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A 영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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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1. 종교나 철학이 개인만 구원할 수 있다고 생각하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A. 음... 예를 들어보죠. 저는 과학이 아닌 철학에 기반한 의료행위 - 한의학이나 카이로프랙틱 - 을 싫어하는데, 이유는 1) 효과가 너무 적은데 2) 돈을 위해 효과가 있다고 사람들을 속여서-입니다. 사람으로 치자면 무능한데, 불성실하기까지 한 셈입니다. 물론 이런 대체의학 혹은 민간요법은 비싼 의료비를 감당할 수 없는 서민층에게 그래도 유용하고, 그러므로 최소한의 쓸모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습니만... '당신에게 돈이 없다면 몰라도, 있다면 현대의학의 치료를 받아라'라는게 제 생각입니다. 이제, 제가 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부터 구원하거나, 최소한 고통 받는 것에서 구원하겠다-라는 목표를 가졌다고 가정합시다. 이 목표를 이루는 방법에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직접적인 방법은 '의사가 되는 것'일 겁니다. 그래서 직접 사람들을 구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돈도 안 받고... 이러면 가장 확실하겠죠. 상식적인 발상이고, 나쁘지 않은 생각입니다.
그럼, 좀 더 현실적으로 고민해보면 어떨까요? 개인이 노력해서 구할 수 있는 사람의 숫자는 물리적으로 한정되어 있습니다. 만약 내가 하루에 한 사람씩 구할 수 있다면, 매일매일 노력해도 1년에 365명, 10년에 3650명 밖에 구할 수가 없겠죠. 이건 개개인에게는 엄청난 결과일지도 모르나, 사회 현상으로서 크게 유의미한 수준은 아닙니다. 결국 사회적으로 유의미한 수준이 되려면, (그것이 신도이든, 동료이든 간에) 나를 믿고 따라주는 사람을 구해야합니다. 여기에서 (내가 의사이든, 철학자이든, 심지어 예수나 부처같은 구원자든 간에) 근본적인 문제가 발생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보고 싶은 것을 보고, 듣고 싶은 것을 듣고, 믿고 싶은 것을 믿으며 살아갑니다. 어려운 것, 불편한 것은 싫어하죠. 내가 남보다 더 뛰어난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분명 많은 '노력'을 통해서 도달한 것이고 그러므로 '어렵고 힘든 것'일 겁니다. 그걸 다른 사람에게 공짜로 전한다고 해서, 사람들이 그걸 받아들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설령 내가 대단한 예언가라서 미래를 알려준다고 하더라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을 '이해하거나 아니거나'가 아니라, '믿거나 말거나'의 태도로 받아들입니다. 왜냐하면 '이해'라는 지적 활동 자체가 어렵고 힘든 것이기 때문이죠. 사람들은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이 아니라면 비용을 지출하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결국 대중을 이끄려면 대중의 수준을 넘어서서 유능한 소수가 되어야 하는데, 막상 소수가 되면 대중의 소통 방식을 쓸 수 없고, 공감할 수 없으며, 결국 대중을 이끌 수 없다-는 패러독스가 발생합니다.
따라서 이 지점에 도달한 소수의 사람들은 보통 세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합니다 1) 설득하고 감화시키는 교육적 방법 2) 힘으로 따르게 만드는 정치적 방법 3) 믿음으로 따르게 만드는 종교적 방법입니다. 소크라테스나 공자와 같은 많은 학자들이 1번을 택했고, 수많은 혁명가와 독재자들이 2번을, 마지막으로 예수나 부처 그리고 수많은 사이비 교주들이 3번을 택했습니다. 이 모든 사례에 대해서 성공과 실패를 논할 수는 없겠으나... 제가 보기에는 확실하게 성공한 사례는 없지 않나 싶군요. 모두 일정 부분은 성공하고 일정 부분은 실패했습니다. 그리고 아마 성공과 실패를 모두 다 합치면 플러스 마이너스 제로 혹은 약간 마이너스에 가깝지 않겠는가...가 제 생각입니다.
즉, 종교든 철학이든 간에, 의심의 여지 없이 개인의 삶에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회와 역사의 관점에서 보면 많은 사람들이 철학과 종교로 세상을 바꾸는게 가능하다고 생각했고, 수없이 시도했으나 현재 시점에서 그게 성공했다는 뚜렷한 증거가 없습니다. (단적인 예를 들면, 저는 동의보감의 저술(철학)보다 페니실린의 우연할 발견(생화학)이 더 많은 사람을 구했고, 세상을 변화시켰다고 봅니다). 즉, 본질적으로 철학과 종교는 내적 성장을 가져오지만 딱 거기까지가 한계이고, 그렇게 개인적으로 얻은 것을 다수의 사람들에게 왜곡 없이 전파시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우며, 그것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질되지 않도록 하는 것은 확실하게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은 비물질적인 것보다는 물질적 조건에 더 빠르고 즉각적으로 반응 한다-는게 제 결론입니다.
현실에서, 노동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노동자의 권리, 즉, 인권을 위해서 싸운다고 생각하나요, 아니면 그건 핑계이고 그저 내 임금을 높이기 위해서 싸운다고 생각하나요? 인권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만약 인권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을 위해서 활동한다고 한다면, 그들은 자신이 불리한 사안에 대해서도 그것이 정당하기만 하다면 불리한 선택을 해야겠죠. 하지만 현실에서 그런 사람들은 거의 없다고 봅니다. 또, 저는 사람들에게 '대학교는 공부하러 가는 곳'이라고 항상 말을 하는데... 제 말에 동의하는 사람을 본 적이 없습니다. 다들 '누가 대학교를 공부하러가나'라는 반응이더군요. 이런 것들이 이상적인 철학이나 이념 그리고 그것이 구현되는 현실상의 괴리를 잘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철학이나 종교는 결국 개인의 변화에 그치거나, 탁상공론에 불과하거나, 아주 드물게 사회에 좋은 영향을 끼치더라도 결국은 정치적으로 변질된다-고 봅니다.
Q2. 대중 교육이 성공했다-라고 판단할만한 범위는 어느정도로 보고계신가요?
A. 사회적으로 가시적인 효과 또는 변화가 나타날 수 있는 범위-라고 봅니다. 왕정이나 독재국가라면 권력자를 변화 시킬 수 있는 정도면 족하고, 혹은 귀족이나 특권층까지만 변화시켜도 될 겁니다. 민주주의 사회라면 선거의 결과에 영향을 줄 수 있을 정도... 즉, 과반수... 혹은 경우에 따라 법률 개정이 가능한 비율이 되겠네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집단의 움직임을 추종하기 때문에, 집단이 변하면 다수가 (시간은 필요하지만) 변할 겁니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플라톤도 폭군을 교육하려고 시도했었습니다. 실패했지만요.
