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심하고 쓰세요, 한국 고객님…성분은 묻지 말고

이효상 기자

세탁용 세제 4종 성분 공개, 베트남보다 못한 ‘불편한 진실’

베트남의 한 쇼핑몰 사이트. 독특한 알파벳의 이국 언어가 낯설다. 구글 번역기를 켰다. ‘홈페이지’부터 ‘건강·안전’ 카테고리까지 하나씩 번역해보다가 한국 제품과 똑같은 제품을 찾아냈다. 베트남에서는 이 제품의 정체를 찾을 수 있을까.

경향신문 ‘독한 사회-생활화학제품의 역습’ 취재팀은 지난 6~7월 생활화학제품의 성분을 알아보기로 했다. 정부와 기업이 시장에 안전한 제품만 내놓을 거라는 기대가 무너진 지금, 성분 공개는 시민 안전을 위한 최소한의 조건이다. 제3자가 제품 안전을 실험·검증해볼 수 있는 출발선이기도 하다. 유명 세탁용 세제 4종을 선정해 성분 확인을 시작했다. 처음엔 제품 뒷면의 깨알 같은 글씨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성분을 알 수 있을 줄 알았다. 거기서부터 일이 꼬였다.

■“고객님, 안심하고 사용하세요”

먼저 각 제품 제조사의 홈페이지에 들어가 봤다. 제품 사진과 함께 “강력한 세척력”, “고급스러운 향기” 등의 광고가 이어졌다.

LG생활건강의 세제 ‘테크’에는 “자연에서 유래한 세정 성분 및 신선초, 어성초 등의 항균물질을 함유”했다는 설명이 있다. 하지만 정작 정확한 성분명은 없었다. 성분 정보가 담겨 있을 제품 뒷면 사진도 찾아볼 수 없었다. 제조사 홈페이지와 연결된 온라인 쇼핑몰도 사정은 비슷했다. 일부 뒷면 사진을 올려놓은 사이트가 있었지만 성분 정보는 너무 작은 글씨로 써 있어 알아보기도 어려웠다.

대형마트에서 제품을 찾아보기로 했다. ‘페브리즈’로 유명한 한국피앤지의 섬유유연제 다우니는 제품 뒷면 하단에 2줄로 성분 표시가 돼 있었다. “양이온계 계면활성제(제4급 암모늄염계), 안정제, 보존제, 산도조절제, 소포제, 향료”가 전부였다. 성분명을 기재한 것이 아니라, 성분의 기능이나 종류를 표시한 것이다. 다른 제품도 상황은 같았다.

고객상담센터에 전화를 걸어보면 어떨까. ‘퍼실’을 제조하는 헨켈홈케어코리아에 전화를 걸었다. “계면활성제의 정확한 성분명이 무엇이냐”고 물었지만 돌아온 답변은 “대외비”였다. 성분이 공개될 경우 다른 회사와의 품질 경쟁에서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는 이야기도 덧붙였다. 외국에서도 성분을 공개하지 않는지 묻자 “공개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6월 말 이뤄진 통화에서 헨켈 측은 독일 본사에 성분에 대해 문의해보고 다시 답변을 주겠다고 했지만 현재까지 답변은 없는 상태다. 애경 역시 “세부적인 계면활성제 이름은 기업 비밀로 공개하기 어렵다”는 입장을 취했다. 같은 기업 비밀이지만 샴푸는 전 성분이 공개돼 있다. 제품별로 공개 여부가 다른 이유를 묻자 애경 측은 “샴푸 같은 경우는 화장품으로 분류돼 전 성분이 공개된다. (샴푸는) 법에 공개하게 돼 있어서 표기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고는 “염려할 성분은 없다”, “안심하고 사용하셔도 된다”는 말을 반복했다. 한 사람의 소비자로서 생활화학제품의 성분명을 알 길은 없었다.

