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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감리교 신비주의자가 뭔가요?
정보가 없는 사용자 조회수 5,823 작성일2016.11.17

안식일교 세운 엘렌 화이트가 감리교 신비주의자였다는데,


감리교 신비주의자는 뭔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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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변자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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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인

어떤 종교든 사람이 창시해서 교단을 만든 곳은 모두 사이비들 입니다 요즘에 한국에 출몰하는 사이비

들과 도긴 개긴 입니다 성경에 앞으로 사람들이 나타나서 교단을 만들고 교파를 만드고  교리를 만들것

이다 그러면 그곳 에서 나를 믿으라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사이비죠

예수님 자가 사건으로 모든 을 폐하시고 성도들을 성전으로 또 제사장으로 삼으셨 습니다

그래서 엉둥한 에 돈 다 바치면 성전인것과 제사장직을 반납하는 것 입니다 그러면 구원은 없죠

모든것이 요한때 까지이고 그 다음에는 모든것을 예수님께서 직접 주관 하십니다 가짜들에게 속지 마세요

2016.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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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그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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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66위, 개신교 35위 분야에서 활동
감리교 신비주의 창시자 이용도

1998년 10월 28일부터 30일까지 인천숭의교회(담임목사 이호문감독)에서 개최된 기독교대한감리회 제23회 총회에서 김종순회원외 13명이 ‘이용도목사 휴직에 대한 명예복직을 위한 청원’을 제출하여 총회에서 이용도목사에 대한 명예복직을 만장일치로 결의하였다. 그리고 이 문제를 해당 서울연회 과정자격위원회로 회부해 처리키로 하였고, 1999년 2월 23일 서울연회(감독 박춘화) 과정고시위원회(위원장 김동설)에서 이용도목사에 대한 정회원자격(복권)과 명예회복 문제를 심사하여 만장일치로 연회에 상정하기로 가결하였다. 1999년 3월 9일 정동제일교회(담임목사 조영준)에서 개최된 서울연회에서 김종순회원(우이감리교회담임목사)의 복권청원에 대한 설명과 박봉배회원(전 목원대학교총장)의 복권당위성의 설명이 있은 후 김진호회원의 동의와 김석순회원의 재청으로 만장일치로 복권과 명예회복을 결의하였다. “이용도목사 휴직에 대한 명예복직을 위한 청원”건의안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지난 1933년 3월 15일부터 20일까지 정동제일감리교회에서
모였던 제 3회 중부연회에서 당시 경성지방회 소속 정회원
이용도목사에 대한 휴직처분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명예회복을
위한 복직청원을 드립니다.......이용도목사는 1933년 10월 페결핵
으로 33세를 일기로 소천하였는데 이후 감리교회에서는 오랜동안
잊혀진 회원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가면 갈수록
이용도목사의 영적 감화력과 헌신적인 신앙열정에 대한 폭넓은
이해가 증가되어서 1930년대 부흥운동을 재평가하고 연구하는
많은 감리교교역자들과 성도들은 이용도목사에 대한 교회적인
평가를 다시 내려야 할 것을 강렬하게 느끼고 있습니다...........
이용도목사의 휴직을 거두어 주시고 그분의 감리교 교역자로서의
명예를 회복시켜 주신다면 이는 마치도 주기철목사의 명예를
장로교회에서 회복시켜 준 것 같은 큰 의의를 가지게 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특히 지난 1978년 그분의 모교였던 감리교신학대학의
학교 논문집인 ‘신학과 세계‘에서는 이용도목사의 신비주의
신앙에 대한 특별연구논문을 내놓고 심포지움을 가졌는데 여기에는
한국교회 대표적인 신학자이신 박봉배 박사, 송길섭 박사, 변선환
박사들에 의해서 성령운동의 본질과 신비체험의 내면을 평가받는
자리에서 매우 긍정적인 평가가 나왔으며 감리교 신앙과 신학에서
공식화하는데 전혀 문제가 없음을 확인하였습니다. .......만약 이번
제 23회 총회에서 이용도목사의 명예로운 복직결의가 나온다면
내년 서울연회시에는 해당 자격심사위원회가 총회결의를 근거로
하여 은혜스러운 결정이 내려지리라고 봅니다.

1998년 10월 위 건의자 김종순외 서명자 일동(13명)

