17쿠데타를 일으킨 전두환을 내란죄(폭동죄) 및 반란죄로
사형 선고를 내린 바 있습니다. 폭도는 전두환입니다.
폭도에게 맞서 싸운 사람들이 폭도라는 주장만큼 황당한 주장이 어딨습니까.



* 5.18을 폭동이라고할때 하는주장 list
1. 시민군의 무기 사용
1.01 계엄군이 총기를 발포하기 전 시민군이 먼저 총을 쐈다. 이를 증명하는 힌츠페터의 영상이 있다.
1.02 시민군이 조직적으로 군사적 기밀 장소인 무기고 습격을 짧은 시간 내에 46곳이나 한 것은 당시 광주에 불순분자가 배후로 없었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1.03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이 장갑차를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는 없었다.
1.04 신원미상의 시체가 있다는 것은 5·18민주화운동 당시 북한의 소행이 있었음을 증명한다.
1.05 시민군은 도청에 TNT를 설치함으로써 대한민국을 전복하려 했다.
1.06 시민 측에서 의도적인 버스 돌격으로 경찰이 먼저 사망했다.
1.07 5·18민주화운동 당시 사망자의 70% 가량이 시민군이 사용한 총기에 의해 사망했다.
1.08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이 중화기와 무전기로 중무장했던 것은 광주에 불순분자가 배후로 없었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1.09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이 복면을 사용한 것은 이들이 남파 간첩이라는 것을 증명한다.
1.10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은 북한군의 무기였던 AK 소총 및 파파샤를 사용했다.
1.11 시민군에게 "조선인민군" 마크가 있는 실탄 사진이 있다.
1.12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은 시민들에게 총기를 무작위로 배포함으로써 극렬한 사회 분란을 조장했다.

2. 북침설
2.01 북한에서 5·18민주화운동을 기념한다는 것은 당시 북한이 광주에 간첩을 보낸 것을 의미한다.
2.02 북침설에 대한 증언이 있다(임천용 및 자유북한군인연합).
2.03 5·18민주화운동 당시 일어난 간첩 신고에 대한 기사가 있다는 것은 5·18민주화운동에 북한이 개입했음을 증명한다(이창용).
2.04 5·18민주화운동 당시 일어난 간첩 신고에 대한 기사가 있다는 것은 5·18민주화운동에 북한이 개입했음을 증명한다(전옥주 및 차명숙).
2.05 인민군영웅렬사묘(인민군 영웅들의 렬사묘)에는 5·18민주화운동에 참여한 군인들을 기념하는 비석이 있다.
2.06 5·18민주화운동 당시 북한군은 잠수함을 통해 광주에 침입해 있었다.
2.07 윤기권이 5·18민주화운동 유공자임에도 불구하고 월북했다는 것은 이들이 간첩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2.08 5·18민주화운동 당시 배후세력이 있다는 사실을 신군부가 발표한 바 있다.
2.09 5·18민주화운동 당시 북한에서는 5·18민주화운동을 생중계했다.
2.10 (1.10) 시민군은 당시 북한군의 무기였던 AK 소총 및 파파샤를 사용했다.
2.11 (1.11) 시민군에게 "조선인민군" 마크가 있는 실탄 사진이 있다.
2.12 1985년 북한에서 발행된 '광주의 분노'라는 서적은 5·18민주화운동에 북한이 개입했음을 증명한다.

3. 기타
3.01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들이 요구한 것은 민주화가 아닌 김대중의 석방에 불과했다.
3.02 어린이/임산부/학생에게도 총을 쐈다, 계엄군이 대검을 사용했다는 유언비어가 나돌았다.
3.03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이 조직적으로 교도소를 습격했다.
3.04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들이 파출소 등의 공공시설을 파괴했으므로 5·18민주화운동은 폭동이다.
3.05 고등법원은 지만원이 받은 소송에서 5·18민주화운동은 폭동이라는 판결을 내린 바 있다.
3.06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은 절도를 자행했다.
3.07 80년대에 미국은 5·18민주화운동을 폭동으로 규정했으므로 5·18민주화운동은 폭동이다.
3.08 5·18민주화운동 진압 당시 대통령은 최규하였으므로 5·18민주화운동과 전두환은 아무런 관련이 없다.
3.09 5·18민주화운동은 민주화에 대한 공로가 없으므로 민주화 운동이 아니다.
3.10 5·18민주화운동 당시에 유언비어가 나돌았으므로 5·18민주화운동은 폭동이다.
3.11 계엄 선포 당시의 사회 상황을 고려하면, 5·17비상계엄전국확대(5·17 쿠데타)는 정당화될 수 있다.
3.12 전두환은 이후에 사면을 받았으므로 내란죄와 무관하다.
3.13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들이 무력을 사용한 건 사실이므로 5·18민주화운동은 폭동으로 불려도 상관없다.
3.14 5·18민주화운동이라는 명칭은 김대중 정부가 내린 편파적인 명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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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민군의 무기 사용
1.01 계엄군이 총기를 발포하기 전 시민군이 먼저 총을 쐈다. 이를 증명하는 힌츠페터의 영상이 있다.
출처 : http://study21.org/518/photo/5-19.htm
http://www.study21.org/518/video/5-20.htm

이같은 유언비어의 퍼져나간 가장 큰 원인은 바로 역사학도라는 한 극우인사의 황당한 주장에 있습니다.

역사학도에 따르면, 위 사진은 계엄군이 발포하기 전날인 20일 힌츠페터가 광주에서 촬영한 영상(http://www.youtube.com/watch?v=Rq_qa1HhnBo)에서 가져온 캡쳐 사진입니다. 사실 역사학도는 힌츠페터가 "조총련의 간계에 말려들어 조총련 충복 노룻"을 했다며 영상 촬영 날짜의 신뢰성을 스스로 비하하고 있지만, 이를 떠나서 영상 어디에도 해당 영상이 20일에 촬영됐다는 코멘트는 보이지 않습니다. 힌츠페터는 5월 19일에 광주로 내려갔다가, 도쿄에 돌아간 뒤 5월 23일에 다시 광주로 돌아가 광주 시민들을 촬영했습니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28&aid=0000034715) 즉, 해당 영상은 광주시민들이 무장한 뒤인 23일에 촬영된 영상입니다. 20일에 촬영됐다는 주장은 단순히 그가 19일에 광주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내세우는 황당한 추측일 뿐입니다.