■기자라고 나을 건 없다

정보 접근이 보다 용이한 기자로서 성분을 취재하기로 했다. 헨켈홈케어코리아와 한국피앤지에 기자라는 사실을 밝히고 성분을 문의했다. 몇 차례 연락이 오간 끝에 헨켈 측은 “기업의 기술력과 관련된 부분으로 공개할 수 없다”는 최종 답변을 e메일로 보내왔다. 반면 피앤지는 다우니의 물질안전보건자료(MSDS)를 공개했다. 모든 성분이 표기된 것은 아니었지만 2가지 성분에 대한 안전성 검사 자료가 있었다.

제조사는 쉽게 성분을 공개하지 않았다. 정부를 통해 성분을 알아보기로 했다. 지난 1일 환경부에 4개 제품의 성분을 공개해달라는 정보공개청구를 했다. 동시에 국민의당 김삼화 의원실에 환경부를 통한 성분 정보 확인을 의뢰했다.

9일 환경부는 의원실에 4개 제품의 성분 자료를 제출했다. 향료 등을 제외한 대부분의 성분이 공개돼 있었다. 반면 취재진의 정보공개청구에는 10일 현재까지 답변이 없는 상태다.

■베트남엔 있고 한국엔 없다

한국에선 국회를 통하는 방법을 제외하곤 성분 확인이 어려운 셈이다. 해외에서도 이렇게 성분 확인이 어려울까.

조사 대상인 4종의 세제는 다른 나라에서도 판매되고 있다. 한국피앤지 측은 베트남 공장에서 생산되는 다우니를 수입해 한국에 판매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베트남 온라인 쇼핑몰 몇 곳을 방문해 베트남어를 영어로 번역하는 과정을 반복한 끝에, 한국에서 판매되는 다우니와 디자인까지 똑같은 제품을 발견했다. 베트남 온라인 쇼핑몰 ‘티키(tiki)’ 등에는 물·향료·색소를 제외한 6가지 성분이 그대로 적혀 있었다. 쇼핑몰 사이트에 올라와 있는 제품 뒷면 사진에서도 같은 성분명을 확인할 수 있었다.

헨켈 측은 취재진의 문의에 “국내 제조 제품은 독일에서 개발된 포뮬러를 사용하고 있지만 나라마다 다른 환경 및 규제를 고려해 약간 차이가 있다”고 말했다. 세계적인 온라인 쇼핑몰인 ‘아마존’ 독일 사이트를 방문했다. 한국에서도 판매하는 퍼실 컬러젤 제품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한국에서는 해당 제품 뒷면에 성분명으로 볼 수 없는 15종의 성분 표기가 적혀 있지만, 독일 사이트에는 30여종의 성분명이 기재돼 있었다.

“기술력 보호를 위해 밝힐 수 없다”는 한국 기업의 설명과 달리 제품이 수출된 해외에서는 일부 성분명을 공개하고 있었다. 러시아 마트에서 발견한 LG생활건강의 테크는 한국에서 판매되고 있는 제품과는 디자인이 달랐지만 한글로 “테크”라고 쓰여 있었다. 제조 지역도 울산의 LG생건 공장으로 표기돼 있었다. 하지만 제품 뒷면에는 한국 시판 제품과는 달리 ‘소듐 설페이트’ 등 계면활성제 성분명이 함량과 함께 설명돼 있었다.

애경의 스파크 역시 러시아의 온라인 쇼핑몰에서 일부 성분이 확인됐다. 일부 계면활성제 성분은 러시아에서도 공개되지 않았지만, 그밖의 성분은 함량과 함께 대부분 공개됐다. 한국에서는 한 단어로 처리한 ‘수연화제’와 ‘기포조절제’의 성분도 러시아에서는 확인할 수 있었다.

<샴푸와 주방세제의 유해물질들>이라는 책을 쓴 박철원 박사는 “정부가 시행하는 화평법(화학물질의 등록 및 평가 등에 관한 법률)이 모든 화학물질을 관리할 수 없다”며 “소비자들이 알 수 있게 전 성분을 공개하고, 그걸 토대로 제품을 선택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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