이로써 이용도목사는 1933년 3월 7일 목사직을 휴직당한 지 66년만에 복권된 것이다. 이에 대하여 국민일보는 해석하기를 “오순절운동의 은사적 특징이 현실적으로 이단이 될 수 없음을 분명히 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이번 복권조치로 이목사의 신앙에 대한 새로운 조명작업이 이뤄질 것으로 예상된다”고 하였다.1) 본 연구가 이 복직 결의후 처음으로 이루어지는 연구발표이기에 자못 그 의의가 크다고 할 것이다.
이용도 신앙과 사상연구회(회장 이윤구)가 주최하는 제1회 이용도 신학연구발표회에서 정지련교수(인천여자신학교)는 “성령론적 관점에서 본 이용도의 신앙운동”이란 강연을 통해 성령으로 거듭나 예수를 닮고자 하였다고 해석하면서 그의 성령론을 성령의 신격화, 예수와 성령의 관계, 성령의 자유, 성령에 의해 거듭나는 삶이라고 특징지었다. 그러나 정교수는 이용도의 성화론을 보지 못하였다. 이용도는 십자가의 은총을 믿음으로 거듭나는 삶도 강조하였지만 더욱더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사랑의 성화생활을 강조하였다. 이재정 총장(성공회대학교)은 “21세기를 향한 한국교회의 과제”라는 제목의 강연을 통해 이용도목사는 3.1운동 당시에 투옥되면서 겪은 고난의 경험이 밑바닥에 깔려있는 신비주의자로써 그의 신비주의는 중세의 범신론적 감성적 신비주의와 다르게 민족적 고난과 자신의 실존적 고난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연결시키는 신비주의로 해석한다. 또한 이용도는 양적 성장이나 교회의 체계화를 비판하는 예언자로 그의 예언의 소리를 오늘의 한국교회가 귀기울여 들어야함을 강조한다. 그러나 이 총장은 이용도를 너무 사회적 성화의 시각에서만 해석한 한계가 있다. 고난의 그리스도를 애타게 사랑하는 이용도의 불붙는 내면적 성화가 그 당시의 성화 되지 못한 한국교회의 갱신과 일제하의 민족적 수난을 가슴아파하면서 외친 사회적 성화로 이어지는 내면화와 사회화의 변증법적 성화개념을 제대로 해석해 내지 못한 아쉬움이 있다. 제3회 이용도신앙과 사상연구회 강연회에서 이세형 교수(협성대학교)는 “시무언 이용도목사의 예수론”이라는 제목의 강연을 통해 이용도는 부활의 영광보다는 십자가의 고난을 그리스도인이 따라야할 길이라고 가르쳤고 긍정적이고 밝은 세계가 아니라 부정의 언어로 표현된 깊은 심연의 세계를 전했다고 해석한다. 그리고 그의 사유구조가 동양적이어서 동양적 영성과 한국적 영성에 호소하는 힘이 이용도의 설교에 자리잡고 있으면서도, 동양기독교의 범신론에 빠지지 않고 자연의 품보다 예수의 품을 강조했다고 해석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세형 박사는 시무언 이용도가 비난과 질투와 시기와 오해를 받아가면서도 자신의 한 맺힌 고난에 대하여 말하지 않고 시종 침묵으로 일관하는 시무언의 예수상을 제대로 분석해 내지 못하였다. 시무언은 예수의 품에 안기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자신이 작은 예수가 되어 빌라도의 법정에서도 골고다의 언덕에서도 아무 말 없이 죽어간 예수처럼 십자가와 형극의 길을 친히 살아가려고 몸부림치는 예수의 제자였음을 더욱 밝혀야 한다. 빌라도의 법정의 예수, 갈보리산에서 처형당하신 예수가 그의 설교의 케류그마를 이루고 있었다. 국제신학연구원 주최세미나에서 민경배교수(연세대학교)는 그의 [한국기독교회사]에서 해석한 이용도에 부정적 비판보다 더욱 긍정적 해석을 시도한 “이용도신학이 성령운동에 미친 영향“이라는 제하의 강연을 하였다. 이용도의 성령론이 성자의 현존적 실상을 성령에서 찾는 삼위일체론적 성령이해라고 긍정적으로 해석하면서 동양 계 신비주의자들이 대거 탐독한 요한복음적 신비주의임을 주장한다. 그리고 그의 부흥운동의 중심에는 항상 고난 당하는 예수의 모습이 어리어 있었고, 그리스도와의 신비적 합일이 그의 기도를 통해서 수행되어지기를 바라는 간절한 애모가 차있다고 강조하였다. 이용도신비주의가 기독론과 결별한 종래의 이단적 신비주의와 다르게 바울처럼 그리스도안에서의 신비주의요 기독론적 성령운동임을 잘 밝혀주었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용도의 신비주의는 마틴 루터의 십자가신학적 신비주의가 강하게 나타난다. 그러나 민교수의 해석에 더욱 추가되어야 하는 두가지요소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단순히 요한적인 신비주의를 추구하였을 뿐 아니라 감리교목사로써 웨슬리적 완전성화를 추구한 것을 그의 신비주의에 첨가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또 하나는 그의 성애적 그리스도사랑은 건전하지 못한 피가름의 사상이 아니라 성 버나드(St. Bernard)적 사랑의 요소가 있음을 추가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영적 신랑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신부 성도의 세 가지 입맞춤, 발에 입맞추는 회개의 입맞춤, 손에 입맞추는 믿음의 입맞춤, 입에 입맞추는 사랑의 입맞춤으로 묘사한 버나드적인 아가서 주석이 이용도에게서 많이 나타난다. 이용도가 교회시대, 수도시대, 신앙시대를 넘어서서 제4기의 성숙한 시대를 사랑이라고 단계적으로 묘사한 것은 다분히 성 버나드적 신비주의라고 말할 수 있다.
필자는 본 논문에서 전반부는 이용도목사의 부흥운동의 전개과정을 소개하고 후반부는 그의 영성운동의 신학적 특징을 논하겠다. 지금까지 선 연구에서 살펴본 이용도연구가 좀더 총체적 모습으로 해석되어야 한다는 시각에서 필자의 전공분야인 역사신학적 조명에서 그의 영성운동과 신학을 보다 종합적으로 해석함으로써, 어떤 한 면의 이용도가 아니라 여러 면의 이용도의 모습을 하나의 초상화로 그려 보이고자 한다. 특히 그를 너무나 신비주의자로만 해석하는 것에는 무리가 있다고 본다. 송길섭 박사도 그는 광신주의자나 신비주의가 아니라 개혁자라고 해석한다. 개혁이 그의 최대의 관심이고 나머지는 그것에 예속된다고 해석한다.2) 본 연구에서는 개혁자 루터적 신앙과 십자가신학이 강하게 강조되면서도 루터의 한계를 넘어서서 웨슬리적 사랑과 성화로 그의 영성신학이 승화되어 가는 점을 밝히고자 한다. 그리고 그의 영성신학이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이단으로 정죄된 에크하르트적 신비주의라기 보다는 버나드적 성애 신비주의요 프란치스코적 자연사랑 신비주의임을 보여줌으로써 그가 얼마나 정통 기독교신비주의의 입장에 서 있었나를 보여주고자 한다. 또한 이용도는 그 당시의 목사들과 교회의 개혁을 외치는 예언자적 설교가 였으면서도 침묵과 시무언을 좋아하는 양면적인 면이 있었음을 고찰해 보고자 한다. 이렇게 그의 영성운동과 신학이 신앙과 사랑, 성애와 자연사랑, 예언과 무언의 변증법적 영성임을 증명하고, 그의 변증법적 영성이 서양적 요소와 동양적 요소 특히 한국적 요소 속에서 드라마틱하게 나타남을 밝혀 보고자 한다.
무엇보다도 이러한 논의 고장에서 이용도야말로 이단이 아니고 가장 그리스도중심의 구원론과 그리스도중심의 신비주의를 강조하였고, 가장 삼위일체론적 시각에서 건전하게 영성운동을 전개하였음을 증명함으로써 더 이상의 이단시비가 거론되지 않고 그의 영성운동과 신학이 21세기에는 더욱 활발하게 부활하는 계기가 마련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에서 심혈을 기울여 본 연구에 임하여 왔다. 그 단적인 증거로 필자는 자주 이용도의 글들을 읽으면서 울었다. 눈물이 아니고는 읽을 수 없는 대목이 너무 많았다. 굳이 그렇게 눈물과 울음으로 이 논문을 쓰게 된 이유를 밝힌다면 두 가지일 것이다. 첫째는 억울하게 이단으로 정죄 당한 그의 한을 풀어주어야 한다는 면에서 많이 울었고, 둘째는 그의 글들이 너무나 내 가슴과 영혼과 오장육부를 뒤흔드는 영적 절규였기 때문이다. 땀과 눈물과 피를 쏟으면서 온몸과 마음과 영으로써 외치는 일기와 서간문과 시의 메시지들은 필자의 영혼 깊은 곳에 많은 은혜와 감동으로 다가왔다. 마치 그의 영이 다시 살아서 나의 영혼 속에 지금도 말씀하시는 것 같은 뜨거움을 느꼈다.