또한 역사학도는 위 사진이 5월 19~20일 사이의 사진이라는 단서가 "[광주 시민]이 이미 5월 19일에 나주경찰서 무기고를 습격하여 무기를 탈취"했기 때문이라 주장하고 있지만 이 역시 근거 없는 황당한 주장입니다. 1995년 완료된 5.18사건 의문점에 대한 검찰수사 결과에 따르면(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3902648), 시위대가 본격적으로 무기탈취에 나서 나주 경찰소의 무기 가져간 것은 21일 오후 1시께 전남도청 앞에서 있었던 공수부대의 발포 다음입니다.

실제로 총을 먼저 발사한 건 계엄군입니다. 5월 19일, 계엄군 장갑차가 시위 군중에게 포위되자 계엄군은 시민을 향해 발포해 당시 조대부고에 다니던 학생이 총상을 입었습니다. 이를 보고 군의 정당방위라고 주장하시는 분들도 있지만 5월 20일 밤 11시경 광주역을 지키고 있던 공수부대와 시위대의 공방전이 격렬해지고 시위대가 차량을 앞세워 군의 저지선을 돌파하려하자 계엄군이 또다시 발포를 했습니다. 이 때 비무장 시민 두 명이 죽었다는 것은 당시 계엄군의 총기 사용이 정당방위로 볼 수 없는 까닭입니다. 뿐만 아니라 5월 21일 13시 공수부대가 금남로에서 시민들에게 일제히 사격을 시작했습니다. 시민들 스스로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었던 이 시점 이후로 광주 시민들은 총기로 무장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총기 사용 이전에, 청각 장애인 김경철 씨가 계엄군에 의해 5월 19일 사망한 사례가 있습니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3273631). 즉, 최초의 사망자는 시민입니다.

1.02 시민군이 조직적으로 군사적 기밀 장소인 무기고를 짧은 시간 내에 46곳이나 습격을 한 것은 당시 광주에 불순분자가 배후로 없었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출처 : http://www.bignews.co.kr/news/article.html?no=232312

지만원에 의해 퍼지게 된 해괴한 논리입니다.

1995년 완료된 5.18사건 의문점에 대한 검찰수사 결과입니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3902648).
"광주에서 시위대에 의한 무기탈취는 19일 오후 3시 15분께 시위대가 기독교방송국을 점거하는 과정에서 31사단 경계병력으로부터 M16소총 1정을 탈취한 것이 처음으로 이 소총은 곧 회수됐으며 그후 20일 밤 11시께 광주세무서 방화, 점거시 지하실 무기고에서 칼빈 17정을 탈취했고 21일 오후 1시께 광산 하남파출소에서 칼빈 9정이 탈취됐으나 시위대가 본격적으로 무기탈취에 나선 것은 21일 오후 1시께 전남도청 앞에서 공수부대의 발포가 있은 후로 시위대는 광주 인근지역으로 진출, 화순,나주 등 지방의 지.파출소와 화순광업소, 한국화약 등 방위산업체 등에서 대량의 무기와 실탄을 탈취했음."
즉 당시 광주 시민들은 경찰서, 파출소의 예비군 무기고, 또는 근처 방위 상업체에서 무기를 탈취했다는 것입니다. 특히, 90년대 초 예비군 무기를 군부대로 이관하는 사업이 추진될 때까지 향방 무기는 경찰서와 파출서의 예비군무기고에서, 직장 무기는 직장 예비군무기고에 보관되고 있었습니다. 이 파출소들과 방위 상업체가 시민들이 찾기 쉬운 곳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군사적 기밀 장소"라는 수사를 이용해서 포장하려는 것은 시민군을 어떻게든 불순세력과 연관하려고 하는 비열한 의도입니다.

뿐만 아니라 신군부는 무기고 습격에 가담한 자들을 5·18민주화운동 이후 "간첩죄"나 "반공법"에 의한 죄목이 아닌 "내란죄"로 처벌했습니다. 신군부 입장에서도 무기고 습격에 가담한 자들을 "간첩"으로 몰았을 때 진압의 정당성을 얻었을텐데 스스로 그러지 않았다는 것은 이들이 불순분자와는 무관하다는 사실을 명백히 보여줍니다.

1.03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이 장갑차를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는 없었다.
출처 : http://www.bignews.co.kr/news/article.html?no=232312

시민군이 아시아자동차 공장을 습격했던 것은 사실입니다만, 당시 아시아자동차 공장이 광주 내의 유일한 자동차 공장이었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시민군이 아시아자동차 공장을 찾는 것은 어려운 일은 아니었습니다.

시민들은 이 아시아자동차 공장에서 차량을 탈취하여 계엄군에 대항하였는데 그 때 사용한 장갑차는 바로 시가전을 대비해서 만들어진 KM900 장갑차입니다. KM900 장갑차는 궤도식 장갑차가 아닌 장륜(차륜형) 장갑차이죠. 이 차륜형 장갑차의 운전 방식은 일반적인 자동차의 운전 방식과 거의 동일합니다. 따라서 일반 시민이 이 장갑차를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없다는 주장은 광주 시민들을 어떻게든 북한과 관련지으려는 억측에 불과합니다.

1.04 신원미상의 시체가 있다는 것은 5·18민주화운동 당시 북한의 소행이 있었음을 증명한다.
출처 : http://www.bignews.co.kr/news/article.html?no=232312

황당한 논리입니다.

현재 5·18묘지에 5구의 신원미상의 시체가 묻혀있는 것은 사실입니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143&aid=0001949099). 하지만 그것이 어떻게 북한 개입설을 뒷받침하는 건지 모르겠네요. 자, 삼풍백화점 붕괴 사건 직후에는 무려 30명에 달하는 시체의 신원이 밝혀지지 않았고(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2/11/03/2012110300062.html) 대구 지하철 참사의 희생자 중 6명도 아직 신원 미상입니다(http://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2/18/2008021801357.html). 신원 미상자가 있다해서 삼풍백화점 붕괴 사건과 대구 지하철 참사가 북한의 소행이라고 단정지을 수 있습니까? 터무니 없는 논리입니다.

1.05 시민군은 도청에 TNT를 설치함으로써 대한민국을 전복하려 했다.
출처 : http://blog.daum.net/sillasouls/109

우선 시민군이 도청에 TNT를 설치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여기에 대해서 두 가지 이상한 주장이 있는 것 같습니다. 1. 북한군이 아니었으면 다이너마이트 설치는 힘들었다. 2. TNT 설치는 시위대가 시도했던 대한민국 전복의 명백한 증거다.

