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살림 악화”… 포퓰리즘 복지 사양한 스위스 국민들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6월 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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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조건 月300만원씩 지급’ 국민투표… 반대 77%로 부결

스위스 국민은 ‘공짜 복지’ 대신 경제를 선택했다. 5일(현지 시간) 스위스에서 ‘모든 성인에게 조건 없이 매월 2500스위스프랑(약 300만 원)을 지급한다’는 안을 국민투표에 부친 결과 반대 76.9%, 찬성 23.1%로 부결됐다. 국민 10명 중 8명이 반대한 것이다.

법안은 비록 노동을 하지 않더라도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도록 국가가 매달 성인에게 2500프랑씩을, 18세 미만 어린이와 청소년에게는 625프랑(약 74만8000 원)씩을 준다는 내용을 담았다.

모든 국민을 대상으로 조건 없는 기본소득을 똑같이 나눠 주는 국가가 지구상에 하나도 없다는 점에서 세계의 이목이 쏠렸다. 그러나 기본소득 지급 아이디어는 포퓰리즘(인기영합주의) 논란만 불러일으켰을 뿐 스위스 국민에게 도입 필요성을 납득시키지 못했다. 인구 800만 명의 스위스는 10만 명 이상이 서명한 제안은 국민투표로 부치게 돼 있다.

재계는 노동 의욕 저하를 이유로 반대했고 노조도 현재 누리고 있는 사회보장 제도가 감축될 것이라며 반대했다. 스위스 16개 대형 노조가 속해 있는 스위스노동조합연맹(SBG)의 조제 코르파토 사무국장은 “기본소득은 매력적으로 들리는 아이디어지만 실현하기가 너무 어렵다”며 “모든 것을 불확실성으로 몰아넣는 기본소득 정책보다는 차라리 사회보장 시스템을 강화하는 데 돈을 집어넣는 것을 원한다”고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말했다.

스위스는 1인당 국민소득(GNI)이 8만4720달러(약 1억140만 원·2014년 기준)로 복지 등 사회안전망도 세계에서 으뜸이다. 월 2500스위스프랑은 스위스의 월 최저생계비(2219스위스프랑)를 기준으로 산출됐다. 이는 스위스 1인당 국민소득의 35.4%에 해당하는 큰돈이다. 2014년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이 2만8180달러(약 3342만원)인 점을 고려하면 한국의 모든 성인에게 매달 100만 원가량의 돈을 지급하는 제도인 셈이다.

정부와 국민 사이에서는 기본소득이 근로자의 노동 의욕을 저하시키고 나라 살림을 악화시키는 ‘퍼주기 식 포퓰리즘’이라는 목소리가 높았다. 프랑스 일간 르피가로는 “지지자들이 기본소득제를 도입하는 대신 연금과 실업수당 폐지를 제안했지만 국민은 재원 부족과 실현 가능성에 대해 불안감을 드러냈다”고 평가했다.

정치권에선 대부분의 정당이 유권자들에게 반대표를 던질 것을 촉구했다. 스위스 정부도 이 제도가 도입되면 연 2080억 프랑(약 250조 원)이 필요하다며 반대의 뜻을 분명히 했다. 이는 현재 연방정부 지출 규모인 연 670억 프랑의 세 배다. 재원을 마련하려면 연금과 실업수당뿐 아니라 기존의 사회복지 관련 예산을 대폭 줄이거나 폐지해야 하고 증세 또한 불가피하다.

영국 경제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부유한 사람이든 가난한 사람이든 무조건 똑같이 지급하는 기본소득은 천문학적 재원이 필요할 뿐 아니라 소득에 따라 차별 지급해 온 기존의 사회복지 시스템까지 무너뜨릴 위험이 크다”고 비판했다. 스위스 정치권 일각에서는 과도한 복지 때문에 국가 부도 직전까지 갔던 이탈리아, 그리스처럼 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왔다. 샤를 위플로스 제네바 국제경제학회장은 “사람들에게 아무 조건 없이 돈을 준다면 누가 일하려 하겠느냐”며 노동 의욕 저하와 실업자 양산으로 경제가 큰 타격을 입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기본소득은 5년 이상 거주한 외국인에게도 지급하도록 돼 있어 ‘공짜 복지’를 노린 이민자들이 대거 스위스로 몰려올 가능성도 우려됐다. 우파 성향의 스위스국민당(SPP) 루치 슈탐 의원은 BBC 인터뷰에서 “스위스가 섬나라라면 가능할 수도 있는 일이다. 만일 모든 개인에게 돈을 지급한다면 수십억 명의 사람이 스위스로 들어오려고 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2013년 이 법안을 발의한 ‘기본소득을 위한 지식인 모임’은 ‘인공지능(AI)’의 발달로 일자리가 줄어드는 상황에서 인간과 로봇이 품위 있게 공존하려면 기본소득이 유일한 해법이라고 주장했다. 이번 투표에서 부결됐지만 실망스러운 결과는 아니라는 것이다. 체 바그너 대변인은 “4명 중 1명이 찬성했다는 것은 대단한 결과”라며 “특히 젊은 유권자들은 이 논의가 이어지길 원한다”고 밝혔다.

뉴욕타임스(NYT)는 5일 스위스 국민투표에서 기본소득을 ‘사양(No Thanks)’했지만 다른 여러 국가나 도시들이 비슷한 개념을 검토하고 있거나 시험 프로그램을 시작했다고 보도했다. 핀란드는 내년부터 1만 가구(전국 130여만 가구)를 대상으로 월 550유로(약 70만 원)를 지급하는 ‘부분 기본소득’ 제도를 2년간 시범 실시한 뒤 전국으로 확대할지 여부를 결정한다. 네덜란드도 중부 대도시 위트레흐트를 비롯한 19개 자치단체가 모든 시민에게 매달 기본소득 900유로(약 120만 원)를 지급하는 방안을 논의 중이다. 영국 싱크탱크인 왕립예술협회는 매월 308파운드(약 52만 원)를 지급하는 기본소득안을 마련했다. 뉴질랜드에서도 기본소득을 제공하는 방안이 논의되고 있다.

파리=전승훈 특파원 raphy@donga.com /이유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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