I. 이용도 영성운동의 전개과정:

A. 영성운동을 위한 준비시대(1901년-1930년):

이용도는 1901년 4월 6일 황해도 금천군 서천면 시변리에서 이덕홍씨의 셋째 아들로 세상에 태어났다. 1915년 개성 한영 서원(송도고등보통학교가 됨)에 입학하여 4년 수업년한의 과정을 독립운동 하느라 9년에 마쳤다. 1919년에서 24년까지 5년 동안 독립운동에 전념하였다. 그는 네 번 투옥 당하였고 3년 이상 옥고를 치렀다.3) 이용도는 형사들을 권면하고 훈계한 애국적 웅변가였다. 그리고 죄를 혼자 뒤집어쓰고 벌을 혼자 뒤집어쓰기를 원하여 모 사건에서 이용도와 김종필이 서로 내가 혼자 한일이라고 고집하고 경쟁한 일이 개성거리에 아름다운 이야기 거리가 되었다. 또한 이용도를 구형한 검사가 울고, 언도한 판사가 탄식하기도 하였다. 감옥에서도 사랑을 많이 베풀어주는 모범수였다. 철갑과 얼음에 얼어붙은 손목을 가끔 이용도는 자기 뱃속에 품어서 녹여 주고, 배고파하는 죄수들에게 자기 밥을 주고서 고요히 기도하기도 하였다.
교장 왓슨은 골치 아픈 애국운동가를 해결하기 위하여 신학교로 보냈다. 처음에는 거부하였으나 교장과 선생들이 하도 권하여 “내주여 뜻대로 행하시옵소서”를 고요히 부르며 눈물로 서울감리교협성신학교 영문과에 들어갔다. 그는 신학생다운 점은 별로 없었고, 신문, 잡지, 소설, 법률, 정치 서적 등을 읽고 교수를 괴롭히기 위한 질문들이나 하였으며, 이론가, 논쟁가, 과격파, 행동파로 알려졌다. 그 가슴속에 있던 애국의 불길과 독립운동의 열정이 그런식으로 나타난 것으로 변종호 목사는 증언한다.4) 시와 노래와 연극 등의 연구에 몰두하고, 동화와 동요를 창작하고 아동설교에 열을 내며, 율동과 아동극을 실연하기도 하였다. 이용도는 이때에 아호를 심조(心鳥)라고 하였다. 본과의 이호빈과 이환신과 친하게 되어 현저동에서 자취생활을 하기까지 절친한 삼총사가 되었다. 그런데 갑자기 1925년 겨울에 폐병 3기라는 의사의 진단을 받고, 이호빈과 이환신의 고향 강동에 가서 휴양을 하기로 하였다.
겨울방학에 이환신에게 이끌려 강동으로 갔는데 며칠 못되어 그곳 교회에서 부흥회 인도의 부탁을 받게 되었다. 두 사람은 대동강상류의 얼음 위에서 밤새도록 철야기도하고 그 힘으로 첫날집회를 맞게 되었는데, 첫날설교는 이환신이 하고 사회는 이용도가 맡기로 하였다. 사회인도하는 이용도는 149장(오늘의 163장) 2절을 부르는 동안 울음을 터트리기 시작하였고, 이용도의 울음을 본 회중들은 모두 울었고 드디어 울음바다를 이루게 되었다. 그 다음날은 이환신이나 모든 교우들의 요청으로 이용도가 설교하게 되었다. 찬송도 울음이요, 기도도 울음이고, 설교도 울음이었다. 집회를 하는 동안 병이 다 완치되어 밥을 배나 먹을 수 있었고 밥11시에 집회를 끝내고 60리를 걸어서 집에까지 와도 피곤한줄 모르게 되었다. 중생의 사람, 주님의 사람, 하늘에 붙은 생명을 가진 사람이 되었다. 그 이후로 이용도와 이환신과 이호빈은 더욱 가까워 졌다. 예술적인 재능이 뛰어나 풍금도 배우지도 않고 사부로 반주하고, 가야금도 배우지도 않고 명곡을 잘탔다.
1927년 졸업 성탄극 “십자가를 지는 이들”을 이용도가 만들어서 자신이 주역을 하면서 연출까지 하였다. 이용도는 주님의 십자가를 지고 비틀걸음으로 힘들게 힘들게 형장 갈보리언덕까지 올라가 쓰러지는 이용도의 모습은 이 천년전의 그리스도 수난의 광경을 그대로 보여줌으로써 통곡의 눈물바다를 이루었다. 결국 신학 4년 동안 애국의 열정에서 기독교신앙과 사랑으로 바뀌게 되었다. 장안의 여학생의 일부가 이용도에게 관심을 가졌는데, 그 중에 Y라는 처녀가 이년이상 이용도를 괴롭게 하였다. 고민으로 비명을 지르기도 하고 자살을 하려고 노들강변을 밤새도록 헤매다가 밝아서 돌아오기도 하였다. 1928년 1월 28일 협성신학교 제 14회로 졸업을 하게 되었다. 김인서의 증언에 의하면 이용도는 차석으로 졸업하였다.5) 그의 애국심과 예술심과 신앙심이 가슴속에서 뒤범벅이 되어 뜨거운 눈물로 졸업식을 마쳤다고 변종호는 해석하였다.6)
1928년 1월 29일 강원도 통천으로 파송을 받게 되었다. 박재봉이라는 청년을 통천에서 만나게 되면서 이용도는 기도의 사람이 되엇다. 이용도가 박재봉의 결혼식을 주례하였고 주례를 하러 갔다가 홍수의 범람으로 자동차가 빠져서 이용도부부가 죽을 뻔하였다. 박재봉과 이용도는 금강산 기슭 백정봉에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고 십일간 금식하면서 기도에 전념하였다. 그후부터 기도의 사람이 되었다. 하루는 새벽 3시에 습관대로 교회에 기도하러 들어갔다. “나의 혼을 빼어버리고 예수에게 아주 미쳐 버릴 혼을 넣어 주소서. 예수에게 미치기 전에는 주를 온전히 따를 수 없사옵고 또한 마귀와 싸워 이겨내지 못하겠나이다.”라고 그는 기도하였다. 그런데 갑자기 흉칙한 마귀들이 성전에 가득 찬 것을 보고 마귀들을 쫓아내기 시작하였는데 통천시외로 까지 쫓아가서 마귀를 몰아내고 승리의 노래를 부르며 돌아왔다. 전형적인 신비가들의 체험처럼, 그뒤로 권능과 용기를 얻게 되었고 교회를 분열시키는 두 지도자가 화해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1928년 12월 24일 불신자, 배교자, 말썽꾸러기 청년들이 거꾸러지는 역사가 일어났다. 50, 60명이 모이던 교회가 150-60명으로 교인들이 증가하게 되었다. 그가 담임한 통천구역 7교회들이 모두 부흥하였고, 3개월간 그가 담임한 통천구역에서 부흥운동이 일어났다. 그리고 1929년 담임구역 이외에 20여 교회에서 부흥회를 인도하게 되었다. 1930년 벽두에는 인천 서해 덕적도에서 부흥집회를 하게 되었는데 사회주의자 김광우를 회개시켰다. 그는 정동감리교회를 담임하게 되었고 많은 교역자들이 그의 후손들 속에서 나오게 되었다. 1930년 2월 26일부터 3월 9일까지 평양중앙교회에서 부흥회를 인도하였다. 그의 설교제목은 “예수의 죽음”이었다. 빌라도의 심판을 설명할 때 변호사가 너무나 울면서 회개하였고, 일등부자, 관리들이 모두 회개하였고, 천 여명이 그저 눈물을 흘리면서 우는 것이었다. 천군 천사의 소리요 사람의 소리가 아니라 하늘에서 내려오는 소리라고 생각하였다. 강단에 선 이용도목사는 안보이고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환상으로 보는 사람도 있었다.7)
이용도가 부흥운동으로 인기가 높아져 가자 “제 구역이나 돌 볼 것이지 왜 남의 구역은 돌아다니느냐?,” “제 교파에서나 다닐 것이지 타 교파에는 왜 다니느냐?”등 질투와 시기를 하기 시작하더니 결국 교역자 파송 기간도 아닌 1930년 10월 16일에 주일학교연합회간사로 좌천되었다. 삼 년 동안 눈물과 땀과 피를 쏟아 길러놓은 정든 양떼를 석별의 통곡소리와 함께 떠나게 되었던 것이다. 간사자리에서도 여러 방면의 인기를 얻자 이번에는 유학으로 쫓아 보내려고 한국감독이 방문온 미국감독에게 요구하였으나, 정작 유학 갈 시기에 아무도 돕는 사람이 없어 포기하고 말았다. 1931년 초 서울주일학교지도자강습회에서 전원이 이용도시간에만 전원이 수강하고 다른 강사의 시간에는 한 명도 참석을 안 한다는 것 이였다. 이용도강의만을 듣게 해 달라고 강습생 대표가 요구하자, 주최측에서는 다른 강사들의 위신과 면목에 관계되는 바가 크니 나오지 말라는 것이다. 그 사건이후 이용도목사는 문제의 인물이 되어 경성지방감리사가 경성지방순회목사로 임명하였다. 이 때부터 이용도는 자기의 아호를 시무언(是無言)이라고 하였다. 아무 말을 하지 않고 그저 기도로 주님의 뜻을 따르겠다는 것이다. 8)