광주민주화운동 일지의 원전인 『5.18 正史』에 따르면(http://cafe.naver.com/enature.cafe?iframe_url=/ArticleRead.nhn%3Farticleid=21), 당시 다이너마이트 설치를 담당한 사람들은 호남탄좌 화순광업소에 근무하고 있던 김영봉 씨 등 모두 13명이었습니다. 광업소에서 근무하던 분에게 다이너마이트 설치가 불가능한 일이었을까요. 북한군이 아니었으면 다이너마이트 설치는 힘들었다는 주장이 어불성설인 이유입니다.

다음으로, TNT 설치가 시위대가 시도했던 대한민국 전복의 명백한 증거라는 논리를 살펴봅시다. 위에서 언급했던 5.18 正史에 기록된 신만식 씨의 증언입니다. 신만식 씨 역시 화순 광업소 다이너마이트 유출 작업에 참여한 분입니다.

"떡밥과 뇌관 결합작업을 벌인것은 사실이지만 도화선을 연결하진 않았다. 형식적으로 다이너마이트 인근에 연결된 것처럼 보이게 해뒀을 뿐이다. 만약 담뱃불이라도 떨어지는 날이면 광주시내가 온통 불바다가 될게 뻔한데 그런 위험한 일은 할수가 없었다. 애초부터 다이너마이트는 위협용이었지 사용돼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시민군 모두가 잘 알고 있었다."

다이너마이트는 단순한 위협용이었습니다. 의도적으로 전남도청을 폭파할 의도가 있었다면 도화선을 연결했을텐데 시민군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도화선 자체를 설치하지 않았다는 또다른 증거로는 온건파의 요청에 의해 폭약 제거를 시도한 배승일 씨에 대한 명예회복 판결이 있습니다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60070116104502&Section=03). 뉴스 기사에 따르면, 배승일 씨는 당시 뇌관과 신관을 제거했습니다. 만약 도화선이 있었더라면 도화선을 먼저 제거했겠지요.

1.06 시민 측에서 의도적인 버스 돌격으로 경찰이 먼저 사망했다.
출처 : http://gall.dcinside.com/list.php?id=cdh&no=5295

말도 안 되는 거짓입니다.

우선, 먼저 사망한 쪽은 시민 측입니다. 목차 1.01를 봐주세요.
경찰이 시민 측에서 온 버스에 의해 사망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명백하게 의도적이지 않았습니다. 우선 광주민주화운동 일지의 원전인 5.18 正史에 수록된 증언에 따르면(http://cafe.daum.net/80518/N8mQ/40?docid=DKjbN8mQ4020031117052216)

"한편 이날 차량시위는 금남로에 이어 노동청 앞에서도 계속된다. 소위 노동청 전투라고 불리는 노동청 앞 오거리에서는 9시20분께 광주고속 차량 10대가 경찰 저지선을 뚫고 들어가 함평경찰서 소속 경관4명이 사망하기도 한다. 당시 광주∼남원간 정기노선을 운행하던 광주고속 운전기사 배용주씨 (당시나이 34세)는 정기노선운행을 마치고 본사에 도착, 이소식을 듣자 시내로 차를 몰고 나간다. 노동청과 도청사이로 들어온 배씨는 다른 차량들과 함께 맨앞으로 차를 운전, 도청을 향해나가기 시작한다. 갑자기 공수대로부터 발사된 최루탄 하나가 유리창을 깨고 들어와 차내에서 터지자 엉겹결에 정신을 차릴 수 없는 상태에서 그는 뛰어내린다. 그러나 그대로 시동이 걸린 차량은 계속 앞으로 돌진, 경찰들을 깔아버린 것. 배씨는 이 사건으로 체포돼 사형선고까지 받기에 이른다. 또 차량시위는 현대교통기사 김복만씨 (당시 29세)의 희생이 뒤따르기도 한다."

당시 경찰들을 사망하게 한 건 버스 기사의 고의가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최루탄 연기가 가득한 차 안에서 제대로 된 운전이 가능했을까요. 증언이 거짓이라 생각하는 분들은 당시 상황을 기록한 아래 사진을 봐주십시오.


버스 안에 가득한 최루탄 연기를 보십시오. 이 상황에서 제대로 운전을 해서 의도적으로 경찰들을 죽일 수 있었을까요. 이건 상식의 문제입니다.

1.07 5·18민주화운동 당시 사망자의 70% 가량이 시민군이 사용한 총기에 의해 사망했다.
출처 : http://www.ilbe.com/4481766
http://systemclub.net/bbs/zb4pl5/view.php?id=n_1&page=5&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reg_date&desc=desc&no=46

신군부의 나팔수들의 주장에 동조하는 분들이 계시다니 굉장히 안타깝습니다. 이같은 유언비어가 원천이 된 두 가지 서적에 대해서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우선 제5공화국은 1982년 신군부를 정당화하기 위해 작성한 서적 『계엄사』에서 총상에 의한 사망자 중 117명이 시민군이 사용한 칼빈 소총에 의해 죽었다고 주장했지만, 이를 뒷받침할만한 근거를 제시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인지해주십시오. 인터넷에서 떠도는 아래와 같은 도표도 같은 서적에서 나온 도표입니다.

반면, 1980년 5월 16일부터 6월 19일에 광주 지방검찰청에 의해 작성된「5.18관련 사망자 검시 내용」에서 따르면 사망자 1백65명의 사인은 총상이 전체 79.4%인 1백31명(M16 96명, 카빈 소총 26명, 기타 총상9명)으로 가장 많고, 개머리판. 곤봉 등에 의한 타박사가 18명, 차량사 12명, 대검 등에 의한 자상이 4명인 것이라고 합니다. 카빈 소총에 의한 사망자가 26명이라는 뜻입니다. 어떻습니까? 검찰청 입장에서 카빈 소청에 의한 사망자 숫자를 축소할 이유가 있었을까요. 82년 후에 군에서 나온 출처 없는 주장과는 많이 다른 내용입니다. 즉, 1982년 발표된 군의 주장은 거짓입니다.

