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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공산이씨에 충무공파가 있나요?
비공개 조회수 334 작성일2023.11.26
예전에 아빠가 충무공파라고 했었던것 같아서 인터넷 찾아봤는데 안 나오길래요 공산이씨에 충무공파가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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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운학 개명 작명
수호신 eXpert
40대 이상 작명, 이름풀이 9위, 사주, 궁합 14위, 꿈, 해몽 99위 분야에서 활동

광산 이씨(光山 李氏) 시조 본관 분파 족보 항렬 돌림자

1. 광산 이씨(光山 李氏) 시조(始祖) : 이종금(李宗金)

2. 광산 이씨(光山 李氏) 유래(由來) :

광산 이씨(光山 李氏)는 신라(新羅) 종성(宗姓)인 김씨(金氏)의 후예(後裔)로, 송악(松嶽)에서 태봉국(泰封國)을 세웠던 궁예(弓裔)의 6세손(世孫) 이종금(李宗金)을 시조(始祖)로 받들고 있다. 문헌(文獻)에 의하면, 이종금(李宗金)은 1010년(현종 1) 거란(契丹)의 40만 대군(大軍)이 내침(來侵)하여 송도(松都)와 주읍(州邑)이 허물어지고 왕(王)이 남천(南遷)하는 혼란(混亂) 속에서 강감찬(姜邯贊) 장군(將軍)의 휘하(麾下)로 들어가 대소(大小)전투(戰鬪)에서 혁혁(奕奕)한 전공(戰功)을 세웠다고 한다. 또한 1018년(현종 9) 3차로 재침해 온 거란의 10만 정예군(精銳軍)을 맞아 휘하의 주군을 이끌고 강화성(江華城)을 굳게 지켜 나라의 귀중(貴重)한 재화(財貨)를 보전시켰다고 한다. 그 공적(功績)으로 1032년(덕종 2) 광산군(光山君)에 봉(封)해지고 본래(本來)의 이름인 김일형 대신 이종금(李宗金)이라는 성명(姓名)을 하사(下賜)받았다. 따라서 후손들이 그를 시조(始祖)로 받들고 광산군(光山郡) 일원에 세거(世居)하면서 본관(本貫)을 광산(光山)으로 삼게 되었다.

3. 광산 이씨(光山 李氏) 본관(本貫) 연혁(沿革)

광산(光山)은 전라남도(全羅南道) 북서부(北西部)에 위치(位置)한 지명(地名)으로 본래(本來) 백제(百濟)의 무진주(武珍州)이다. 신라시대(新羅時代)에 이르러 도독(都督)을 두었으며 757년(경덕왕 16) 무주(武州)로 고쳤다. 진성여왕(眞聖女王) 때는 견훤(甄萱)이 이곳에 후백제를 세워 도읍(都邑)을 정(定)하기도 하였다. 940년(고려 태조 23) 태조가 후백제(後百濟)를 정벌하고 군현(郡縣)을 정비(整備)하면서 무진주를 광주(光州)로 개편(改編)하고 도독부를 두었다. 995년(성종 14) 관제개혁 때 해양도(海陽道) 소속(所屬)이 되었다가 1259년(고종 46) 기주(冀州: 일명 冀陽州)라 고쳤으며, 충선왕(忠宣王) 때 이르러 화평부(化平府)로 강등되어 공민왕(恭愍王) 때 광주목(光州牧)이 되었다. 1430년(세종 12) 무진군으로 강등(降等)되었다가 성종 때에는 광산현(光山縣)으로 강등(降等)되었고, 연산군(燕山君) 때 주(州)로 환원(還元)되었다. 1895년(고종 32) 지방제도(地方制度) 개정(改定)으로 나주부(羅州府) 관할(管轄)의 광주군(光州郡)이 되었다가 1910년 광주면(光山面)이 되었고, 1935년 광주읍(光州邑)이 부(府)로 승격(昇格)됨에 따라 광산군(光山郡)이 되었다. 1988년 송정시와 함께 광주직할시(光州直轄市)에 편입(編入)되었고, 1995년 광주광역시(光州廣域市) 광산구(光山區)로 개편(改編)되었다.

4. 광산 이씨(光山 李氏) 계파(系派) 및 분파(分派)

시조(始祖)의 8대손(代孫)으로 고려말(高麗末)에 현달(顯達)한 이순백(李珣白)·이숙백(李淑白)·이승백(李升白) 3형제(兄弟) 대(代)에서 상서공파(尙書公派)·한림공파(翰林公派)·직제공파(直提公派)로 분파(分派)되었다.

5. 광산 이씨(光山 李氏) 대동(大同) 항렬표(行列表)

항렬자 : 16世 동(東), 17世 환(煥), 18世 주(周), 19世 호(鎬), 20世 승(承), 21世 휴(休), 22世 병(炳), 23世 교(敎), 24世 진(鎭), 25世 원(源), 26世 상(相), 27世 혁(爀), 28世 재(在), 29世 현(鉉), 30世 해(海), 31世 표(杓), 32世 현(炫), 33世 배(培), 34世 종(鍾), 35世 제(濟), 36世 락(樂), 37世 욱(煜), 38世 재(載), 39世 석(錫), 40世 호(浩), 41世 지(至), 42世 세(世).