B. 1931년 영성운동:

이용도의 부흥운동은 불과 3 년 동안만 전개된 운동이었지만 전 교계를 흔들어 놓는 능력있는 운동이었다.9) 어떤 무당이 예언하기를 30세까지밖에 못산다고 하였으나 이용도는 30세를 넘기면서 남은 3년간 덤으로 얻은 인생인줄로 최선을 다해 부흥회를 인도하였다. 그리고 보통 부흥사들의 부흥운동은 자신은 회개의 대상에 포함시키지 않지만 이용도는 자신마저도 회개의 대상에 포함시켰기 때문에 더욱 설득력이 있었다. 자신도 함께 회개하면서 부흥운동을 인도하였다. 또한 어거스틴의 참회록을 직접 번역하면서 자신의 참회에 심혈을 기울였다.10)
이용도목사는 경성지방감리사가 경성지방에만 순회집회를 하도록 지시하였으나, 이를 무시하고 전국적으로 초 교파적으로 부흥회를 인도하게 되었다. 그는 기도하면서 주님의 지시를 기다려 주님의 뜻대로 한다는 것이 감리사의 명령과 교단의 규칙을 불복종하는 것으로 오해를 받게 된 것이다. 이것은 마치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교수로 임명받은 웨슬리가 전역을 다니면서 특히 옥외에서도 집회를 하게 될 때 영국성공회감독이 영국성공회법을 어긴 것을 지적하자 웨슬리가 자신은 어떤 교구에 소속된 교역자가 아니라 옥스포드대학교수로써 어디에서든지 설교할 수 있다면서 “세계는 나의 교구다”(All the world is my parish!)라고 외친 것과 같다. 교회의 제도와 조직이 그 속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사역을 제한시킬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바울, 세례요한, 예수님의 그림자, 성신이야“라는 칭송을 가는 곳곳마다 얻게 된 것이다.
그가 1931년만 전국적으로 다니면서 인도한 집회수가 21곳이나 되었으니 교통도 발전되지 않은 시대에 대단한 활동을 한 것이다. 평양중앙교회, 재령동부교회, 재령서부교회, 경남거창교회, 간도용정교회, 국자가교회, 두도구교회, 평양남문교회, 함남 영무교회, 은률교회, 선천 남교회, 선천북교회, 아현성결교회, 경남 통영교회, 사천교회, 충북 진천교회, 경성 삼청동교회, 중앙전도관, 인천내리교회, 개성 남부교회, 화천교회, 평양 평촌교회, 산정현교회 등이다.
2월 하순 재령에는 이상한 소문이 들리기 시작하였다. “참말 그이는 사람이 아니야. 그는 성자야. 그는 성신이야. 그는 예수야, 그는 요한이야....” 그는 원래 재령 동부교회에 일주일 예정으로 오셨는데, 재령서부교회에서도 하도 붙잡고 매달리므로 거기서도 한 주일을 인도하였다. 2월 28일 재령집회에 관한 일기를 보면,

이 눈물은 나의 설교로다. 나는 중심에 있는 말을 다할 수 없어
전신의 힘을 모아 쥐어 손을 드노라. 들은 손이 곧 나의
설교로다. 나는 말할 수 없으매 엎으려 기도하노라. 이는 곧
나의 설교로다. 나의 등에서 흐르는 땀은 여러분을 위한 나의
진실한 설교로라. 보라 말없는 예수를!11)

신발장 있는 곳에 구경 삼아 앉았던 어떤 교인은 껍데기만 남은 현대교회를 비판하는 설교를 들은 지 10분만에 완전히 쓰러져 절하게 되었다. 예배당은 마치 불질러 놓은 잿더미와 같았다. 이천여명이 예배당을 가득 채웠고, 이 목사는 8-10시간씩 설교하였다.12) 하도 목을 많이 써서 목소리가 안 들리게 되자 손짓 발짓 하면서 힘들게 무언설교를 하자 여기저기서 흑흑 흐느끼는 울음소리가 드리게 되었고, 차츰 울음소리가 높아져 가게 되었다. 당황하던 교인들은 본 교회 담임목사로 통역을 세웠다. 그 다음날도 목소리가 안 들리지만 안간힘을 다하여 설교할 때 목이 터지기 시작하였다. 목이 찢어지기까지 가죽이 뼈에 꼭 달라붙기까지 최선을 다하여 설교하였다. 집회 중에 글을 써달라고 간청하는 교인에게 세 가지 그의 신앙생활의 좌우명을 써 주었다.