보안사에서 발간한 5.18 자료를 인용하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이 자료에 따르면 칼빈 및 기타 총상 사망자는 94명, M16 사망자는 38명이지만, 이 역시 거짓입니다. 당시 보안사는 505보안부대에서 파악한 사체 검안 자료를 가지고 167명에 대해 양민과 난동자(원문에는 폭도와 비폭도)로 분류하는 작업을 다음과 같은 기준으로 진행했습니다:


2007년 국방부 과거사위원회 보고서에 의하면, 당시 이 분류 과정에 참여한 의사 2명과 목사는 사망자가 폭도로 분류될 경우 위로금 등이 지급되지 않았으므로 최대한 양민으로 분류하려고 노력했다고 합니다. 처음 폭도로 분류된 것은 20여명이 조금 넘었으나 군에서는 이 정도의 비율이면 곤란하다고 하여 격론을 벌인 끝에 최종적으로 38명이 폭도로 분류됐습니다. 이 때, 분류 과정이 불확실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사례로는 마지막 사망자의 분류 과정이 있습니다. 바로 5월 27일 YWCA 안에서 사망한 고등학생이었는데, 이 학생은 경기도 출신으로 그 안에서 저항했다는 이유로 군측에서는 계속 ‘폭도’라고 주장했고, 세 사람은 고등학생인데 어떻게 폭도가 될 수 있냐며 시민들은 비폭도로 분류할 것을 주장해 결국 ‘비폭도’로 분류됐습니다. 이 같은 과정 때문에 사체 검안위원회 회의 결과 M16보다는 M1이나 카빈 사망자가 더 많아졌다고 합니다. 무엇보다도, 이 자료의 원본이 됐던 505보안부대의 검시자료에 따르면(이 문서는 최근 공개되었습니다), 카빈 소총에 의한 사망자는 20명입니다. 즉, 보안사에서 원본 자료를 왜곡했다는 것입니다.

1.09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이 복면을 사용한 것은 이들이 남파 간첩이라는 것을 증명한다.
출처 : http://www.study21.org/518/photo/rioters-in-mask.htm

굉장히 황당한 주장이니,






6월 항쟁에 참여한 자랑스러운 시민들의 사진으로 답을 대신하겠습니다.
이들도 남파 간첩인가요.

1.10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은 북한군의 무기였던 AK 소총 및 파파샤를 사용했다.
출처 : http://www.ilbe.com/4474860, http://www.ilbe.com/77398014

둘 다 유언비어입니다.

AK 소총 사용에 대한 근거는 정말 정사갤/일베 등 모든 사이트를 뒤져봐도 아무데도 없군요. 하지만 몇몇 사람들이 시민군의 파파샤 사용을 증명한다며 제기한 재밌는 사진이 있습니다.

이들은 해당 사진이 "5.18광주민주화운동" 유물전에 있었던 사진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사실이 아닙니다. 극단적인 예로 바로 옆의 확성기에 부착되어 있는 Q마크를 보십시오. Q마크 보증제는 82년에 도입된 건데 어떻게 80년에 이게 있었을까요. 사실 이 사진은 한 시민이 "오월 판화체험전 시민군 현장 체험전"에 참석해서 찍은 사진입니다. 시민군 소품을 어떻게 실제 총기로 과장할 수 있을까요. 모조품에 지나지 않다는 거죠. 그래도 이게 진짜 같다면 다른 각도에서 찍은 아래 사진을 보십시오.

장전 손잡이도 없고, 방아쇠울도 저런 모양인 파파샤 총기가 어딨습니까..

원래 총기의 사진과 직접 비교해봅시다(https://www.google.ca/search?q=PPSH-41).

1.11 시민군에게 "조선인민군" 마크가 있는 실탄 사진이 있다.

조잡한 합성입니다.

1.12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은 시민들에게 총기를 무작위로 배포함으로써 극렬한 사회 분란을 조장했다.
출처 : http://www.ilbe.com/444804976

2. 북침설
2.01 북한에서 5·18민주화운동을 기념한다는 것은 당시 북한이 광주에 간첩을 보낸 것을 의미한다.
출처 : http://blog.daum.net/kagicstaton88/601
http://blog.naver.com/totoro890907/90146962497

제일 황당한 논리입니다.

예, 북한에서는 5·18민주화운동 뿐만 아니라 4·19혁명(http://dailynk.com/korean/read.php?cataId=nk00100&num=21228),

6월항쟁(http://www.ytn.co.kr/_ln/0101_200706102202527375),
심지어 3·1운동(https://www.dailynk.com/korean/read.php?cataId=nk09000&num=68182)과

6·3항쟁(http://media.daum.net/breakingnews/view.html?cateid=100000&newsid=19930603173400596&p=yonhap)도 기념합니다.

그래서 4·19혁명과 6월항쟁 그리고 6·3항쟁은 북한의 소행이고 3·1운동은 공산투쟁입니까?

2.02 북침설에 대한 증언이 있다(임천용 및 자유북한군인연합).

출처 : http://www.study21.org/518/doc/nk-Kang.htm, http://www.ilbe.com/429606599

북침설에 대한 증언은 대부분 임천용이라는 이 괴악한 사람한테서 나온 증언입니다.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아시나요? 무려 북한에서 "암살용"으로 "휴대용 핵폭탄"을 만들었다고 주장하는 사람입니다.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주장이냐 하면 미국에서조차 이 사람을 난민으로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결정을 내렸죠(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01&aid=0000894678). 이 분의 정신상태가 이상하다는 명백한 증거입니다.

물론, 정신상태가 멀쩡하지 않다고 해서 증언이 거짓이라고 확실하게 얘기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증언들이 엇갈린다면 어떨까요? 임천용은 총 세 곳에서의 인터뷰에서,

침투 인원을 어떤 곳에서는 450명으로, 어떤 곳에서는 1개 대대로, 어떤 곳에서는 2개 대대로 증언했습니다.

이 분의 오락가락한 증언은 여기에 잘 정리되어 있습니다(http://asegaew.egloos.com/2269768).

심지어 귀환 인원에 대해서도 제각각 다르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3군 사령관 출신인 서종표 의원은 이에 대해 "600명이 침투해서 광주에서 어떻게 활동을 할 수 있는가.

만약 그렇다 해도 그 동안 정부와 군은 무엇을 했는가.

말도 되지 않는 내용을 군 경험을 가진 보수단체장이 말할 수 있는가"라고 지적한 바 있습니다(http://www.viewsnnews.com/article/view.jsp?seq=75238).

심지어 다른 탈북 군인 협회인 탈북군인협회의 대표는 “자유북한군인연합과 협력해서 일하면 좋겠지만 현재는 그렇지 못하다.

탈북군인협회와 자유북한군인연합은 일하는 방법이 달라 같이 활동할 수 있는 조건이 안 된다.

특히 보여주기 사업, 이벤트성 사업 등은 지양해야 한다.

