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④ 우리가 외치면 공약이 된다] 총리 오른 슈뢰더도 콜도 정치의 시작은 ‘청년조직’이었다

베를린 | 정대연 기자

독일 정치인은 청년조직을 거쳐 자란다. 독일 정당의 청년조직은 10대부터 토론을 통해 집단적 의견을 도출하고, 때로는 소속 정당과 싸우기도 한다. 이 과정에서 실력을 갖춘 거물 정치인이 탄생한다. 헬무트 콜과 게르하르트 슈뢰더는 모두 이렇게 탄생했다. 정당 청년조직에서는 토론과 정책·리더 경쟁이 일상적이다. 중앙당의 ‘명령을 하달받아’ 몸으로 뛰는 데 익숙한 한국 정당의 청년조직과 대조를 이룬다.

지난달 18일 독일 베를린 샤를로텐부르크 녹색당 청년조직 ‘녹색청년’ 정기모임에서 청년들이 맥주를 마시며 토론하고 있다. 모임에서는 야나(왼쪽에서 두번째)가 여성주의를 주제로 발제했다.        베를린 | 정대연 기자 hoan@kyunghyang.com

지난달 18일 독일 베를린 샤를로텐부르크 녹색당 청년조직 ‘녹색청년’ 정기모임에서 청년들이 맥주를 마시며 토론하고 있다. 모임에서는 야나(왼쪽에서 두번째)가 여성주의를 주제로 발제했다. 베를린 | 정대연 기자 hoan@kyunghyang.com

■정당은 ‘민주주의 학교’

지난달 18일 베를린의 샤를로텐부르크 녹색당 청년조직인 ‘녹색청년’을 찾았다. 이들의 토론은 마치 대학 시절 동아리 세미나 같았다. 10대 후반부터 20대까지 7명의 청년들은 밤늦게까지 병맥주를 마시며 토론을 이어갔다.

대학에서 영화학을 전공하며 녹색당 지역 임원으로 활동하는 야나(19)가 발표를 시작하자 다른 6명의 청년들이 흰 벽에 쏘인 프레젠테이션 화면에 집중했다. 이날 주제는 ‘우파 입장에서 본 여성주의’였다. 자신들과 다른 입장을 가진 사람들의 주장을 검토하려는 것이다. 야나는 “극우정당들의 여성 당원·의원 수가 20% 수준에 불과하다”는 점을 먼저 지적했다. 한국은 19대 총선 여성 당선자가 15.7%(47명)에 불과하지만, 독일은 40%에 육박한다.

[부들부들 청년][3부④ 우리가 외치면 공약이 된다] 총리 오른 슈뢰더도 콜도 정치의 시작은 ‘청년조직’이었다

“그들은 여성은 예쁘게 보여야만 한다는 전형적 여성상에 머물러 있어. ‘독일의 어머니’로서의 역할에만 충실하기를 바라지. 또 이민자들로부터 여성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해. 이는 나치시대의 여성상을 답습하는 거야.”

야나의 주장에 프로그래머인 플로리안(26)이 “극우정당의 주장이어도 사회적인 영향을 미치므로 우리가 알아둘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일주일 전에는 리자 파우스 연방의원을 불러다 그리스 경제위기에 관한 발표를 들었다. 2주에 한 번은 청년이 아닌 지역의 성인 당원들과 모여 현안을 토론하고 동등하게 의사결정에 참여한다. 전체 지역모임에서는 지난달 초 극우정당인 ‘독일을 위한 대안(AfD)’ 관계자를 불러 유럽연합(EU), 외국인, 난민, 동성애에 관한 입장을 듣는 자리를 마련했다.

나이든 중장년의 전유물인 한국 정치에서 청년들은 투표 외에는 다른 정치 참여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다. 선거 때 꼬박꼬박 투표해도 바뀌는 것은 없다고 여긴다. 정당 안팎에서 주체가 될 수 없는 한국의 청년들은 정치를 ‘나와 무관한 영역’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밤 11시30분까지 이어진 녹색청년의 토론 모습에서 “정당은 민주주의의 학교”란 말의 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참여해야 정치인이 된다

샤를로텐부르크 녹색당 청년조직 모임은 매주 목요일 저녁 열린다. 주로 학생과 직장인이지만 16세 고등학생도 모임에 나온다. 당별로 조금 차이가 있긴 하지만 보통 14세부터 청년조직 참여가 가능하다. 반드시 당원일 필요도 없다.

이날 모임에서는 9월에 있을 베를린 지방선거에 어떻게 대응할지에 대한 이야기도 오갔다. 선거를 6개월 앞둔 3월 중순에 각 당 후보자 선출 절차가 예정돼 있었다. 총선 42일을 앞두고 선거구가 정해지고, 한 달을 앞둔 지금도 후보자가 확정되지 않은 ‘깜깜이 선거’에 익숙한 한국인에게는 낯선 광경이었다. 당원들이 모인 자리에서 소견을 발표하고 질문에 답하는 절차를 마친 뒤 1인 1표에 의한 투표를 거쳐야 후보자로 선출된다. 청년조직은 직접 후보자를 내거나 특정 후보자에 대한 지지·반대 입장을 밝힌다.

비교적 일찍부터 정치를 경험한 이들은 “정치는 현실의 문제를 바꾸기 위한 수단”이라고 입을 모았다. 녹색당 하인리히 뵐 재단에서 일하는 지몬(26)은 “공동체의 복지를 위해 정치가 필요하다. 기회가 생기면 정치를 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다”며 “청년조직에서 활동하다보면 정치인이 될 기회가 많은 편”이라고 말했다.

