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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6.25 전쟁 당시 대구 경북 지역에서 일어난 전투
8121 조회수 2,126 작성일2018.11.21

6.25 전쟁 당시 대구 경북 지역에서 일어난 전투랑 그 전투로 인한 희생규모, 대구 경북 지역의 6.25 관련 유적지에 대해서 알려주세요 길고 자세하게 알려주시면 좋겠어요 급하니까 빨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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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IN
은하신
부동산, 건축, 월세, 상속세, 증여세 70위 분야에서 활동
# 낙동강 전투 (경북 칠곡군 왜관읍 일대)

6.25 북한군의 남침으로 후퇴를 거듭하여 1950년 8월 1일에는 낙동강 선까지 후퇴하였습니다. 한국군과 유엔군은 낙동강을 마지막 교두보로 하여 모든 군사력을 낙동강 방어에 집중하게 됩니다. 유엔군은 낙동강 - 칠곡 다부동(유학산) - 영천 신령 - 포항을 연결하는 선을 따라 연속적인 방어선을 구축하여 이 방어선으로 인해 북한군은 측면을 뚫거나 압도적인 수로 방어선을 돌파할 수 없었습니다.

낙동강 전선에서 더이상 진격을 못한 북한군은 1950년 9월 1일부터 9월 15일까지 대공세를 펼쳤지만 실패를 하고 맙니다.

9월 15일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자 북한군은 보급로가 끊겨 더이상 남쪽으로 진격을 하지 못하고 북으로 후퇴를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었습니다.

낙동강 전투는 6.25 전쟁 기간 중 가장 많은 물량과 군사력이 투입된 전투라 할 수 있습니다.

왜관읍 북쪽 외곽지 작오산 중턱에 낙동강전투 승전 기념비가 있습니다.


# 다부동 전투(칠곡군 가산면 다부동, 유학산 일대)

1950년 8월 부터 낙동강방어선을 공격하는 북한군은 가용부대의 절반에 해당하는 5개 사단을 낙동강 동쪽 대구 북방에 배치하여 대구를 점령하려고 했습니다. 8월 공방전의 승패는 대구 북방의 전투결과에 따라 결정될 정도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반면 그 지역의 아군 방어병력은 총 3개 사단(국군 제1·제6사단, 미 제1기병사단) 뿐이었으며, 그나마 인접 사단들이 서로 연결되지 못한 상태여서 북한군 대비 상당한 열세였습니다.
육군본부는 국군의 방어선을 왜관 북쪽의 작오산∼다부동∼군위∼보현산을 잇는 선으로 축소 조정하여, 이에 따라 국군 제1사단과 제6사단은 다부동∼군위 선에서 대구를 방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미 극동공군사령부는 8월 16일 낙동강변에 이른바 융단폭격을 단행했고. 이는 대구정면이 위태롭다고 판단한 미 제8군사령부가 낙동강 대안의 적 주력부대를 제압하기 위해 실시된 폭격이었습니다. 융단폭격의 성과는 명백하게 확인되지 않았으나, 북한군 지휘관들에게 대단히 큰 심리적 충격을 준 것으로 판단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8월 18일 칠곡군 가산에 침투한 적이 사격한 박격포탄이 대구역에 떨어지자 대구의 위기가 고조되고 그 충격으로 정부가 부산으로 이동하고 피난령이 하달되는 등 대구일대가 혼란에 휩싸이기도 했습니다.

그 후 미 제1기병사단 정면의 적은 강을 건너오는 동안 많은 손실을 입고 접촉을 단절함으로써 소강상태가 유지되었고, 국군 제6사단 지역에서도 유엔의 공중폭격의 지원을 받아 이를 격퇴함으로써 적의 대구 공격은 국군 제1사단 방어지역인 다부동 축선에 집중되게 됩니다.

국군 제1사단은 유학산∼다부동∼가산선에서 북한군 3개 사단의 집요한 공격을 끝까지 저지 격퇴함으로써 전투를 승리로 이끌고 또한 다부동 방어전투를 승리하게 된 배경에는 미 제8군의 적절한 예비대 투입도 큰 기여를 했습니다. 마침내 8월 20일 적은 더 이상 다부동 전선을 돌파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유학산 정면을 공격했던 제15사단을 영천 방면으로 전환했고, 이로써 8월의 다부동 위기는 해소되되었고 대구를 사수하게 됩니다.

중앙고속도로 다부IC 에서 빠지면 오른쪽에 다부동전투 기념관이 있습니다.

2018.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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