‘북한 보급창고 등을 까고 나오자’ 식의 선동적이고 과격한 활동이나 ‘5∙18 광주에 북한특수부대가 투입되었다’는 주장 등도 현실과 맞지 않다.”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http://www.dailynk.com/korean/read.php?cataId=nk06100&num=53887) 이들의 주장이 현실과 맞지 않다는 또다른 근거입니다.

2.03 5·18민주화운동 당시 일어난 간첩 신고에 대한 기사가 있다는 것은 5·18민주화운동에 북한이 개입했음을 증명한다(이창용).
출처 : http://www.study21.org/518/doc/nk-Kang.htm

끔찍한 왜곡입니다.

2007년 국방부 과거사위원회 보고서에는 간첩 이창용 사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창용의 수사기록과 재판기록에 의하면 5. 16. 전남 보성을 통해 침투했으며, 광주에서의 시위와는 상관 없이 남파됐다.

5․18과 관련한 임무나 광주로 잠입하기 위한 시도도 발견할 수 없다."
이창용이 검거 된 곳은 서울입니다. 게다가 그 때의 날짜는 무장투쟁이 시작되고 난 뒤인 5월 24일이었죠.
무엇보다도, 2007년 국방부 과거사위원회 보고서에 의하면,

신군부 세력은 광주민주화운동을 북한과 연관된 것처럼 여론조작을 하기 위해 허위사실을 유포했습니다.

2.05 인민군영웅렬사묘(인민군 영웅들의 렬사묘)에는 5·18민주화운동에 참여한 군인들을 기념하는 비석이 있다.
출처 : http://www.newdaily.co.kr/news/article.html?no=124632

뉴데일리라는 언론사의 신문사에서 나온 황색 유언비어입니다.

해당 뉴스 기사에 따르면, 10월 북한군 개입설을 증명하기 위해 김주호 박사가 공개한 자료는 바로 '인민군영웅렬사묘'를 촬영한 다음과 같은 사진 두 장 뿐입니다:



자, 김 박사는 이 묘에 있는 군인들이 5.18민주화운동과 관련되었다는 증거는 아무 것도 제출하지 않았습니다.

김 박사는 “비석에 이름이 새겨진 158명이 ‘남조선혁명투쟁에서 희생된 인민군 영웅들’이라는 사실을 각기 다른 문건에서 중복 확인했다,”

“사망자의 ‘죽은 날’로 기록된 1980년 6월 19일은 소속부대의 광주남파작전 종결일로, 사망일을 이 날짜에 맞췄다”라고 주장했지만

김 박사는 그 문건을 공개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재밌는 사실은, 해당 사진의 '인민군영웅렬사묘'가 김주호 박사가 지칭하는 묘라는 명확한 증거 역시 없다는 것입니다.

최근에 북한이 베트남 전쟁에 참여한 사실을 밝히는 기사가 있었죠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205041153541&code=910303).

이 기사에 따르면, 북한의 조선중앙통신이“어버이 장군님(김정일 위원장을 지칭)께서 월남전쟁에서 희생된 비행사들을 한시도 잊지 않으시다가 이국 땅에 묻혀있는 그들을 조국에 데려다 인민군 영웅 렬사묘에 안치하도록 하신데 대해 뜨겁게 회고하시였다.”라고 밝혔다고 합니다.

출처가 된 문건도 없고, 사진의 비석이 어떤 묘의 비석인지조차 밝히지 않으니, 김 박사의 주장은 근거없는 유언비어입니다.

2.06 5·18민주화운동 당시 북한군은 잠수함을 통해 광주에 침입해 있었다.
출처 : http://www.bookstore21.net/korean/518/submarine.htm

근거 없는 유언비어입니다. 무장간첩이 침투한 것은 3월 23일, 35일, 27일에 있었으며, 그마저도 모두 검거되었습니다.

2.07 윤기권이 5·18민주화운동 유공자임에도 불구하고 월북했다는 것은 이들이 간첩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출처 : http://blog.daum.net/sionvoice/13756351

괴악한 논리적 비약이군요.

윤기권은 5·18민주화운동 당시 광주에 있는 고등학교에서 재학중인 고등학생이었는데, 이 사람이 어떻게 간첩 훈련을 받을 수 있었겠습니까.

더군다나, 윤기권이 북한으로 넘어갔다해서 5·18민주화운동에 참가한 시민들 대다수가 어떻게 간첩이 됩니까.

2.09 5·18민주화운동 당시 북한에서는 5·18민주화운동을 생중계했다.
출처 : http://study21.tistory.com/entry/%EA%B4%91%EC%A3%BC%EC%82%AC%ED%83%9C-%EC%83%9D%EC%A4%91%EA%B3%84%ED%95%98%EC%98%80%EB%8D%98-%EC%9D%B4%EB%B6%81-%EB%B0%A9%EC%86%A1

상식에서 벗어난 어불성설입니다.

역사학자라는 사람은 5월 28일자 대한뉴스가 당시 평양의 생중계 방송을 편집했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이에 대한 근거는 전무합니다.

이건 상식의 문제입니다. 1980년 당시 기술로 중계시설이나 송신소도 없이 광주에서 수백 킬로미터가 떨어진 평양까지 어떻게 생중계를 했을까요.

동영상 후반에 나오는 북한 방송에서 나온 듯한 구호는, 5·18민주화운동 이후의 북한 방송의 보도일 수 밖에 없는 까닭입니다.

탈북자가 북한에서 계엄군이 시민군을 전기톱으로 머리를 갈라 잔인하게 죽이는 장면을 생중계로 보았다는 주장도 있습니다만 머리가 전기톱에 갈려 죽은 사람에 대한 검시기록은 없습니다.

3. 기타
3.02 어린이/임산부/학생에게도 총을 쐈다, 계엄군이 대검을 사용했다는 유언비어가 나돌았다.

유언비어가 아닌 사실입니다.

5월 20일에는 군인이 정조준한 총에 임신 8개월 된 최미애 씨가 맞아 쓰러졌고, 병원에 옮겼으나 아이와 함께 숨을 거두었습니다.
5월 24일, 신군부의 공수여단은 달리는 차에서 눈에 띄는 사람이나 집을 향해 M16을 마구 쏘기 시작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마을 앞 저수지에서 목욕을 하던 중학교 1년 방광범 군이 그 자리에서 숨졌고,

마을 어귀에서 놀던 초등학교 1학년 전재수 군이 벗어진 신발을 주우려는 순간 10여 발의 총탄을 맞고 사망했습니다.
대검 사용도 사실로 밝혀졌습니다(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3902648).

실제로 사망자 중 14세 이하의 사망자는 무려 8명에 이릅니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3959021).