광산 이씨(光山 李氏) 상서공파(尙書公派) 항렬표(行列表)

세(世)

25

26

27

28

29

항렬자(行列字)

東(동)

煥(환)

周(주)

鎬(호)

承(승)

세(世)

30

31

32

33

34

항렬자(行列字)

休(휴)

炳(병)

敎(교)

鎭(진)

源(원)

세(世)

35

36

37

38

39

항렬자(行列字)

相(상)

爀(혁)

在(재)

鉉(현)

海(해)

세(世)

40

41

42

43

44

항렬자(行列字)

杓(표)

-

-

-

-

상서공파(尙書公派)

세(世)

25

26

27

28

29

30

31

32

항렬자行列字

동東

환煥

주周

호鎬

승承

휴休

병炳

교敎

한림공파(翰林公派)

세(世)

29

30

31

32

33

항렬자

行列字

석·현·호

錫·鉉·鎬

원·연·해

源·淵·海

수·동·상

秀·東·相

희·찬·기

熙·燦·기

34

35

36

37

38

39

직·교·원

稙·敎·遠

종·진·일

鍾·鎭·鎰

순·락·철

淳·洛·澈

영·병·정

榮·秉·楨

렬·엽·훈

烈·燁·勳

재·기·규

在·基·奎

6. 광산 이씨(光山 李氏) 인물(人物)

이종금(李宗金)은 광산 이씨의 득성조로 헌안왕의 6세손으로, 고려 현종(재위, 1009∼1031) 때 거란 침략을 막아내는 공을 세웠으며, 1031년 현종, 강감찬과 같은 해에 죽었으며, 본명은 김일형으로 1033년 덕종으로 부터 추증 받아 이(李)씨 성과 종금(宗金)이라는 이름을 사성받았다.

이정(李靖)은 광산 이씨의 성을 사용한 첫번째 조상이다. 헌안왕의 7세손, 태봉대왕(궁예) 휘 선종의 6세손이며 이종금(李宗金)의 아들이다.

이선제(李先齊)는 권근(權近), 매헌(梅軒), 권우(權遇)의 문하에서 학문을 연마하였고, 세종 1년(1419)에 춘추관(春秋館)의 기사관이 되어 태종실록 편찬에 참여했고, 정인지(鄭麟趾)와 고려사(考慮史) 개찬(改撰)을 관장했다.

이발은 조선시대 중기의 문신으로 동인의 영수였다.

이정(李靖)은 원래 김씨로서 김알지의 후손 헌안왕의 7세손이다. 이정의 8세손 이순백이 고려 충숙왕 때 상서좌복야로서 왕이 토번(吐蕃)으로 갈 때 그가 혼자 호위하여 따랐다. 그래서 은청광록대부로 광산부원군(光山府院君)에 봉해졌다. 그 뒤 이씨로 성을 하사받았다. 그러나 이와 같은 사적이 실전되어 후손들은 그의 선대에 대해 확실히 알지 못하였다. 그러던 중 최근에 문헌이 발견되면서 경주김씨의 후손임이 밝혀져 이정을 시조로 했다. 그리고 이순백을 득성득관중조(得姓得貫中祖)로 하여 세보를 수정하고 있다.

반면 신라 제48대 경문왕의 아들(일설에는 헌안왕의 아들이라고도 한다)로 전하는 태봉왕 궁예의 5대손 이종금(李宗金)을 시조로 전하기도 한다. 문헌에 의하면 이종금은 본명이 김일형(金日炯)으로 서기 1010년(고려 현종원년) 거란족이 침입해 왔을 때 장사(壯士)로서 강감찬 장군의 휘하에 들어가 강화성에서 적을 격파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그 뒤 1032년(덕종 2년) 이씨의 성과 종금이라는 이름을 하사받고 광산군에 봉해졌다. 그래서 후손들이 광산을 본관으로 삼고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그의 8대손 이순백이 공을 세워 상서좌복야에 이르렀다.

한편 광산이씨는 이순백의 아우 이숙백과 이승백이 직제학을 역임하는 등 이들 3형제가 가문을 크게 중흥시켰다. 순백, 숙백, 승백 3형제를 중시조로 하여 상서공파, 한림공파, 제학공파로 크게 갈리어 영남과 호남을 비롯한 평남북 일원에 집중세거하고 있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이순백의 손자 이홍길이 고려 때 예조참판을 역임했고, 증손 이일영은 조선조에서 병조참판을 지냈다.