1. 무언: 이 세상은 말 많은 세상입니다. 하지 않아도 좋을 말, 남을
해하는 말이 얼마나 많은가? 자기의 아름다운 뜻을 남에게 전하라고
하나님께서 주신 그 말을 가지고 얼마나 남을 해하려고 세상을
망치는 것입니까?
2. 겸비: 세상은 또 얼마나 교만한 세상인지요. 못되고도 된 척하는
바람에, 또 좀 되면 되었노라고 남을 멸시하고 남을 천대, 구박하는
바람에 싸움이 생기고 야단이 나는 것인가 합니다...
그래서 나는 가장 천하고 불쌍한 자가 되어서
더 배우고 더 얻고 더 받아들이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3. 기도: ......내 모든 부족과 고통과 설움을 주님께 내맡기는 길이
이 기도에 있고 아버지에게서 그 큰사랑과 위안과 힘과 빛을 얻어
오는 길이 또한 이 기도를 함에 있는 것이니......
기도 없이는 살 수도 없고 죽을 수도 없고 말 할 수도 없고
잠잠할 수도 없으니
주를 믿는 자는 그저 기도 하나가 생활의 전부가 되어야겠습니다.13)

그리고 이 글을 써준 청년에게 두 번씩이나 이용도가 “고맙습니다”를 말하므로 청년이 오히려 당황해 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 청년이 문을 두들길 때 전나의 몸으로 냉수욕을 하고 있으면서도 태연하게 청년을 들어오라고 하는 이용도의 자세에 이 청년은 또 한번 감탄하였다. 이 청년이 애원하여 찍은 사진을 서로 갖기를 원하여 재령에서 5백장, 사리원에서 5백장을 사람들이 사갈 정도로 인기가 대단하였다. 성경이나 찬송가에 이 사진을 넣어 두기를 희망하였다.
그리고 이 재령 집회에 올 때 2월 18일 저녁 남루한 무명옷에 중절모를 뒤집어써서 그 초라한 모습 때문에 아무도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이것이 또 하나의 독특한 용도성이다. 학생같이, 죄인같이, 어린애같이 가슴을 웅크리고 두 손을 모으고 나오는 것이 목사 같아 보이질 않았다. 선천집회를 위해서도 선천역에 내렸으나 너절한 회색 두루마기, 굵은 베바지, 고무신, 겨울모자 때문에 사람들이 이 목사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재령교회에 미리 들어가 강대상에 납작 엎드려서 기도하고 있다가 담임목사가 강사가 오지 않았다고 하자 갑자기 일어났다. 이용도를 알아보지 못한 성도들을 향해 이용도는 다음과 같이 질책하였다.

당신들은 십자가를 증거하는 설교가들이 외국 옷과 안경,
금시계 줄에 가죽 신발만 신고 다닌다고 생각하십니까?
당신들이 역으로 갔던 그날,
당신들은 기다리던 목사를 만나러 나온 것이 아니라
값비싼 물건으로 치장한 신사를 만나러 나갔습니다.
당신들이 진정으로 목사를 만나러 나왔다면
당신은 그를 만났을 것입니다. 하지만 당신들은 초라한
옷차림의 한국인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기 때문에 그 기회를 놓쳤던
것입니다.14)

이러한 겸손한 태도는 첫날 첫 시간부터 눈물바다를 이루게 하였다. 가게문을 닫고, 일을 그만두고 집회에 참석하는가 하면, 중 고등학생들은 수업도 안하고 집회에 참석하여 퇴학설까지 나돌게 되었다. 언론단체와 사회의 유력인사들과 사회주의운동가들이 몰려와 눈물을 흘리며 밤새워 회개하는 역사가 일어났다. 배뚱뚱하고 눈꺼풀 두껍기로 유명한 R목사가 정신을 잃은 듯이 통곡하기를 사오일간 계속하였다. 새벽 1시, 2시, 3시, 4시까지도 통회의 울음소리가 그치지 않았다. 폐회 후에도 100여명이 기도하고, 4-50명이 철야기도 하는 역사가 나타났다. 이목사의 부흥집회는 얼마나 열정적이었는지 눈물과 땀방울이 항상 많아서 솜옷까지 베고 수건도 4-5개씩도 늘 부족하였다.
변종호는 이용도가 부흥사가 된 후의 달라진 모습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달변가였으나 침묵자가 되었고, 사교활동가에서 많이 눈물을 흘리는 기도의 사람이 되었으며, 인본주의신앙에서 신본주의신앙이 되었고, 머리로 따지고 받아들이는 신앙에서 가슴 속 피로 받아들이는 신앙이 되었다.15)
재령의 엄청난 부흥사건은 무교회주의자라는 시기와 질투의 소문을 만들게 하였다. 그래서 길선주를 비롯한 평양의 유명한 목사 7-8명이 조사하러 왔다. 조사하러 왔던 목사들이 모두 거꾸러져 통회자복 하였다. 요6:1-59까지 읽는 동안 성경봉독에 모두들 감탄, 황홀, 통회의 체험을 하게 되었다.