다시 말하지만 대법원에서는 이미 5·17쿠데타를 일으킨 전두환을 내란죄(폭동죄) 및 반란죄로 사형 선고를 내린 바 있습니다.

누가 폭도인지는 자명하지 않습니까.

3.03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군이 조직적으로 교도소를 습격했다.
출처 : http://unifykorea.hosting.paran.com/xe/kwangjuinsurgence/23995
         http://www.bookstore21.net/korean/518/submarine.htm

5·18민주화운동 당시의 신군부의 왜곡에 그대로 동조하는 분들이 아직도 있다는 게 놀랍습니다.

이 같은 주장은 1980년 5월 당시 계엄군 기록(전교사 전투상보)에 ‘시민군의 교도소 습격’ 내용에서 시작된 유언비어입니다.

5·18기념재단의 설명대로, 시민군들은 광주의 고립과 봉쇄를 뚫고 담양과 장성에 광주의 사실을 알리기 위해 교도소 앞의 차단을 뚫어야 했고,

공수부대의 무차별 학살에 맞서기 위해서 교도소 앞으로 출동했을 뿐입니다(http://www.518.org/ease/board.es?mid=a10501000000&bid=0006).

당시 시민군이 광주 외곽으로 진출하려던 것을, "교도소 습격"으로 왜곡한 것입니다.

실제로 총격전이 일어난 곳은 근처 호남고속도로에서 일어난 것이 대부분이고,

교도소로 진출하려는 일부 시도가 있었습니다만 해당 사건에 관련된 시민군은 4명, 6명으로 교도소 습격 자체가 목표라고 보기는 힘듭니다.

6명 이하의 인원으로 교도소를 함락할 수 있나요. 상식의 문제입니다.

이에 따라 2007년 7월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는 광주교도소 습격사건을 불순분자의 소행으로 몰아가기 위해 관련자를 조작했음을 밝혀낸 바 있습니다.

오히려 신군부는 광주교도소 앞을 통과하던 민간인들을 학살했습니다.

2007년 7월 국방부 과거사진상규명위원회는 신군부의 발포로 인해 가족과 함께 광주교도소 앞을 통과하던 차량,

아이들과 함께 광주를 떠나던 사람, 계엄군 주둔지역의 마을주민 등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쳤다"고 결론을 내렸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http://asegaew.egloos.com/3653375를 참고해주십시오.

3.04 5·18민주화운동 당시 시민들이 파출소 등의 공공시설을 파괴했으므로 5·18민주화운동은 폭동이다.
출처 : http://www.ilbe.com/437085841

대한민국의 헌법 정신을 파괴하는 주장입니다.

4. 19 혁명 때도 경찰서가 방화됐고, 6. 10 항쟁 때도 파출소와 방송국이 방화됐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4. 19 혁명과 6. 10 항쟁이 폭동이라 할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대한국민이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한다는 헌법 전문은 잘못됐네요.

3.05 고등법원은 지만원이 받은 소송에서 5·18민주화운동은 폭동이라는 판결을 내린 바 있다.
출처 : http://www.ilbe.com/146457631

괴악한 비약이군요.

5·18단체가 고소한 사건에서 지만원이 무죄 판결을 받은 이유는 5·18민주화운동이 폭동이라는 지만원의 주장이 옳아서가 아니라,

지만원이 5·18단체 회원들을 직접 지칭한 적이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http://www.newstomato.com/ReadNews.aspx?no=281626)

3.07 80년대에 미국은 5·18민주화운동을 폭동으로 규정했으므로 5·18민주화운동은 폭동이다.
출처 : http://www.ilbe.com/354176114

말장난하지 마십시오.

우선 극우세력이 가장 자주 인용하는 미국 헤리티지 재단의 보고서는 1985년에 작성된 것입니다.

우선 헤리티지 재단은 미국의 공화당 성향의 우파 싱크탱크라는 사실과,

전두환 정부의 비서실장인 허화평이 1983년 1월부터 1986년 6월까지 헤리티지 재단의 수석 연구위원을 지냈다는 사실을 유념해주시기 바랍니다.

헤리티지 재단의 보고서는 미국의 공식적인 입장으로 보기 힘든 까닭입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것은 87년 6월 항쟁에 의한 민주화 이후 제대로 된 진상규명이 시작되지 않은 상태에서 미국 인사들이 제대로 된 정보를 알게 된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보고서에는 5월 18일 전남대에서의 시위부터 이틀 간 두 명의 사망자가 나타났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닙니다 (1.01을 참조하십시오).

"...There were many injuries on both sides, but only two rioters were killed during the first two days of the confrontation."

(http://www.heritage.org/research/reports/1985/09/south-koreas-kwangju-incident-revisited?query=South+Korea's+Kwangju+Incident+Revisited)

또한 이 보고서에서는 광주교도소에서 50명의 시민군이 사망했다고 보고하고 있지만 실제로 교도소로 진출하려 했던 시민군은 총 10명에 그쳤습니다

(3.06을 참고하십시오).

"...At the Kwangju Prison, for example, more than 50 armed rioters were killed during the numerous assaults against the government-held facility." (Ibid.)

이같이 왜곡된 정보만으로 헤리티지 재단이 당시 올바른 결론을 내릴 수 있었을까요? 불가능입니다.
그렇다면 5·18민주화운동 직후에 작성된 CIA의 기밀문서와 1980년 6월 25일에 발행된 미국 국방부의 보고서는 어떨까요.

여기에서도 5·18민주화운동을 광주 폭동(riot)으로 규정하지만 이 역시 당시 진상규명의 부족함과 신군부와의 공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해당 미국 국방부의 보고서에는 굉장히 흥미로운 사실이 보고되어 있습니다.

"그 전두환은 정부 조사관들에게 학생/시민들이 군인을 구타하는 영상물을 찾아낼 것을 명령했다.

그의 계획은 타임지나 뉴스위크지같은 외국 언론사가 촬영한 민간 시위에 대한 군인들 (대부분이 특전사)의 잔인한 대응을 상쇄시키려는 것이다.

... [그러나] 아무것도 발견해낸 것이 없다."

실제로 1989년 미 국무부는 5·18민주화운동을 "May 18th Kwangju Democratization Movement,"

즉 5월 18일 광주 민주화 운동으로 규정했습니다(http://seoul.usembassy.gov/backgrounder.html).