이 질문은, '대중을 어느 정도까지 세뇌해야 사회 운동이 성공하는 것인가?'라는 정치적 질문이기도 하다는 점에 주의하세요. 정치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가치관이 확립되지 않은 아이들을 상대로 교과서에 동성애나 페미니즘적인 내용을 집어넣으려고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겁니다 (물론 그것 말고도 온갖 정치적 목적이 교과서에 개입되고는 합니다. 단지 미국의 PC주의 때문에 요즘에 그 쪽이 특별히 눈에 띌 뿐). 민주주의 사회에서 정치 운동가들의 목적은 법률의 변경 또는 제정을 위한 최소한의 비율의 사람들을 세뇌시키는 겁니다. 저는 이해를 동반하지 않은 모든 반지성주의적 교육은 교육의 주체가 누구이든, 의도와 내용이 무엇이든 간에 세뇌라고 봅니다.
Q3. 선생님은 과학적 회의주의자이기떄문에 3번을 채택하고 계신가요?
A. 저는 도가적 세계관은 통합적 세계관이므로 1/2/3번을 모두 포괄한다고 봅니다. 도가적 관점에서 세계의 본질은 1번입니다. 하지만 개개인은 무한한 세계에서 한정된 시간과 공간을 살아가기에 실질적으로는 유한한 것과 크게 다를 바 없습니다. 즉, 자신이 보는 것에 따라 2번이라고 믿으며 살아갑니다. 단지, 세계의 본질을 알고 살아가느냐, 모르면서 살아가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이죠. 이 차이에서 '깨달음'이 있냐-없냐-를 따지는거죠. 또한 도가에서는 불교와 다르게 윤회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죽으면 그걸로 끝이고 그대로 자연으로... 물질이나 에너지로 돌아간다고 봅니다. 그러니 이건 3번의 과학적 관점과도 모순되지 않습니다 (에너지 보존 법칙). 하나의 커다란 세계와 범위를 어떻게 나누냐의 차이이므로 본질적으로 다르지 않습니다. 그리고 어떤 관점을 채택할 때는, 가능하면 하나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관측되는 현상 모두를 설명할 수 있는 가장 범위가 넓은 것을 선택하는게 가장 좋습니다. 그게 안된다면 모두를 포괄할 수 있는 새로운 가설을 만들기를 추천합니다.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 순간 순간 완결성있는 삶을 산다면 죽음 이후가 어떤 형태이든 간에 상관없지 않나?'라는 부분은.... 사실 '쓸데없는 고민할 시간이 있으면 현생이나 살지?'라는게 바로 도가, 유가, 불가의 공통적인 견해입니다. 사후 세계에 신경 쓰는 건 주로 서양 종교거든요. 원래 동양 쪽에서는 사후세계 개념이 그다지 발달하지 않아서 그 쪽에 대한 논의가 별로 없었습니다.
Q4. 관점을 심화시키라는 말이 곧 하나의 관점을 채택하라는 말은 아니겟죠?
A. 음... 흐르는 물은 '항상' 흐르기 때문에 상태가 고정된 것, 즉, 고여있는 것일까요? 바람은 항상 나타났다가 사라지기 때문에, 고정된 흐름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요? 우리의 관점이 계속 변화하고 발전해나간다는 것은, 아무런 관점이 없다는 것과 같은 것일까요?
제 답은 다음과 같습니다. '어떤 특정 시점에서 특정 관점을 채택해도 좋다. 하지만 그 다음 시점에서 그 관점이 바뀔 수도 있는게 중요하다. 채택을 하느냐 마느냐에 집착할 것이 아니라, 그것이 진실에 부합하느냐-아니냐-를 고민하는게 중요하다'. 즉, 관점의 심화는 어떤 관점을 채택하고, 그걸 부정하면서 다시 확장하고, 다시 더 견고한 관점을 채택하는 반복 과정입니다. 그러니 잘못된 관점을 채택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로지 하나의 관점에 얽매이는 것을 두려워하세요. 바람과 물은 항상 변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혼돈스럽거나 불규칙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이 멈춰있다는 것도 아닙니다. 개인의 자아, 생각의 성장 역시 물이 흐르는 듯이, 바람이 가는 듯이 자연스럽게 변하고, 유연하게 가면서도, 멀리서 크게 보면 틀이 잡혀 있어야 합니다.
Q5. 영원회귀처럼 다른 관점을 제시하거나 생각할 수 있다면(제 4의 관점), 죽음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채택해도 그게 삶에 긍정적 영향을 끼친다면 상관없겟죠?
A. '개인적인 믿음'으로만 한정해둔다면, 즉, 믿음을 목적이 아닌 도구로서 이용한다면 괜찮습니다. 하지만 그게 (여타 기성 종교처럼) '사실'이라고 주장하고 싶다면, 그 관점이 타당하다는 근거를 제시해야겠죠. 그래야 설득력이 있으니까요. 또한 만약 해당 관점에서 모순이 발견되었을 때 이를 고치거나 혹은 포기할 수 있다면, 즉, 합리적이고 개방적인 태도를 유지할 수 있다면, 그 어떤 새로운 시도도 좋다고 봅니다.
Q6. '죽음'이라는 키워드가 '삶'이라는 키워드와 동떨어질 수 없는... 근본적인 주제인 이유는 죽음에 대한 관념이 정해지면 '죽음 이후-가 ~하기떄문에 삶은 ~게 살아야겠다.' 도 자동스레 답을 낼 수 있기떄문에, 혹은 최소한 어떻게 살아야하는가?에대한 질문을 던지고 고민할 유인(가치,이유)을 제공하기떄문일까요?
A. 흠... 사회적으로나 역사적으로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그건 너무 사치스럽고 고급스러운, 귀족이나 철학자들이나 하는 생각이죠. 솔직히 대중들에게 사후세계와 신에 대한 믿음이 필요했던 이유는 '현실이 너무 절망적이어서'라고 봅니다. 즉, '내 삶은 왜 이리 고통스러운가? 대체 난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가? 난 왜 이렇게 죽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어떤 형태로든 대답이 필요했다...는거죠. 그 대답이 '원죄 때문에', '업보 때문에', '신이 너를 시험하고 있기 때문에' 같은 그럴 듯한 내러티브였던 것이고요. 즉, 죽음이 끝이 아니고 사후세계가 존재한다-라는 것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자들에게는 일종의 마지막 희망 같은 거였습니다. '현생은 틀렸어. 하지만 나는 착하게 살았으니까, 천국에 갈꺼야', '세상은 썩었어. 하지만 신이 나중에 네놈들을 심판할거야' 같은, 일종의 정신 승리가 필요했죠. 여기에 '너는 그냥 우연히 태어나서, 우연히 고통 받는 것이고, 거기에는 아무런 의미도 가치도 없다'라고 대답한다면, 그건 절망에 빠진 사람들에게는 너무 잔인한 것이기도 하고, 사회적으로는 폭동이나 난리가 일어날 일입니다. 그러니 누군가 '죽음 이후'를 중요시한다면, 그건 사실 '죽음 이전'은 별로 중요하지도 않고, 기대할 것도 없다-는 의미입니다. 현생을 잘 살아가는 사람은 어떻게든 오래 살려고 하지, 사후 세계 따위에 관심이 없죠.