이선제(李先齊)는 조선 세종 때의 인물로서 1419년 증광문과에 급제 1423년‘고려사’를 개수(改修)했다. 그는 또 1431년 집현전부교리로서 춘추관기사관이 되어‘태종실록’편찬에 참여했다. 형조와 병조의 참의, 강원도관찰사, 예조참의 등을 지낸 후 1448년 호조참판으로 정조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해에‘고려사’개찬(改撰)을 관장했으며 이조판서를 거쳐 예문관제학을 지냈으며 뒤에 경창부원군에 봉해졌다.

문종 때의 이형원(李亨元)은 1451년 증광문과에 급제, 천문학사(天文學士)를 거쳐 부제학이 되었다. 성종 때의 이달선(李達善)도 문과에 급제, 여러 청환직(淸宦職)을 거쳐 승정원도승지를 역임하였다. 이중호는 조선 선조 때의 인물로서 문과에 급제, 운문관검열 등 여러 청환직(淸宦職)을 거쳐 이조참판을 역임하였고 전라도관찰사에 이르렀다.

이발(李潑)은 1573년 알성문과에 장원, 여러 관직을 거쳐 1583년 부제학을 역임하고 호당에 뽑혀 이듬해 대사간에 이르렀다. 전라도관찰사, 황해도관찰사를 거쳐 도승지를 지냈으며, 동인의 거두로써 정철의 처벌 문제에 강경파를 영도하여 북인의 수령이 되었다. 조광조의 지치주의(至治主義)를 이념으로 하여 사론(士論)을 지도했다. 한편 경연관(經筵官)이 되어 왕도정치를 제창하여 기강의 확립에 힘쓰다가 1589년 정여립의 모반사건에 연루되어 화를 입었다.

현대인물은 이연술(화니백화점회장, 종친회장), 이민수(한문학자, 종친회고문), 이엽수(한학자), 이남호(한학자), 이병규(진도군수), 이병준(산업은행부총재, 한국투자금융(주)사장), 이승보(쌍용해운(주)사장), 이승원(쌍용정유(주)사장), 이숭교(초등교장), 이승만(유도회간사), 이재수(고교교장), 이달휴(광주세무서장), 이용세(대륙건설(주)회장), 이국헌(대검검사), 이경채(독립운동가, 중화민국육군중령), 이병근(능주향교전교), 이병문(교수), 이인섭(부산은행서울지점장), 이진수(삼표연탄(주)회장), 이화춘(삼표연탄(주)사장), 이인호(덕림의원장), 이인휴(지리학자), 이우현(동산양말공업(주)회장), 이재휴(농촌진흥원과장), 이승훈(유도회간사), 이경휴(육군대령), 이남진(조선대교수), 이연대(금화산업(주)사장), 이종섭(대구전신전화국건설국장), 이기석(덕안의원원장), 이해관(중앙병원원장), 이영현(영남대의대교수), 이달해(영남대교수), 이숙현(고령군수), 이찬현(오성양행사장), 이연수(정신문화원사무관), 이해윤(의학박사), 이판석(영진공업전문대교수), 이원효(육군대령), 이장환(청도군교육장), 이진정(경일염직(주)사장), 이원재(경제학박사, 산업연구원대구지원장), 이윤현(교육학박사, 대한교육개발원연구원), 이연백(영남제침공업(주)사장), 이태현((주)우림사장), 이달생(아폴로보온병공업(주)대표), 이응곤(고성직물(주)사장), 이대곤(대구중리중학교장), 이인규(초교교장), 이영구(판사)씨 등이 있다. (무순, 전 현직 구분 안 됨)

경북 고령군 성산면 고탄리는 광산이씨 집성촌이다. 입향조는 조선 세조 때 이근생(李根生)이다. 광산이씨 한림공파 후손인 이근생은 단종이 폐위되고 세조가 등극하자 이를 개탄하여 고탄에 은거했다. 그 뒤 이곳은 광산이씨 영남파의 세거지가 되었다. 광산이씨는 2007년 현재 약 20가구가 살고 있다. 이근생의 증손인 이홍기, 이홍량, 이홍우 등 3인을 기리는 경목당과 세 사람의 위패를 봉안한 봉양사가 있다. 이홍기 형제는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도 효성과 우애가 뛰어나‘영남삼용(嶺南三容)’으로 불리었다. 뒤에 영남유림이 뜻을 모아 삼형제의 고결한 생애를 기리고자 회연서원(檜淵書院)과 향현사(鄕賢祠)에 배향하였다.

7. 광산 이씨(光山 李氏) 주요(主要) 세거지(世居地)

- 충청북도 괴산군 괴산면 검승리

- 전라남도 화순군 도곡면 죽청리

- 전라남도 나주시 왕곡면 옥곡리

- 전라남도 강진군 성전면 수양리

- 경상북도 고령군 성산면

- 경상북도 달성군 논공면

8. 광산 이씨(光山 李氏) 인구수(人口數)

2000년 통계청이 발표한 결과에 의하면 광산 이씨는 11,416가구 총 36,741명이 있는 것으로 되어 있다.

2023.1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