3.08 5·18민주화운동 진압 당시 대통령은 최규하였으므로 5·18민주화운동과 전두환은 아무런 관련이 없다.
출처 : http://www.ilbe.com/438961786, http://www.ilbe.com/439148590

다음은 전두환에 대한 내란죄 관련 판결문입니다.

"...피고인들이 이른바 12·12군사반란으로 군의 지휘권과 국가의 정보기관을 실질적으로 완전히 장악한 뒤, 정권을 탈취하기 위하여 1980. 5. 초순경부터 비상계엄의 전국확대, 비상대책기구설치 등을 골자로 하는 이른바 '시국수습방안' 등을 마련하고, 그 계획에 따라 같은 달 17. 비상계엄을 전국적으로 확대하는 것이 전군지휘관회의에서 결의된 군부의 의견인 것을 내세워 그와 같은 조치를 취하도록 대통령과 국무총리를 강압하고 병기를 휴대한 병력으로 국무회의장을 포위하고 외부와의 연락을 차단하여 국무위원들을 강압 외포시키는 등의 폭력적 불법수단을 동원하여 비상계엄의 전국확대를 의결·선포하게 함으로써, 국방부장관의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에 대한 지휘감독권을 배제하였으며, 그 결과로 비상계엄 하에서 국가행정을 조정하는 일과 같은 중요국정에 관한 국무총리의 통할권 그리고 국무회의의 심의권을 배제시킨 사실, 같은 달 27. 그 당시 시행되고 있던 계엄법(1981. 4. 17. 법률 제3442호로 전문 개정되기 전의 것, 이하 같다) 제9조, 제11조, 제12조 및 정부조직법(1981. 4. 8. 법률 제3422호로 개정되기 전의 것) 제5조에 근거하여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및 그 산하의 상임위원회를 설치하고, 그 상임위원장에 피고인 전두환이 취임하여 공직자 숙정, 언론인 해직, 언론 통폐합 등 중요한 국정시책을 결정하고 이를 대통령과 내각에 통보하여 시행하도록 함으로써, 국가보위비상대책상임위원회가 사실상 국무회의 내지 행정 각 부를 통제하거나 그 기능을 대신하여 헌법기관인 행정 각 부와 대통령을 무력화시킨 사실 등을 인정한 다음, 피고인들이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게 하여 비상계엄 하에서 국가행정을 조정하는 일과 같은 중요국정에 관한 국무총리의 통할권과 이에 대한 국무회의의 심의권을 배제시킨 것은 헌법기관인 국무총리와 국무회의의 권능행사를 강압에 의하여 사실상 불가능하게 한 것이므로 국헌문란에 해당하며,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설치하여 헌법기관인 행정 각 부와 대통령을 무력화시킨 것은 행정에 관한 대통령과 국무회의의 권능행사를 강압에 의하여 사실상 불가능하게 한 것이므로 역시 국헌문란에 해당한다고 판단하였다."

다시 한 번 밝히지만 전두환은 내란죄, "즉 국토의 참절 또는 국헌문란(國憲紊亂)의 목적으로 폭동하는 죄"로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폭도와 그 폭도에게 맞서 싸운 5·18민주화운동의 광주시민이 어떻게 아무런 관련이 없을 수 있습니까.

광주 민주화 운동을 폭동이라 부르시려면 우선 전두환이 일으킨

12.12 쿠데타와 5.17 쿠데타가 쿠데타가 아니라는 걸입증해야하지만12.12 쿠데타와 5.17 쿠데타가 쿠데타라는

명백한 사실은 위의 판결문에서 보시다시피 이미 90년대 재판에서 수차례 확인한 진실이랍니다.

이후에 사면을 받았으니 상관없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목차의 3.12를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3.11 계엄 선포 당시의 사회 상황을 고려하면, 5·17비상계엄전국확대(5·17 쿠데타)는 정당화될 수 있다.

어떻게 일제가 하는 말과 한결같이 똑같습니까. 다음은 전두환에 대한 내란죄 관련 판결문입니다.

"...피고인들이 이른바 12·12군사반란으로 군의 지휘권과 국가의 정보기관을 실질적으로 완전히 장악한 뒤, 정권을 탈취하기 위하여 1980. 5. 초순경부터 비상계엄의 전국확대, 비상대책기구설치 등을 골자로 하는 이른바 '시국수습방안' 등을 마련하고, 그 계획에 따라 같은 달 17. 비상계엄을 전국적으로 확대하는 것이 전군지휘관회의에서 결의된 군부의 의견인 것을 내세워 그와 같은 조치를 취하도록 대통령과 국무총리를 강압하고 병기를 휴대한 병력으로 국무회의장을 포위하고 외부와의 연락을 차단하여 국무위원들을 강압 외포시키는 등의 폭력적 불법수단을 동원하여 비상계엄의 전국확대를 의결·선포하게 함으로써, 국방부장관의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에 대한 지휘감독권을 배제하였으며, 그 결과로 비상계엄 하에서 국가행정을 조정하는 일과 같은 중요국정에 관한 국무총리의 통할권 그리고 국무회의의 심의권을 배제시킨 사실, 같은 달 27. 그 당시 시행되고 있던 계엄법(1981. 4. 17. 법률 제3442호로 전문 개정되기 전의 것, 이하 같다) 제9조, 제11조, 제12조 및 정부조직법(1981. 4. 8. 법률 제3422호로 개정되기 전의 것) 제5조에 근거하여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및 그 산하의 상임위원회를 설치하고, 그 상임위원장에 피고인 전두환이 취임하여 공직자 숙정, 언론인 해직, 언론 통폐합 등 중요한 국정시책을 결정하고 이를 대통령과 내각에 통보하여 시행하도록 함으로써, 국가보위비상대책상임위원회가 사실상 국무회의 내지 행정 각 부를 통제하거나 그 기능을 대신하여 헌법기관인 행정 각 부와 대통령을 무력화시킨 사실 등을 인정한 다음, 피고인들이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게 하여 비상계엄 하에서 국가행정을 조정하는 일과 같은 중요국정에 관한 국무총리의 통할권과 이에 대한 국무회의의 심의권을 배제시킨 것은 헌법기관인 국무총리와 국무회의의 권능행사를 강압에 의하여 사실상 불가능하게 한 것이므로 국헌문란에 해당하며,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를 설치하여 헌법기관인 행정 각 부와 대통령을 무력화시킨 것은 행정에 관한 대통령과 국무회의의 권능행사를 강압에 의하여 사실상 불가능하게 한 것이므로 역시 국헌문란에 해당한다고 판단하였다."