사후 세계의 존재와 별개로, 죽음과 삶이 하나인 이유는,그 두 단어가 가리키는 대상이 원론적으로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즉, 삶과 죽음은 반대 개념이 아니라, 하나의 타임라인에서 '죽음까지 도달하는 시간을 지연시키는 것'이 삶이라는 행위, 기간이라고 봐야 합니다. 그러니 삶을 고민하기 위해서는 죽음에 대해 고민해야하고, 죽음에 대해 고민해야 삶을 제대로 볼 수 있는 겁니다. 이건 사후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유효합니다.
Q7. 현대인들은 대부분 죽음 이후 단절-의 관점을 취하고있으니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하는가?에 대한 고민을 해야하는 시대이지만, 대부분 답을 내리려 노력하지않고 ... 그게 현대인의 삶의 흐름일까요? 삶의 의미를 잃어버리는 순간에서 도망다니는 것
A. 음, '선택하지 않는 것도 선택하는 것이다'라는 말을 들어봤을 겁니다. 답을 내리려 노력하지 않은 사람들은 '소속된 사회에서 디폴트로 설정한 답을 검증 없이 받아들이는 것'을 선택한 겁니다. 그러니 현대인이 삶의 의미를 잃어버렸다-라는 건 타당하지 않군요. 많은 현대인들은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하는가?'라는 것을 고민하는 비용이 너무 높은 나머지, 그냥 그 사회의 지배 이념에서 옳다고 말하는 가치를 수용하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한국에서는 '돈을 위해, 치열하게 남을 짓밟고, 짓밟히며 경쟁하며 산다'가 표준적인 답이 된거죠. 그렇게 주어진 답이 있으니 그걸 따르면서 그럭저럭 잘 살아가고 있는 것이고, 몇몇 사람들만 그 주어진 답을 거부하는 것일 겁니다. 물론 자신이 적극적으로 선택한 것이 아니기에 그게 진짜 자기 삶의 의미가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는다고 해서 아무런 방향성이 정해지지 않는 것도 아닙니다. 현대 사회는 스스로 욕망하지 않으면, 디폴트로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게 설정되어 있습니다. 그래야 자본주의가 돌아가니까요.
Q8. 죽음이 위에서 말한 삶의 태도를 결정짓는 역할을 한다면, 삶의 시작은 무슨 쓸모가 있나요? 선생님은 삶의 시작, 즉 탄생에대한 관점을 심화시켜야하는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요?
A. 제가 힘들 때 쓰는 격언이 몇 개 있는데, 그 중 하나로 대답하겠습니다. 'Do your best, God will do the rest'. 도가적 또는 과학적 관점에서 '쓸모'를 묻는 것은 무의미합니다. 지구와 생명은 우주적 관점에서 무엇에 '쓸모'가 있나요? 즉, 쓸모란 타고 나는 것이 아니라, 부여되는 것이고, 만들어지는 것이기에, 그 모든 것은 '탄생에서 죽음 사이'에만 의미있는 것이죠. 탄생 이전과 죽음 이후에 쓸모를 요구하는 것은 철저히 인간적인 바람입니다. 물론 그에 부응하여 종교가 만들어진 것이고요. 많은 철학적 전통에 따라, 삶의 이전과 이후에 초점을 맞추지 말고, 지금(now), 여기에(here) 관심을 가지세요. 현재에 최선을 다하면, 신이든 섭리든 도든 뭐든 간에 나머지는 그(것)들이 알아서 할 것입니다. 그저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지는 각자의 선택지를 선택하기만 하면 되는 겁니다. 저는 삶의 이전이나 이후에 대해 아무것도 가정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실은, 별로 궁금하지도 않습니다. 원인이 무엇이든 간에 나는 우연히 존재했고, 언젠가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고, 그건 이미 결정된 것이지만, 나 개인으로서는 그 중간 과정에서 무엇이 일어날 수 있는가-만 중요하다고 봅니다.
Q9. 생각하기 나름이지만 물론 그런 종교를 가진다해도 그럼에도 앞으로 나아가고 발전하는게 신의 뜻이라며 발상의 전환을 통해 발전하는 사람은 존재하겠지만(그래서 아폴론적인 것에의해 과학이 발달된 것일까요?), 반대로 어떤 사람들은 모든게 신의 뜻대로라는 이름 아래 행동에 대한 선택과 책임을 질 필요도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A. 저는 종교에 의해서 과학이 시작했다는 것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자연과학의 시작은 종교가 아닌 자연철학이었으니까요. '믿음'은 세상을 안정시킬 수도 있으나, 믿음을 통해서는 '발전'하거나 '진보'할 수 없다고 봅니다. 의심하지 않는 것은 이성주의와 합리주의, 지성주의의 적 일 뿐만 아니라, 종교는 대개 '니가 잘되면 신의 은총, 잘 안되면 니 잘못'이라는 식으로 인간에게 일방적인 의무만을 강요하는 형태로 악용되었습니다. 이건 지금도 그렇죠. 저는 종교에서 지적 오만, 지적 태만, 권력에 대한 욕망, 세계에 대한 공포 외에 그 어떠한 발전적인 것도 볼 수 없습니다. 가령 모든게 신의 뜻대로-라면, 개인에게 선택과 책임을 물을 수 없는게 당연할텐데, 그것조차도 '신이 너에게 선택할 권리를 주었으니 그 결과는 당연히 니 책임이다'라고 어물쩡 넘어가는 걸 보면 정말 짜증나거든요. 기성 종교를 보면 신은 전지전능하지 않거나, 아니면 전지전능하지만 인간을 장난감 취급하는 악취미를 가지고 있거나, 둘 중 하나 일 수 밖에 없다는 생각 밖에 안 듭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이건 완전 가스라이팅이에요.
Q10. 죽음에 관심을 가진만큼 탄생에 대해서도 사람들이 관심을 갖게되니, 지도자들이 그에 상응하는 의미를 불어넣기위한 설득력있는 가설을 세운 것 뿐일까요?
A. 살아남는데 필요하니 만들었다. 만들었으니 사용했고, 누군가는 거기에서 이익을 보았으니 유지가 된다-라고 봅니다. 사실 수많은 종교와 이념이 인간의 발명품이 아니라면, 저는 오히려 놀랄 겁니다. 대체 인간 외의 어떤 초월적 존재가 이런 엉상한 논리를 만들 수 있단 말인가?하고 말이죠.
Q11. 신본주의 시대에 신을 믿고 천국에 가기위한 선행에서 선의 기준은 이성..즉 아폴론적인 것이었나요?
A. 반대입니다. 신본주의에서 천국에 가기 위한 기준은 선행이 아니라 '신이 정한 규율을 얼마나 잘 지키는가'입니다. 오히려 맹목적 복종만이 천국행을 위한 확실한 티켓이죠. 그 점을 잘 이용하는게 사이비 교주들과 테러범들이고요. 저는 종교인들이 참 한심하다고 느끼는게, 현실이라는 지옥에서 도피한 자들이 죽어서 도달하는 곳은 천국일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그런 현실도피자들만 모여있을 것이잖아요? 가령 72명의 처녀를 얻기 위해서 자살폭탄테러를 하는 인간들이 모여있는 곳 따위가 어떻게 천국이겠습니까? 내가 꿈꾸는 이상적인 무언가가 현실화 될 때, 그것이 어떤 모습일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 자는, 이상을 논할 자격이 없습니다.