C. 1932년 영성운동:

1931년에 이어 1932년에도 23교회나 집회를 인도하러 다녔다. 서울 동대문교회, 인천내리교회, 서울 자교교회, 연화봉교회, 서울 상동교회, 서울 도화동교회, 강원도 양구교회, 용두리교회, 인천내리교회, 서울 신설동교회, 채부동교회, 평양명촌교회, 평양신암교회, 한포교회, 충남 당진교회, 서울 광희문교회, 평남 안주교회, 운산 북진교회, 해주 남본정교회, 서울 자교교회, 신계교회, 양주 월계리교회, 중앙전도관 등이다. 인천내리교회와 서울 자교교회는 이해에 두 번씩이나 집회를 인도하였다.
1932년에는 정월 초하룻날부터 동대문교회에서 부흥집회를 인도하였다.
동대문교회에서는 마치 웨슬리가 단순하고 순수한 의도(single intention)를 설교하였듯이 넥타이 매는 것, 옷입는 것에 신경 쓰지 않고 오직 주님만 생각하는 신앙을 강조하였다. 그는 얼마나 단순한 마음으로 예수님을 생각하고 단순한 마음으로 이웃을 사랑하는 지, 송창근 목사가 유학비용이 없어서 유학을 못가자 자기 양복을 줄여서 입혀주고 자기 전셋집을 빼서 2백 50원을 유학비로 보태준 사랑의 실천자이다. 웨슬리가 어린이 같은(childlike) 단순함(singleness)과 순수함 (simpleness)을 강조하였듯이, 이용도도 단순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사랑을 실천하였다. 그런데 그 송창근목사가 박사학위를 받고 이 해 1932년에 귀국하였다. 송찬근 박사는 후에 기독교대한 장로회의 중요한 창립지도자가 되었고 한국신학대학교의 전신인 조선신학교의 초대 학장이 되었다.
이 해 4월 15일 9시 45분 상인천역에는 백 여명의 은혜받은 성도들이 “우리 다시 만나볼 동안 하나님이 함께 계셔”를 찬양하면서 환송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5월 16일 평양 명촌교회에 집회인도하러 갈 때는 이른 새벽에 찬송을 부르며 환영하였다. 일주일동안 낮 집회를 마치고 노방전도를 다녔는데, 여러 신자들은 부흥성가 52장 “마음에 가득한 의심을 깨치고”를 불러서 도와 주었다. 평양신암교회 집회 때는 6천명이상이 모여서 회당이 차고 넘쳐 무릎 위에까지 앉아서 예배를 드리다가 2, 3일 째 되는 날, 결국은 예배당 뜰에서 걸상 위에서 설교하였는데 그 모습이 천사인 듯이 보였다고 변종호는 증언한다.16) 이 신암교회 집회동안 별로 식사를 못한 이 목사는 숨이 다 끊어진 사람으로 느껴져 부인이 죽은 줄 알고 통곡하여 울기도 하였다. 그러나 다시 이 목사는 일어나 더운 날씨에 10시간 이상씩 설교를 하였다. 1931년과 32년 이년동안의 집회를 통하여 평양교인들의 신앙내용과 생활 태도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10월 3일 신안주 집회에서는 설교도중 손을 들고 찬송하기를 4시간이상이나 계속하는 새로운 형태가 나타났다. 또한 설교를 3-4 시간씩 하고, 수 백명 에게 안수기도하고, 그리고 강대상 아래서 철야기도를 하는 데 안주집회 8일간 불면불휴로 집회를 인도하였다. 전별회를 교인들이 준비하자 일찍 기도를 끝내고 안주를 떠나기도 하였다.안주성과 안주산야를 울리는 통성기도와 교역자들이 거꾸러지는 역사가 일어났고, 요한복음5장전체를 봉독할 때 사람들을 감동시켰고, 요13장의 막달라 마리아와 못을 박은자와 따라간 자들의 심리상태를 묘사하는 데 그 시적 형용과 정적 표현이 언어이상의 미술이요 미술이상의 미혹이였다고 한다.17) 그리고 안주에서 은혜 받은 청년 20여명이 2백 50리를 이틀 밤을 손에 손을 잡고 요단강처럼 북진전기발전수원강도 건너면서 걸어서 집회장소를 찾아갈 때 전 교인들이 마중을 나와 찬송을 부르면서 환영하였다.18)

D. 1933년 영성운동:

이미 건강상태가 이미 최악의 상태에 이른 이용도목사는 1933년에는 많은 집회를 인도하지 못하였다. 2월초에 평양으로 가서 신양리교회에서 3일간 집회를 인도하였고, 회중교회에서 10일간 집회를 인도하였다. 2월 13일부터 16일까지 안주에서 집회를 인도하였고, 2월 20일부터 5월 1일간 해주에서 집회를 가졌다. 그리고는 서울 현저동 자택에서, 평양에서, 대보산에서 폐병을 요양하였다. 마지막으로 원산에 와서 8월 1일부터 10월 1일까지 요양하다가 10월 2일 20여명의 부모, 형과 처, 동지들 앞에서 소천하였다. 욕하는 사람들이 사는 평양에서 보다 욕먹는 사람들이 사는 원산에 가서 죽기를 원하였다.
평양에서 집회를 인도하는 동안 그 병약한 몸으로 매일 밤 안수기도를 하였다. 이 때부터 이목사를 사모하던 무리들이 ‘예수교회’라는 새교회운동을 일으켰다. 신양교회 집회에서 요한복음 10장을 읽고 양과 목자의 이야기를 하는데, 주의 사명을 저버리고 헛된 꿈을 꾸는 목사와 제직은 다 도적이요 강도라고 외칠 때 어느 목사는 눈을 흘겨보기도 하였다는 것이다. 찬송 “어지신 목자 양 먹이시는 곳”을 부르는 데 마지막 절을 설명할 때 여기 저기서 울음소리와 기도소리가 터져 나오기 시작하였다. 예배가 끝난 후 감격한 교우들이 인사를 하려고 하니 담임목사가 전기불을 끄고 다 헤어져 가라는 것이었다.19)
그의 평생의 마지막 집회인 해주 집회는 결사적인 힘으로 인도하는 집회였고, 이 세상사람이 아닌 하늘에 속한 사람의 집회였다. 셋 째 날에 중대한 역사가 일어났는데, 자기의 죄와 부족을 통회하느라고 가슴 치는 소리와 통곡소리가 한편에서는 일어났고, 다른 한 편에서는 친구를 책망하는 소리와 교역자를 충고하는 소리가 들려왔고, 다른 한편에서는 춤추는 자들도 있었고, 다른 한 쪽에서는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생각하다가 그 십자가를 지어본다고 두 팔을 벌리고 담벽에 의지하여 십자가를 지고 뻣뻣하여 지는 일등이 생겼다. 이 목사는 집회를 마치고 밤새도록 안수기도를 하였다. 그 다음 날 불신자들 사이에도 소문이 나기를 “예수가 왔다지, 천사가 왔다지”하면서 수근거리며 예수구경 가자고 밀려오기도 하였다. 신문기자, 판검사, 도립병원 원장(일본인)까지 모여들어 예배당 안이 꽉 차고 넘쳤고, 예배당 뜰도 꽉 찼고 예배당 앞 큰길은 사람 때문에 통행이 곤란하였다. 이 목사는 열변, 땀, 기침, 열변, 땀, 기침 울며 찬송을 부르다가 주먹을 휘두르며 열변을 토하다가 몸부림을 치면서 고성을 쳤다. 단상에 말하는 목사와 단하의 듣는 청중이 한 울음에 삼키워져 울음의 골짜기가 될 때 번쩍 드는 손수건에 따라 찬송을 부르고 다시 피땀 쏟는 기도를 하고 내려왔는데 집회는 4시간을 넘었다. 강단에서 내려오자 땅에 엎드려질 수밖에 없었다. 그때에 교역자의 아들과 친척, 교회에서 유력하던 청년들 7-8명이 손길과 발길로 목사를 차는 것이었다. 이목사의 고무신은 갈기갈기 조각났다. 겨우 목사를 모셔간 집에서 다시 150-60명이 기도회를 가졌다. 변종호는 “이 목사님은 벌써 인간의 모든 것은 다 없어지고 오직 주님의 형상만 남아 있었다는 것입니다”라고 증언하였다.20)
1933년 3월 정동제일감리교회에서 개최된 감리교회 중부연회에서 목사직을 휴직당하였다. 새 교단 설립을 끝까지 반대하다가 결국 울면서 도장을 주고 말았다. 이 새 교단 설립의 서류가 총독부로부터 인가가 되기도 전에 10월 2일 20여명의 가족과 동지 앞에서 소천하였다. 그는 죽기 전에 두 달 동안의 기도를 통하여 이미 환상중에 꿈속에서 영광스러운 천국을 바라보고 기뻐하고 즐거워하였다. 그는 예수처럼 33세의 일기에 1900년에 태어나서 1933년에 세상을 떠났다. 민족대표 33인을 연상케도 한다. 그가 마지막으로 부른 찬송은 [우리가 서로 만나겠네]였다: “...........모든 슬픔과 아픔을 벗어난 후 영원히 즐거워하리 손에 거문고 들고 늘 찬미할 때 우리가 서로 만나겠네 우리가 서로 만나겠네 손에 거문고 들고 늘 찬미할 때 우리가 서로 만나겠네.” 험상궂은 사람이 나타나 공유지가 아니고 사유지여서 매장을 못한다고 괴롭혔다. 매장되는 순간까지 괴롭힘과 구박을 당하였다.