■‘전략공천’이란 말은 없다

독일 통일을 이룬 기독민주연합 헬무트 콜 전 총리와 그에 이어 총리가 된 사회민주당 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총리는 모두 당 청년조직 출신이다. 동서 냉전기 서독을 이끈 헬무트 슈미트 전 총리도 마찬가지다. 일찍부터 다음세대 정치인 육성에 관심을 기울인 독일 정당들은 정치재단을 만들어 청년들의 정치활동과 학업을 지원하고 있다. 어려서부터 정당을 통해 사람들을 만나면서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정당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체험하며 총회를 열어 의사결정을 한다. 함께 영화를 보고 차를 마시는 등 일상을 공유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현재 기민련 청년조직(14~35세)에만 12만명이 가입해 있다. 전체 당원 44만2000명 중 27%에 이른다. 실제 가입한 청년 당원만 4만3000명이다.

<b>당 청년조직을 거친 독일의 거물 정치인들</b><br />헬무트 콜 전 총리(기민련)

당 청년조직을 거친 독일의 거물 정치인들
헬무트 콜 전 총리(기민련)

독일 연방의회에는 18세 의원을 포함해 40세 이하가 전체 620명 중 90명이 넘는다. 10대 때부터 정당에 가입해 지역에서부터 활동하다 능력을 인정받으면 중앙 정계로 차근차근 진출하는 구조라 지방의회에는 젊은 의원이 훨씬 많다. 후보자가 되기 위한 중앙당 면접, 공천을 둘러싼 계파 갈등, 선거 직전 영입한 명사의 전략공천 따위는 끼어들 여지가 없어 보였다.

베를린 의회에서 만난 기민련 소속 팀-크리스토퍼 첼렌 의원(32)은 “의원이 되느냐 마느냐는 당원들이 결정하는 것”이라면서 “(전략공천이 있다면) 당원들이 ‘너 누구야? 나는 너 몰라’ 하는 반응을 보일 것”이라며 웃었다. 28세에 비례대표 초선의원이 된 그는 당 경선을 통해 올해 9월 지방선거 지역구 후보로 선출됐다.

■‘정당 내 야당’ 역할 하는 청년조직

청년조직은 소속 정당과 완전히 독립적으로 운영된다. 정당이 자금과 프로그램을 지원하지만 청년조직은 독자적으로 시민사회단체와 연대하고 당의 공식 입장과는 다른 목소리를 내기도 한다. 별도의 선거캠프를 차릴 수도 있다. 청년조직을 “당내 야당”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구 동독지역인 베를린 프리드릭스하인은 낙후한 주거 여건 때문에 건물주들의 재개발 요구가 강하다. 녹색당은 이 지역에 유일한 지역구 연방의원을 두고 있고, 구청장도 녹색당 소속이다. 그러다보니 건물주들의 입장을 외면하기 어려워 건물을 리모델링하고 도시를 재구성하는 방식의 개발이 이뤄지고 있다. 하지만 청년조직은 임대료 상승 등을 이유로 도시를 최대한 보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b>당 청년조직을 거친 독일의 거물 정치인들</b><br />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총리(사민당)

당 청년조직을 거친 독일의 거물 정치인들
게르하르트 슈뢰더 전 총리(사민당)

난민 수용 문제도 청년조직과 소속 정당의 입장이 다르다. 녹색당 베를린 청년조직 대변인 크리스토프 후제만(27)은 “지역 상황에 따라 당의 난민에 대한 입장이 왔다갔다 하지만, 청년들은 모든 난민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입장”이라고 했다.

다른 당원들이 관심을 덜 기울이는 청년문제를 제기하기도 한다. 사민당 베를린 청년조직 대표 아니카 클로제(23)는 “당에 학생 저금리 대출이나 선거연령 16세부터를 요구하고 있다”며 “이를 실현하기 위해 의회 밖에서 다른 정당 청년조직·청년단체들과 연대해 의회를 압박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토론과 합의의 공간에서 양성되는 청년 정치가

그렇다면 정당 내에서 기성세대와 청년조직의 입장이 다를 경우 어떤 결정을 내리게 될까. 다수결 이전에 구성원 간 합의를 중시하는 ‘숙의민주주의’ 성향이 강한 독일에서 청년들은 모두 “토론”과 “합의”를 얘기했다.

첼렌 의원은 “당내에 학생, 청년, 중산층, 시니어 등 그룹이 수십개”라며 “당내 투쟁과 토론을 통해 최고의 해법을 얻는다”고 말했다. 클로제는 “지역에서부터 연방까지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의사결정 구조”라며 “청년들의 의견은 이 과정에서 자연히 반영된다”고 말했다. 후제만은 “정치적 쟁점을 두고는 대립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며 “민주적으로 진행되는 위원회와 총회에서 함께 토론을 거쳐 결국 다수결로 당론이 결정된다”고 했다.

<b>당 청년조직을 거친 독일의 거물 정치인들</b><br />헬무트 슈미트 전 총리(사민당)

당 청년조직을 거친 독일의 거물 정치인들
헬무트 슈미트 전 총리(사민당)

청년조직을 통해 정당은 정강·정책을 홍보해 청년들의 지지를 확보하고, 청년들은 관심사에 대해 또래와 의견을 나누며 사회문제 해결을 위한 공간을 찾는다. 이런 작은 모임에서 독일 청년들은 장차 독일 사회를 이끌어갈 정치인으로 커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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