Q12. 과학의 발전에서 다원의 진화론이 등장하여 반대로 신본주의가 무너지기 시작했던 것이고요?
A. 신본주의가 무너진 원인은 다양합니다. 전쟁부터 시작해서, 흑사병, 자연과학의 발달 등... 과학 뿐만 아니라 여러 정치/사회적인 요소들이 있었죠.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사람들이 신을 믿는 댓가로 원했던 것은 더 나은 삶이었겠지만, 신(교회)이 그것을 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공산주의가 무너진 이유도 그랬고, 합리주의도, 그리고 자본주의 역시 같은 이유로 버려질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무언가를 믿는 이유는 결국 그것이 나의 삶을 더 좋게 만들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거든요. 확실히 진화론은 종교에 크게 한 방 날렸지만, 신본주의가 붕괴한 것의 근본 원인은 가톨릭의 타락과 무능 때문입니다.
흠... 이건 정리를 좀 할 필요가 있겠군요.
아주아주아주~~ 큰 관점에서 보면, 사람들은 고대에 자연을 숭배했습니다. 태양이나 늑대, 산 같은 것들을요. 이건 원시종교에 해당하고, 자연주의에 해당합니다. 하지만 농경 시대에 접어들어서 인간은 인간만의 신을 믿었고, 본격적으로 신본주의 시대를 열었죠. 그러나 신이라는 개념이 제대로 내 문제를 해결해주지 않음에 따라, 결국 인간은 스스로의 능력을 믿게 되었고, 그게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죠. 원시종교 - 기성종교 - 과학에 대응합니다.
그런데, 신을 믿든 안 믿든 간에... 사람은 사회를 중요시하잖아요? 그러니 사회의 규모가 확장됨에 따라서 가족주의 -> 혈족주의 -> 국가주의 -> 민족주의 -> 인본주의 순서로도 확장이 되었습니다. 가족이 제일 중요했다가, 가문이 제일 중요했다가, 나라가 제일 중요했다가, 같은 민족인게 제일 중요했다가, 최종적으로는 같은 인간인게 제일 중요하지 않냐...로 변해 온 거죠.
그러면, 예를 들어 (사회적으로는) 신본주의 시대에, (개인적으로는) 가족주의를 가진 사람이 있다면, 이 사람은 신을 위해서 가족을 버려야 할까요? 대답은 '그렇다'입니다. 그게 바로 아들을 신에게 제물로 바치는 아브라함의 성서의 이야기입니다. 자연/신/인간이라는 구분은 너무나 추상적이고 포괄적입니다. 그러므로 신본주의나 인본주의 같은 것들은 거대한 지배 이념이 되고, 비록 이 지배 이념을 거스를 수는 없지만, 지배 이념의 빈틈에서 더 작은 이념들이 다른 가치관을 형성하는 겁니다. 너무 커다란 개념은 실생활에 적용하기에는 추상적이거든요. 결국 '신본'이니 '인본'이니 하는 것은 현대적으로는 '헌법'에 들어가는 겁니다.
반면 실존주의는.... 좀 애매하죠. 일종의 사상적 흐름이고 구체적인 믿음이라기보다는 특정 시기의 유행이라고 봐야겠습니다. 무언가를 주장한다기 보다는 일종의 반발내지는 반성에 가깝죠. 신본주의가 버려지고, 인간의 합리성에 대한 신뢰마저 무너졌을 때... 그러면 대체 뭘 믿어야 하냐? 아무것도 믿을게 없으면 어떻게 살아야 하나?에 대한 고민이 실존주의이고, '신은 죽었다', '인간도 믿을 수 없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고독하고 외로운 존재이므로 스스로 의미를 찾는 존재이다'라는 겁니다. 그러나, 결국 인간을 중심에 둔다는 것은 변하지 않았으니 여전히 인본주의라는분류에서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다만 그 초점을 사회보다는 개인의 내면 세계에 둘 뿐입니다
Q13. 실존주의는 경험주의와 비슷하지만 조금 더 적극적인 삶의 자세라고 하셧는데 결정적인 차이가 무엇일까요?
경험이 인간을 구성한다-라는 것이 경험주의라면, 실존주의에서 인간은 경험을 만들고 선택하는 존재입니다. 이게 실존주의의 가장 큰 특징입니다. 실존주의의 인간은 (각 자 주장하는 바는 다르더라도, 공통적으로) 능동적이고, 주체적 입니다. 합리주의나 경험주의에서 인간이 고전적 기계에 가깝다면, 실존주의의 인간은 절대로 기계일 수 없는 존재이죠. 실존주의 이전에 신본주의에서 인간은 신에게 가치를 부여받은 존재였고, 합리주의나 경험주의에서는 인간은 (이미 존재하던, 그러나 모르고 있었을 뿐인) 가치를 발견하는 존재였습니다. 하지만 실존주의에서 인간은 가치를 (스스로의 의지만으로, 자의적으로, 주관적으로) 만들어내는 존재입니다. 그러니 신도 필요하지 않고, 합리성도 절대적이지 않은거죠. 좋게 말하면 주체적이고, 나쁘게 말하면 그냥 내 멋대로 산다-가 아닐까요. 그 부분이 반사회적이고 반지성적으로 보이는 것이지만요. 그러니까 실은 실존주의는 아이러니하게도, 매우 개인적일 뿐만 아니라, 그 개인에게 엄청난 수준의 지적 능력과 노력을 요구합니다. 합리주의 세계에서 인간은 자기의 내면에서 이미 주어진 것을 발견하기만 하면 되었습니다. 그러나 실존주의 세계에서는 치열하게 고민하고 탐구하는 사람만이 실존을 얻을 수 있습니다. 실존주의적 관점에서 현대인의 대부분은 실존 따위는 고사하고, 제대로 된 고민도 하지 못하는 멍청이들일 수도 있습니다.
Q14. 시대정신과 이념의 차이가 무엇인가요?
A. 여러 이념 중에서 특정 시대를 지배하는 이념이 시대정신입니다. 음, 지금은, 분명 자본주의죠? =ㅁ=
Q15. '-주의'라고 하는 어미는 어떤 조건으로 붙는건가요?
A. 많은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이건 이렇지 않을까~'라고 생각하는 것들이 모여서 형식화 / 개념화되면 그것이 이념이 됩니다. 예를 들어서 '가족이란 소중하지'라는 생각은 모든 인간이 가지고 있죠?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이 많아서 유교처럼 형식화 되고, 법제화 되고, 그런 것들이 세계 여기저기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면 그런 문화들을 통칭할 필요가 있으므로, '가족을 최우선으로 여기는 가치관'이라는 의미로서 '가족주의'가 되는 겁니다. 단순히 '가족이 중요하다'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더라도, 그것에 의한 결과를 집단적으로 관찰할 수 없다면 그건 그냥 상식이 되는 것이고요. 그러니 공통된 생각이 집단적 행동으로 이어지는게 중요합니다.