II. 이용도 영성운동의 이단성문제:

첫째로 그의 부흥운동을 이단시하게 된 동기는 목사들의 시기와 질투 때문이었다.
1931년 2월 28일부터 3월 3일까지 황해도 재령동부교회와 서부교회에서 집회가 대성황을 이루었고, 8월 12일 역시 황해도 은률교회에서 집회가 대성황을 이루었다. 그 해 시기와 질투를 느낀 황해지역 장로교목사들이 황해노회에서 다음과 같이 이용도를 매도하는 결의를 하였다.

1. 이용도는 재령교회를 훼방한다.
2. 여신도들과 서신 거래를 자주 한다.
3. 불을 끄고 기도한다.
4. 교역자를 공격한다.
5. 성서조선이라는 잡지를 선전한다.
6. 그러니 그는 무교회주의자요 교회를 혼란케 하는 자이니 황해노회 지경안에서는 청하지 말자.21)

다른 것은 다 주변적인 것이고 여기에서의 핵심은 교역자들을 공격하고 그의 설교가 너무나 인기를 끈다는데 있었다. 어지간히 은혜를 끼치면 괜찮은 데 너무나도 지나치게 감동적이였으므로 시기와 질투를 불러 일으켰던 것이다.
또한 1931년과 32년, 이년동안의 집회를 통하여 평양교인들의 신앙과 생활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게 되자 1932년 봄 평양노회는 다음과 같은 결의사항을 결정지었다.

1. 이용도는 거짓말쟁이다.
1. 이용도는 대접받기를 좋아한다.
1. 이용도는 파괴주의자다.
1. 이용도는 질서를 혼란케 하는 자다.‘
1. 이용도를 세우면 본교회 담당목사가 푸대접을 받아 살 길이
막연해진다. 그러므로 이용도를 우리 노회지경 안에 들이지 말자고
하였다.22)

핵심은 마지막에 있었다. 이용도의 설교가 너무 은혜스러워 담임목사들의 설교가 교인들에게 은혜를 못 끼친다는 것이다. 이 역시 시기와 질투의 극치를 이루었다. 10월 7일 평양노회가 39대 52로 노회지경 안에 이용도를 일절 들이지 않기로 가결하였다. 39명이나 결의안을 반대하였으면 찬성하는 사람이 2/3도 못되는 데 이렇게 한 사람을 매장하는 것은 신앙적이 아니다. 한 목사의 증언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이용도는 예수를 중심으로 하고 설교함에는 진리는 있다. 고로
진리를 먹으려면 그를 청해야겠다. 그러나 그를 청하면 그와 같이
못하는 그 교회목사가 푸대접을 받게됨으로 그를 청하지
말아야겠다.23)