5·17비상계엄전국확대가 이래도 정당화된다고 보이십니까? 5·17비상계엄전국확대는 강압적인 쿠데타입니다.

이를 두고 당시 최규하의 재가를 받았으므로 상관없다고 주장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을사조약이 무효인 이유를 생각해보십시오.

군부대로 국무회의장을 포위하고 외부와의 전화선을 끊어버린 상태에서 내린 결정이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습니까.

미 국무부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의견을 개진했습니다:
"NO information indicating a North Korean intention to attack was received by the United States during the period covered by this statement, nor did United States officials regard the domestic situation in the South as being so serious as to justify either Full Martial Law or harsh repressive measures."
"미국은 북한의 공격 의도가 있었다는 어떤 정보도 [1980년 당시] 받지 못 했고,

미국 정부는 대한민국의 당시 상황이 계엄령 또는 극심한 탄압을 정당화할만큼 심각하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http://seoul.usembassy.gov/backgrounder.html)

3.12 전두환은 이후에 사면을 받았으므로 내란죄와 무관하다.

가소로운 말장난입니다. 사면은 "형벌의 면제"입니다.






유네스코에 올라왔다고 무조건 민주화운동이 아니다?

http://www.unesco.org/new/fileadmin/MULTIMEDIA/HQ/CI/CI/pdf/mow/nomination_forms/Korea%20Human%20rights.pdf
어떻게 올라왔는데

읽고 반성이나 합시다.

유네스코에서는 '광주민주화봉기'로 판정했습니다.

좋든 싫든 민중이 폭력을 사용한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유네스코에서조차 이 폭력은 정당한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참고링크:
http://blog.daum.net/kbsicom/49
http://www.dailynk.com/korean/read.php?cataId=nk06100&num=53887
http://blog.daum.net/kbsicom/51
http://www.youtube.com/watch?v=sCXbu_Ekca4
http://blog.naver.com/chiyahn/20171304853
http://mirror.enha.kr/wiki/5.18%20%EA%B4%91%EC%A3%BC%ED%8F%AD%EB%8F%99%EC%84%A4


12.12는 반란이아니다? 정당한것이었다. 헛소리 집어 치우고 읽자.

이희성은 12.12 반란 이후 전두환이 직접 육군참모총장에 임명한 인물

이희성 1980년 당시 계엄사령관이 증언하는 12.12 사태

그 때 그건 전두환이가 확실히 잘못한 겁니다.
연행한다는 건 대통령의 재가를 받아야 되거든요.
소장이, 참모총장을 갖다 연행해야한다는 것이
국방부 장관한테 승인받을래도 국방부 장관이 노재현 장관이니까
전두환이 볼 때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거든요.
차라리 야단맞겠지요.
(전두환이) 대통령에게 이렇게 이렇게 얘기하니까
대통령이 뭐라고 했냐면, 나는 군부 내용을 모르니
국방부 장관을 통해서 가져오라 이렇게 얘기한 겁니다.
그래서 시간을 끌고 그러니까 자기네들은 뭐
큰 사건 일으키는 식으로 해서 끌고 가야 되는데
시간이 늦어지고 그러니까 불쑥 쳐들어간거에요.
(12.12 사태는 ) 하극상이오
쿠데타라기보다는 하극상입니다.
정승화 장군은 절대로 김재규의 손아귀에 들어가거나
김재규의 이용물이 되거나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 것을 전두환이가 자기 야심을 채우기 위해서
정승화를 제거하기 위해서 했다고 그렇게 봅니다.
12.12 사태 때 내가 곧 참모총장이 됐거든요.
사실은 그문제를, 1.212 문제를 가지고 조사를 해야되는 그 힘은 미치지 못해요.
왜냐하면 조사기관이나 보좌진이 전부 다 그쪽(보안사)에서 장악하고 있기 때문에
이걸 터뜨리면 번연히 군 전체가 쑥대밭이 되니까
할 수 없이 내버려 뒀거든요.
그게 타성이 되버린 겁니다.

12.12 사태 이후 전두환의 행태

제일 처음에 (전두환이) 그 때 소장이였거든요.
소장이 중장 진급을 자꾸 시켜달라고 나한테 애를 무척 태웠어요.
뭐 국방장관까지 동원해 가지고
뭐, 여러 사람을 동원해 가지고 했는데
그 때 소장되고 나서 중장 될 차례가 안되었을 때 자꾸 중장 진급시켜달라고 해서
이 사람들이 무엇을 생각해 중장할려고 그러느냐,
그런 걱정을 하고 있으면서
다른 뜻이 있지 않느냐, 하는 생각을 했어요.
그 다음에 차츰차츰 가보니까 애들이 하는 행동이요.
경호 문제를 굉장히 걱정을 하더라 이거요.
자기의 경호!
경호대장같은 사람을 해가지고
시내에 가든지 골프장에 가든지 하면
굉장히 대통령 행사 모양으로 경호를 해요.
얘네들이 왜 그러냐 할때
처음에는 12.12 일어나고 난 다음에 자기의 적이
많으니까 신변보호를 하기 위해 그랬지 않느냐
그 생각이 들고도, 쭉 가보니까 그 때도
'야 이것이 지금 큰 꿈을 꾸고 있지 않느냐' 하는 생각을 하고
이와 같은 것이 징후에 나타나더라 말이야.






재판당시 뉴스: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5121200209101001&editNo=45&printCount=1&publishDate=1995-12-12&officeId=00020&pageNo=1&printNo=23051&publishType=00010

5공청문회 당시 뉴스: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8120100289101001&edtNo=2&printCount=1&publishDate=1988-12-01&officeId=00028&pageNo=1&printNo=173&publishType=00010

1988년 반란의 가장큰 피해자 정승화의 인터뷰: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8112800209215006&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8-11-28&officeId=00020&pageNo=15&printNo=20666&publishType=00020

엔하위키:
http://mirror.enha.kr/wiki/12.12%20%EA%B5%B0%EC%82%AC%EB%B0%98%EB%9E%80




전두환은 책임이없다? 전두환이 발포명령안함: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8120600209202013&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8-12-06&officeId=00020&pageNo=2&printNo=20673&publishType=00020

전라도출신 정웅이 진압한거다.: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6072600209134001&editNo=45&printCount=1&publishDate=1996-07-26&officeId=00020&pageNo=34&printNo=23264&publishType=0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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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루리웹에서 퍼옴

http://bbs2.ruliweb.daum.net/gaia/do/ruliweb/default/community/332/read?articleId=16500005&bbsId=G005&itemId=148&pageIndex=3

2013.0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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