결국 이념이라는 건 많은 사람들의 공통된 생각에 기반한 행동이고... '신', '가족', '국가', '민족', '돈' ... 같은 개념들은 모두 뒤에 ~주의라는 말이 붙을만큼 보편적입니다. 다만 이 중에서 무엇이 최고인가?는 시대마다 다를테니 그게 시대정신이 되는 것이고요. 예외가 있다면 공산주의가 될 것 같습니다. 자본주의야 자본이라는 개념이 없던 시대에도 그 씨앗은 있었겠지만, 공산주의는 철저하게 자유시장경제에 대한 반발로 나온 것이니까요. 인위적으로 만든 개념이다보니 인간의 본성과 맞지 않아서 망한 것이라고 봅니다.
좀 더 현실적으로 보면, 어떤 공통된 생각을 가지고 행동을 하는 집단이 있다고 할 때, 그들을 표현하려면 그들의 사상을 표현할 단어가 필요하겠죠? 그럴 경우 '~주의'라는 단어를 씁니다. 그렇게 만들어지는 별 시답지 않은 신조어 중 하나가 바로 '비출생주의' 같은거죠.
Q16. 도는 세상의 이치라고 하셧습니다. 그럼 도는 진리와 어떤 관계에 있는건가요? 플라톤의 절대적 선은 도덕과 같은 의미일까요?
A. 정확히 말하면 도는 우주 그 자체, 즉, 절대적 개념으로서 신이라는 '존재'에 대응하는 단어입니다. 모든 존재의 근원이라고 할까요. 그리고 진리는 도가 세상에 나타나는 형태, 즉, 신의 섭리에 대응하는 단어이고, 절대적 선은 섭리에 순응하는 것을 말하는 것 같군요. 즉, 절대적인 존재가 있고, 그것이 세상에 드러내는 이치가 존재하는데, 그것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것이 바람직한 인간이다-라는, 꽤나 고전적인 세계관인 셈입니다. 구체적인 내용은 조금씩 다르더라도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대에는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Q17. 이런 생각도 들더군요. 음? 그럼 굳이 책까지 읽을 필요가 있나? 가성비가 좀 떨어지지않나?
A. 음, 틀린 말은 아니라고 봅니다. 가령 현대인들은 플라톤보다 복잡하고 정보량이 많은 환경에서 삽니다. 그런데, 굳이 단순한 시대에 살았던 플라톤의 사상을 세세하게 전부 다 알아야 할까요? 바쁜데다가 우리가 정보량도 훨씬 많은데? 그래서 고전은 여전히 가치있지만, 고전에 매몰되지 말라고 답한 적이 있지요. 고전이 고전일 뿐인 이유는, 지금은 더 좋은 설명들이 있어서-라고요. 어쩌면 우리가 (인터넷을 쓸 수 있다는 가정 하에서) 니체보다 똑똑할지도 모르죠.
Q18. 1.분석적 사고(해체적 사고) 2. 체계적 사고(문맥, 상황, 시기 등을 반영) 3. 통합적 사고를 말씀하셧습니다. 근데 2번까지는 이해했는데(예를들면 역사에 관한 해석을 할 떄는 그 시대의 문화와 배경을 알고 해석해야하듯이) 3번은 어떤건지 모르겠네요, 무엇인가요?
A. 흠... 설명하기 어렵군요. 역사를 예로 들면, 어떤 사건을 독립적으로 정밀 분석하는게 1번, 그 사건과 관련있는 다른 역사와 연관하며 파악하면 2번, 3번은 역사 뿐만 아니라 경제, 문화, 종교, 기후, 재난 등 '직접적으로는 관련이 없어보이지만 영향을 미치는 얽혀있는 여러 간접적 요소들'까지 고려하는 걸 말합니다. 즉, 어떤 사건을 단일 분야가 아닌 다양한 분야로 엮어서 파악하는 것이죠. 왜 통합적 사고가 중요하냐면, 분석적 사고는 복합적인 문제를 특정 분야로 단순화하여 해결 가능하도록 만드는 과정입니다. 그러나 '경제학'이라고 했을 때, 현실에서는 경제가 정치와 분리될 수가 없죠. 그러니, 정치학과 경제학으로는 부족해서 정치경제학 같은 것들이 나오는 것이고, 이것이 더 현실에 가까운 겁니다. 이처럼 분리되어 있는 전문 요소들을 합치는 것이 통합적 사고입니다. 이것을 학제간 연구라고 하는데, 심리학 + 사회학 + 경제학 = 행동경제학, 인지심리학 + 진화생물학 = 진화심리학처럼 여러 단어가 섞여있는 분야들이 그렇죠.
Q19. 근데 철학이란 무엇인가요?
A. 원래는 세계에 대한 진리를 추구하는 모든 지적 활동을 철학이라고 했습니다. 옛날에는 지금처럼 세부적인 학문 구분이 없었거든요. 현재는 그 중 많은 부분이 과학의 영역으로 넘어갔기에, 남아있는 철학이라는 분야의 핵심이 무엇인지 답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저는 근대적 관점에서, 칸트의 네 가지 물음에 대한 답을 추구하는 학문이라고 답하고 싶군요. 1) 나는 무엇을 아는가? (인식론) 2) 나는 무엇을 해야하는가? (도덕/윤리론) 3) 나는 무엇을 바라는가? (미학) 4)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문학) 이 질문은 과거에도 그랬지만 미래에도 철학의 고유 질문으로 남아있을테니까요.
Q20. 니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A. ... '미친 현자'라고 봅니다 (실제로 말년에는 정신이 이상했던 듯 하고요). 제가 실존주의를 비롯하여 포스트 모더니즘의 반지성주의적 속성에 비판적인 걸 알 겁니다. 극단주의를 싫어하는 것도요. 저는 어떤 사람의 주장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그 사람이 살았던 시대적 배경이나 성장 환경, 병적 이력 같은 것들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대표적인 사례로 드는게 바로 정신분석학의 프로이트입니다. 그 사람의 주장은 당시로서는 눈 여겨 볼 만합니다만, 현대에도 모든 걸 성욕에 기반해 해석하는 그 변태적인 이론을 그대로 받아들여야 할까요? 그냥 프로이트 개인의 취향이나 컴플렉스가 반영된 게 아니라? 플라톤은 계급제를 옹호하고 민주주의를 부정적으로 보았는데, 과연 현대에 끌고와서 역사상 유례없는 초강대국인 미국에 던져놔도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요? 그렇다고 말한다면 저는 '아테네 같은 코딱지만한 도시 국가 밖에 모르는 주제에... 인구 천만명 넘는 도시에서 살아봤어?'라고 말해줄 겁니다. 니체를 현대에 끌고와서 자본주의 사회에 던져놓고 편의점 알바와 택배 알바로 굴려도 과연 세상에 진리나 본질이 없다고 할까요? 그럼 저는 '넌 스마트폰하고 인터넷 쓰지마, 그건 전자공학의 산물이야. 자동차도 쓰지마 그건 열역학의 산물이야. ChatGPT 쓰지마, 그건 인공지능의 산물이야. 진리가 없다며? 그럼 물질적인 것도 다 허상이야? 허상이면 왜 그런 걸 써? 그냥 니 몸으로 때우라고. 그리고 너, 의지가 중요하다며? 그럼 열정이 넘치니까 페이는 필요 없겠네.'라고 말해줄 겁니다 ㅋㅋㅋㅋ
스마트폰 이전에 피처폰이 있었죠. 피처폰이 없었다면 스마트폰도 없었습니다. 그러니 그 역사를 존중하고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제와서 피처폰을 쓰는 건 멍청한 짓이잖아요. 아무리 위대한 역사적 인물이라도, 그럴 듯한 말이라도, 잘 걸러 들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도 고작 인간이고, 과거일 뿐이니까요. 니체는 관념적 자유를 위해 노력한 것도 맞고 그건 인정할 만하고, 그의 인간 찬가는 지금 들어도 멋있기는한데... 쯧쯧, 이 양반, 결국 흑화해서 선을 좀 넘었네? 라는게 제 생각입니다. 제 관점에서는 '결국 합리성을 잃어버린 극단적 자유주의자'인 셈이죠.
Q21. 현대 철학이나 사상들은 모두 니체의 영향을 받았을까요?
A. 그렇죠. 이름이 남은 모든 사람들은, 그 후대에 크게 영향을 주었기 때문에 이름이 남은 겁니다. 사상이나 인물을 숭배해서는 안되지만, 그 업적만큼은 폄하되어서는 안됩니다. 솔직히, 소크라테스가 당대에 뭐 대단한 거 했다고 지금까지 이름이 남았겠어요 ㅋ 선구자로 이름을 남겨서 지금도 간접적으로 영향을 주기에 유명한거죠. 그러니까 그런 사람들을 현대에 데려다 놓으면 또 어떨지 모른다-라고 하는 겁니다. 아... 그리고 creative destruction은 슘페터의 '창조적 파괴'라는 용어를 무단 도용(...)한 겁니다. 잘 기억이 안 나는데, 아마 저 단어를 선택할 때 과학 철학이나 경영 관련한 책을 읽고 있었던 것 같아요 (...)
Q22. 선생님이 허무주의란 단호히 존재하지않는다고 하셧으며 철학의 역사에선 창조를 위한 파괴만 있었지, 파괴를 위한 파괴만 있었던 적은 없었다고 하셧습니다.
A. 새로운 정권을 세우기 위한 싸움은, 쿠데타 일 수도, 혁명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냥 정부가 싫어서 싸움을 거는 것은 좋게 말하면 무정부주의자, 나쁘게 말하면 미친 범죄자 놈이죠. 대안 없는 파괴는 아무것도 남기지 않으니... 그런게 있었다고 하더라도 역사에 남지 못했을 겁니다. 그리고 허무주의란 없다-는 건 조금 부연 설명을 해야할 것 같은데요. '니힐리즘(니체의 사상)'이 있을 지언정 '허무주의'라는 사상은 없다-는 겁니다. 니힐리즘은 단순히 공허하거나 허무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허무한 인간이 '의지' 같은 걸 운운할리가 없죠. 저는 '허무주의'라는 건 세상에 의미를 찾지 못한 사람들이 만들어 낸 용어이고, 그건 철학도 아니며, 거기에 니체를 운운하는 건 단지 자기 변명을 위해 유명한 사람을 핑계로 쓰는거라고 봅니다. '허무주의라는 그럴 듯한 말로 네 무기력함을 변명하고 정당화하려고 하지마라'라는 겁니다.
Q23. 니체 철학의 핵심 요소는 창조와 파괴라고 말할게 아니라 그냥 철학 자체가 창조와 파괴의 반복이라고 말해야 정확한 것이 아닌가....굳이 망치를 뜬 철학자 등의 별명이 붙을 이유가 있나...
A. 흠.... 비록 자본주의에 밀리기는 하지만, 지금은 자유주의 시대이기도 합니다. 그렇죠? 자유주의가 꽃피기 위해서는 과거의 것들을 누군가 다 때려 부술 필요가 있습니다. 시대에 맞지 않는 고층 빌딩처럼 높게 쌓은 낡은 관념들을요. 그런 시대에 태어나 그런 위험한 일을 한 사람이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그러니 현대적 관점에서는 그냥 당연한 일을 한 사람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모든 위대한 사람들은 혁신을 했고,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그 과정에서 기존의 권위에 도전했습니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유난히 니체는 무슨 투사나 광전사라도 되는 것처럼 '신은 죽었다'느니 하는 식으로 어그로를 많이 끌었고, 노빠꾸로 타협 따위 없이 모든 권위를 부정했으니... 그 깡은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싶군요.
Q24. 선생님이 허무주의란 존재하지않는다고 말씀하신 이유는 아무런 무가치한 쓸모없는 사상이기떄문인가요?
A. '허무'라는 번역 용어 때문입니다. 쇼펜하우어든 니체든, 삶이 허무하니까 아무것도 하지마라, 아무것도 의미 없고 가치도 없다. 그러니 다 포기하고 대충 살다가 죽어라.... 이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각 자 나름의 고뇌를 통해서 대안을 제시했죠. 그러니 그건 '허무주의'라고 불러서는 안된다고 봅니다. 정 표현할 말이 없으면 니힐리즘처럼 아예 고유 명사로 불러주던가요... ㅠㅠ 심지어 사람들은 도가도, 불가도 허무주의라고 생각한다는거 아나요? 아니, 왜 욕망을 버리고 자연에 순응하는게 허무주의죠... 고정관념과 전통을 부정하는게 허무주의죠.. 허무주의란 대체 뭐죠... 현실도피가 허무주의인가요? 제가 아는 한, 그 어떤 철학자도 '인생은 원래 허무하다. 다 쓸모없다. 대충 살자' 이렇게 말한 사람은 없습니다.
Q25. 신본주의가 무너지기 시작한 시대에서는 믿을 것을 잃어버린 사람들의 허무주의적 혼란을 저는 체험하지 못하니까요. 하지만 현대인들도 딱히 그런건 없지않나요?
A. 자본주의라는 지배 이념은 너무 거대하고 추상적이기에 삶의 세세한 부분까지 커버해주지 못합니다. 원래 그런 실용적인 부분을 커버하는 것이 전통사회의 가족주의 같은 것이었는데.... 이게 다 무너지고 있잖아요? 그러니 삶의 가치를 혼자서 찾아야 하는 현대인들은 다른 의미의 허무주의적 혼란이 존재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허무주의적-이라는 건, 대안 없이 기존의 질서가 순식간에 파괴된-이라는 의미입니다) 전쟁과는 다르지만, 급격한 사회 변화로 인해서 대체 무엇이 옳은지, 무엇을 해야하는지, 누구도 제시해주지 않고, 롤 모델도 멘토도 없이 혼자서 결정해야 하는 혼란이 말이죠.
Q26. 배 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더 좋은 이유는 무엇인가요?
A. 배 부른 돼지는 자기가 왜 배가 부른지 모르고 행복하게 살다가 어느날 도축장에 가서 갑작스레 삶을 마감하지만, 배고픈 소크라테스는 자기가 왜 배가 고픈지를 고민할 수 있고, 그래서 배가 안 고프게 노력한 끝에 행복해 질 수가 있죠. '더 위대해질 가능성을 얻지 못하기 때문'이 맞겠군요. 합리적 자유주의의 관점에서, 배부른 돼지는 '평생 모든 순간에 괜찮은 선택권 1개만 가질 수 있는 존재이고', 배고픈 소크라테스는 '무한대의 선택권을 가진 존재'입니다. 그런데... 사실, 굳이 이렇게 따질 필요도 없습니다. 우리 모두 학창시절을 겪었습니다. 학생들은 노동을 해서 돈을 벌 필요가 없죠. 부모가 먹여주니까요. 아니면 이건 어떨까요. 군대에 가면 의식주 다 해결되고, 매일 하는 것만 반복하면 불안한 것도 딱히 없잖아요... 이게 현실적인 '배 부른 돼지'라는 상태인데... 행복하던가요? 사람들은 배부른 돼지가 낫다고도 하던데, 배부른 돼지란 겉으로는 좋아보여도 결국 '인간에게 사육당하는 존재'라는 걸 잊어버리는 듯 하더군요.
Q27. 도와 진리란 존재하지 않고 사람이 짐승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한다면 무엇이 문제인가요? ... 인본주의는 아니 인간의 존엄성이라는건 사실 다른 동물들보다 인간이 중요하다고 근거없는 폭압적 주장만 있는 명목에 불과한 것이 아닌가요?
A. 음, 인간이 짐승과 다르지 않다고 인정한다면, 쉽게 말해서 지금까지 우리가 인본주의에 기반해서 쌓아놓은 것들을 하나씩 되돌려야 합니다. 이런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상태를 인정한다는 건, 결국 대규모 협력이 없어지거나 제한된다는 것이고, 그러면 대규모 사회를 이룰 수 없다는 것이고, 지금 우리가 누리는 것들이 다 사라진다는 겁니다. 역사는 진보하지 않고 과거로 되돌아가게 되겠죠. 인본주의란 결국 '인간끼리는 싸우지 말고 잘 뭉쳐서 잘 살아보자'라는 공통된 생각에 대한 이념입니다. 그렇게 어떻게든 협력해서 가능해진 것이 바로 인터넷, 스마트폰, 해외여행, 국제무역, 금융시스템, 분업 같은 것들입니다. 즉, 인본주의를 포기한다는 건, 결국 이런 문명을 상당 부분을 포기한다는 겁니다. 저는 자연주의자들이 이런 걸 인지하고 있는지 궁금하더라고요. 말은 환경 어쩌고 하지만 문명의 이기는 잘만 쓰던데.... 그러니까, 문명을 포기할 자신이 있다면, 사실 인본주의 같은 건 안 믿어도 된다-는게, 제 인본주의자로서의 대답(...)입니다. 하지만 거기에 '정말? 정말로 포기할 수 있어?'도 추가하고 싶군요 ㅋㅋㅋㅋ
Q28. 인본주의 위에 더 큰 개념은 아마도 자연?주의, 혹은 생명주의 아니겠습니까. 인간만이 존엄한게 아니라 다른 생명 또한 존엄하다.. 여기서 제 의문은 ㅋㅋ 그럼 채식주의자가 인본주의자보다 더 큰 틀을 가진 사람인가?
A. 맞습니다. '인간끼리 싸우지 말고 잘 뭉쳐서 잘 살아보자'라는 개념이 '생명끼리 싸우지 말고 잘 뭉쳐서 잘 살아보자'가 되지 말란 이유는 없죠. 이건 제가 스스로 인본주의자를 자처하면서 이미 고민해본 내용입니다. 문제는 뭐냐하면.... 늑대나 사자하고 '우리 싸우지 말자'라고 해도, 말을 안 들어주잖아요.... ;;; 심지어 인간끼리도 국가 단위로 약속해놓고 전쟁하는 판인데 말이죠. 저는 생명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어떤 방법(?!)을 사용해서, 야생곰이나 사자, 외계인이나 모기 등등의 생명체에게 인간과의 정치적 협상을 할 수 있도록 만들 수 있다면, 당장 인본주의 대신 생명주의를 채택할 의향이 있습니다. 그러니 원래는 생명주의가 인본주의보다 더 좋은 개념이 맞고, 인본주의는 언젠가 생명주의로 대체되어야 하죠. 만약 대체육 기술과 도시형 농장 기술이 발달하면, 미래에는 인간이 먹이를 위해서 농업이나 축산업을 하지 않아도 되는 순간이 올 수도 있고, 그 때는 인본주의가 어느 정도까지는 생명주의로 대체될 수도 있을 겁니다. 다만 그 시점에서도 모기, 바퀴벌레, 지네, 구더기와도 평화롭게 같이 공존하려는 인간이 있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걔네도 분명 생명인데....
Q29. 그럼 선생님은 인본주의자에서 인간의 어느 부분을 가치있다고 여기는가-에서 합리성(이성)의 빈 자리를 자유로 채우신건가요?
A. 제가 '믿는다'라고 말하는 건, '그것은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단지 나는 선택했을 뿐이며, 당신은 내 믿음이 합리적이거나, 타당하거나, 현실에 기반하다고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라는 겁니다. 굳이 따지자면 제가 인본주의를 선택한 이유는 그게 어디까지나 나의 생존과 삶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고, 다른 사람과 협력하기 위한 전제가 되기 때문입니다. 전에 자유에 대해 설명했지만, 자유란 본질적인 것이기에 이유가 없어도 정당화가 된다면, 인본주의란 '내가 인간 사회에 살고 있고, 그럴 것이기에' 정당화가 되는 것이거든요. 나는 내 인터넷이 끊기고, 스마트폰이 쓰레기가 되는 걸 바라지 않고, 전쟁이 나는 것도 싫고, 총 들고 싸우기도 싫습니다. 그러기 위한 원칙이 '내 생명은 소중하지, 내 가족의 생명도 소중하지. 너도 그래? 그럼 인간의 생명은 소중하다...로 일반화가 가능하겠네? 그렇다고 해! 그럼 같이 살 수 있어!'인거죠. 하지만 저는 제 믿음을 억지로 정당화하지는 않을 겁니다. 이건 나와 적대적인 생명체 입장에서는 헛소리가 맞거든요. 그러므로, 저는 사형에 찬성합니다. 협력이 불가능한게 증명된 상대에게 굳이 협력을 위한 합의를 들이대며 쓸데없는 규칙에 얽매이고 싶지 않으니까요. 합의도 협력도 안되고 서로 죽거나 죽이는 선택지 밖에 없다면, 대체 사형수가 맹수와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즉, 인본주의는 인간끼리 잘 살 수 있으니까-의미가 있는거지, 그것에 관심이 없는 존재 - 말이 안 통하는 짐승, 사이코패스, 이기주의자 - 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겁니다.
Q30. 끝없이 자유를 숭배하고 추구하며 그런 삶을 사는 인간이 되고자 하시는건가요?
A. 음.... 이건 반대로 묻고 싶네요. Q는 자유를 추구하지 않으면서.... 즉, 매 삶의 선택의 순간에서 선택지를 제한당하고, 박탈 당하고, 도둑 맞고, 그런데도 기분 안 나쁘고, 화도 안 나고, 불행하지 않을 자신이 있나요? 자유주의자 관점에서 자유란 추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결국 자본주의에서 돈을 원하는 것도 경제적 자유를 위한 것이고, 범죄를 저지르는 것도 남의 자유를 약탈하는 원시적 자유를 추구하는, 생명체의 이기적인 본능 때문이죠. 이 본능... 억압하거나 억제하면서 살 자신 있나요? 그렇게 살 바에는 싸우다가 죽겠다-라고 생각하지 않고, 죽을 때까지 기계처럼 무언가에 복종하고 살 자신이 있나요? <젊은 회의주의자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히친스가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만, 자유를 추구하는 것은, 그러기로 선택하거나 결심해서가 아니라, '도저히 그러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인간이란 그렇게 태어났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그럼 이렇게 물을 수도 있겠네요. '자유를 추구하지 않는 사람들도 많은데요?', '네, 그래서 그들은 불행하죠. 그들이라고 자유를 바라지 않겠습니까? 단지 자유를 바라지만 물리적으로 구속되어 있을 뿐이죠'.
Q31. 죽음을 늦출 수 있다면 조절할 수 있다면 얼마나 살고싶으신가요?
A. 삶의 목표를 달성할 때까지... 지금 상황을 보면 넉넉하게 잡아서 대략 2222년까지 살면 되지 않을까 싶군요. 목표를 달성한 다음에는 다른 목표 좀 찾아보고, 못 찾으면 고통이 없다는 전제 하에 죽을 생각인데... 고통 없이 잘 죽는 방법이 없으면 다시 그거부터 찾아야 할 듯 하네요.
Q32. 저는 노화와 죽음은 상당히 자연스러운 과정이라고 보고있는데 질병이라는 관점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는걸 보고 흥미롭다고 생각했습니다만, 궤변이라고도 생각했기에 사서 읽어보진 않았습니다. 동영상도 그렇고 이런 주장들에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합니다.
A. 예전에 노화학에 대해서 찾아본 적이 있는데, 흥미로운 부분이 노화라는 것은 단순히 일부 장기나 세포의 문제가 아니라 전체적인 시스템의 문제라는 것이었습니다. 즉, 노화로 인해 심장이 안 좋으면, 그게 특히 안 좋을 뿐이지 폐나 장기 등 다른 것도 안 좋을 확률이 높다는거죠. 특히, 노화 방지를 위한 구강 섭취 방식은 가능성이 좀 떨어지지 않나 싶습니다 (21세기판 불로초인가..?). 물론 생물학적인 간섭을 했을 때 가장 위험한 건 암의 발병인데 그걸 정교하게 컨트롤 할 수 없으리라 봅니다. 그게 되면 노화보다는 먼저 암이라는 질병부터 먼저 사라지겠죠. 다만, 완전히 가능성이 없지는 않고, 충분한 과학적인 근거로 진행되는 것들입니다. 궤변이라고 폄하하는 건 좀 그렇군요.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차라리 인공장기나 사이보그, 태아 유전자 조작 등의 신인류 프로젝트 혹은 트랜스 휴먼이 더 실현 가능성이 높지 않나? 라는 생각이 드네요.
Q33. 선생님이 어떤 형태로 구성되어있는지 구조를 보고 스스로에게 적용시키기위한 일종의 과정이랄까요?
A.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라고 하죠. 모방은 전통적이고 효과적인 학습법입니다. 그러나........... 그게.... 따라하려고 한다고 해서, 잘 될까요? (훗) 책을 읽고 외운다고 해서 그 내용이 순식간에 내 것이 되는 건 아니죠. 소화하는 과정이 중요한거죠.
저는 플라톤의 이데아론 - 즉, 우리의 인식과 실제 현실이 괴리 되어 있다는 것에 동의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플라톤처럼 계급에 기반한 민주주의 사회가 되어야 한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그건 고대 그리스 같은 도시 국가에나 통하는 주장이죠. 또한 프로이트의 의식-무의식 이론을 보면, 완전하지는 않지만 우리가 파악하지 못하는 인지적 부분이 있다는 것에 동의합니다. 근데 그렇다고 다들 성욕에 지배당하면서 산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단순히 프로이트 자신이 변태였기에 그렇게 생각했던게 아닐까요. 또한 니체처럼 권위에 저항하고 틀을 부수는 것도 중요하다고 봅니다만, 그렇다고 사회고 나발이고 아무것도 필요없이 나는 내 갈 길만 간다!-는 건 좀 너무 나간게 아닌가 생각합니다. 즉, 저는 앞선 똑똑한 사람들의 생각을 복제해서 내 것으로 만들지만, 동시에 일부를 고치거나 선택하는 과정을 거쳐서 최대한 모순이 없도록 조립하고 있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누군가는 제 말에 동의할 수도 있지만, 그 중에서는 일부 동의하지 않는 부분도 있을 겁니다. 가령 저는 종교나 정치를 비롯한 '믿음에 기반한 체계' 전체를 일종의 필요악처럼 보고 있는데, 종교인이나 정당 지지자들은 거기에 동의하지 않을 겁니다. 또한 '가족'이라는 전통적 가치 또한 '가족주의'라는 이념에 기반하고 있다고 보는데, 유교적이고 보수적인 사람들은 '가족' 자체가 '발명된 개념'이라는 것에 동의하지 않을 겁니다. 뭐, 어쩔 수 없죠. 이건 일종의 사상적 진화입니다. 서로 다른 생각이 만나서, 일부는 교차되고, 일부는 돌연변이가 일어나고, 그러다가 적합하지 않은 것들은 도태되고... 그런 것이죠. 필요하다면, 제 이론이나 사상을 복제해도 좋습니다. 특히나 그게 좋은 시작점이 될 수 있다면요. 어차피 주어진 환경이 다르다면, 진화는 서로 다른 방향으로 일어날 겁니다.
다만, 제가 '나는 우선적으로 자유주의자이며, 그 다음으로 인본주의자이다'라는 식으로 명확하게 선언하는 것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가치의 우선 순위'를 스스로 명확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리저리 생각이 바뀌는 와중에도, 중심이 되는 생각, 또한 추구하는 방향은 큰 틀에서 유지를 해야합니다. 제가 종교나 정치를 필요악이라고 생각하고, 인간의 어리석음을 혐오하면서도, 그런 사람들의 권리를 존중하는 것은, 그 어리석음 조차도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이상) 그들의 자유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이런 일관성을 잘 유지한다면, 그게 니체든 뭐든 간에, 그 주장에 휩쓸리지 않으면서 '나의 관점'에서 상대방을 파악할 수 있게 될 겁니다. 가치관을 만드는 것을 건축에 비유하자면, 내가 추구하는 추상적이고 거대한 가치를 정하는 것은, 땅을 다지고, 기둥을 세우는 기초공사에 해당하는 작업입니다. 그래서 계속 반복해서 카테고리화 하고, 강조하는 것이고요. 그렇게 기초공사를 잘 하면, 나중에 실수로 벽을 좀 잘못 만들어도 큰 문제는 없을 겁니다. 방 구조 정도는 리모델링하면 되죠 뭐!
2023.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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