둘째로, 그의 부흥운동이 목사들에 대해 예언자적인 질책의 발언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 피도수 목사의 증언에 의하면 이런 근거를 찾을 수 있다. 피도수 목사는 말하기를 “사람들은 시무언이 공식석상에서 통렬하게 목사들을 비판하는 것에 대해 반발했다. 이것을 시작으로 하늘 높이 올라갔던 시무언의 명예는 땅에 떨어지기 시작했다.”24) 거기에 대한 피도수 목사의 해석이 흥미롭다. “물론 설교가들이 비난의 대상에서 제외될 수는 없다. 하지만 공개적으로 비난하기보다는 개인적인 차원이나 소그룹에서 제기되는 것이 더 좋았을 것이다.”25) 그러나 필자는 이용도의 예언자적 기질을 더욱 적극적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예수도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을 독사의 자식들이라고까지 하면서 회개를 촉구한 예언자였다. 목사들을 향한 회개의 외침을 목사들이 겸손히 받아들이고 회개하는 운동을 일으켰더라면 이용도도 살고 교회들도 대 부흥운동을 일으켰을 텐데 목사들이 회개하지 않고 이용도만 비난하기 시작하였다.
셋째로, 부흥운동의 방법론이다. 예배 후에 하는 기도시간에는 불을 켜놓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용도가 여성들을 가까이 한다는 것이다. 또한 사람들로 하여금 이상한 계시를 구하게 하고 흥분시켜 울게 만든다는 것이다. 불을 끄는 것과 여성을 가까이 하는 것에 대한 피도수 목사는 “물론 기도하기 위해 불을 끄고 실내를 어둡게 하는 것에는 타당한 심리적 이유가 있고 그 전례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당시 사회적 풍토에 어울리지 않았을 것이다. 뿐 만 아니라 목사가 여성신도들을 멀리하지 않고 그들을 돌보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시무언은 당시의 사회적 규범에 더 민감했어야 했다.”라고 해석하였다.26) 거기에 대한 이용도는 “여자들의 사진문제나 철야기도시에 불을 끄게 했다는 비난에는 답할 것 없고”라고 답변하였다고 이호빈 목사는 증언하였다.27) 필자가 조사해본 자료들에는 이용도가 여자를 가까이 한는 것은 여자성도들이 좋아서 사모하는 마음이 지나쳐서 사진을 가슴에 품고 다닌다는 것인데, 그렇게 좋아서 사진을 품고 다니는 것을 이용도인들 어떻게 말리겠는가? 불을 끄고 기도하는 것은 현대 영성연구나 마인드 콘트롤에서도 빛이 안 들어오고 소리가 안 들리는 곳에서 인간의 뇌파가 베타의 세계에서 알파의 세계로 내려가서 기도가 더욱 집중된다고 말한다. 필자의 경험으로도 청각과 시각이 차단된 옷장(clothset)에 들어가면 기도가 더욱 잘 집중되었다. 예수님도 골방에 들어가 기도하라고 하였는데 골방을 Living Bible에서는 옷장(clothset)이라고 번역하였다. 이용도의 기도방법이 당연히 기도를 집중시키는 것에 좋은 방법이다.
넷째로, 1932년 10월 신비가 유명화(柳明化)를 “주님“이라고 부른 것이 가장 큰 시비꺼리였다. 심일섭 교수는 이 문제에 관한 이용도의 이단시비를 바로 잡아 주는 것은 역사적 의미가 있다고 말하면서 단순히 유명화가 입신상태에서 자신의 하루행적을 다 말할 때 기도할 때는 물론 입버릇처럼 ‘주여 주여‘ 한 것뿐이라고 한다.28) 너무나 간단하게 취급하고 말았다. 이것에 대한 이용도의 답변은 ”어떤 사람을 주님으로 부를 수 있도록 정신 빠진 사람은 아닌데, 혹 그의 마음속에 계신 주님을 보고 ‘주님이시여‘ 할 수는 있다.“라는 것이다.29) 이것은 이용도가 이호빈에게 한 답변이고, 이용도가 최석주 목사에게 한 답변도 대동소이하다: ”물론 명화라는 그 개인이 주도 아니오 신도 아니다. 그를 통하여 나타나는 말씀은 곧 주시다. 그러므로 그 말씀 앞에 경배치 아니할 수 없었다.“30) 이용도의 이 두 답변들을 볼 때에 하나도 문제삼을 것이 없다. 그리고 유명화가 강신극의 이단으로 몰리고 그녀와 한 무리가 된 한준명을 무차별 사랑한 것이 정죄당한 중요한 이유이다. 이 사건 이후 김인서, 송창근 등 주위의 기둥같은 한국지도자들이 경고와 비판을 내렸다. 그러나 송창근은 그의 사망 후에 조전을 보낼 정도로 사랑이 계속 남아있었다. 김인서가 <신앙생활>지에 기사화 한 것이 교회사의 자료로 계속 남아있어서 이용도목사에게 불리하게 해석되게 되었다. 이호빈 목사의 증언은 다음과 같다.

이렇게 돼서, 말년에 용도 목사는 점점 기성교회로부터 버림을 받게
되었습니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김인서의 주장이 <신앙생활>에 남아
있기 때문에 그는 아직까지도 져버림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버림받은 사람들을 그처럼 아끼던 그가 죽어서도 버림받은
사람들 속에 같이 있는 것이지요.31)

민경배 교수는 ”이것이 사실상 이용도로 하여금 몰락하게 하는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이다.“라고 해석한다.32) 하지만 몰락의 이유가 전혀 없다. 당시에는 몰락인 것 같아도 그의 신앙과 신학은 영원히 다시 부활하여 이렇게 많은 후학들이 연구하고 그의 영성이 되살아나기를 희망하고 있다.
여기에서 이용도의 기독론적 삼위일체론적 이단성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이단이란 교회사적으로 그리스도의 인성과 신성을 부인한다던가 삼위의 동일본질을 부인하는 것이었다. 이용도는 그리스도의 인성 뿐 만 아니라 신성을 철저히 믿고 있다. 인간예수만을 강조하는 자들을 육의 예수를 찾는 것으로 비판하고 있다.
다섯째로, 이용도 목사가 이단시비로 정죄된 한준명을 불쌍히 여긴 것이 문제가 되었다. 원산에서 신비적 영성운동을 전개하던 한준명이 평양에서도 예언활동을 하였다. 평양에서 어떤 여인을 새 주로 삼고 자기는 스스로 천사라고 하여 새 주를 시립하여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경배케 하고 예언하기도 하고 방언을 통역하기도 하였다. 평양교회가 임시노회를 소집하여 한준명을 비판하자, 원산으로 쫓겨갔다. 그런데 문제가 된 한준명을 비판하지 않고 오히려 무차별의 사랑으로 동정한 것이다.

나는 누구를 악신 접했다 하여, 또는 내 경험과 다르다 하여,
혹은 죄인으로써 버림을 받았다 하여 그를 책벌하고
쫓아낼 권리를 나는 가지지 못하였습니다.
형! 주께서 그리하시지 못하셨음이지요!
나는 김성실파도 아닌 동시에 린서파나 태용파도 아니요
마찬가지로 남주파나 준명파도 아니올시다.33)

다만 문제가 된 사람들을 사랑하는 마음이 이단이 될 수 있을까? 이용도신학의 이단성이 없는데, 오히려 그가 동정한 유명화와 한준명이 예수교회에 동참하였다해서 이용도를 이단시할 수는 없다. 또한 예수교회의 주체세력은 중앙신학교를 설립한 이호빈이지 한준명과 백남주가 아니다. 이호빈의 고백에 의하면 이호빈이 예수교회의 규칙제정위원의 고문으로 규칙을 모두 만들었다.34) 이용도는 죽기 전에 ”교단은 형님(이호빈)이 맡으시고, 신학산(원산) 송창근과 이환신에게 맡기도록 하라“는 유언을 남겼다.35) 그 말은 백남주 목사에게 맡길 수 없다는 뜻이다. 이용도가 그들의 사상을 동조한 것이 아니라 그들을 진심으로 사랑한 것이다. 김인서에게 보낸 다음의 편지에서 잘 드러난다.

태용! 세상에서 버림을 당할 때에 나의 마음이 그를 향하여
간절하였고 성실 버림을 당할 때에 나의 마음이
역시 그러하였고...내가 그들의 주의를 찬동해서가 아니요...
그들의 내용을 잘 알지 못하고도...남주, 준명이가
축출과 멸시를 당하여 나는 또 그들에게 대한 나의 간절한
열의도가 올라가는 구려!..............................
성실씨, 태용씨, 국주씨, 교신씨 물론 그들을 내가 잘 알지 못해도!36)

그리고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이용도의 신학에는 루터적 십자가신학이 너무나도 강하게 살아있고, 그의 신비주의는 이단성이 전혀 없는 그리스도 안의 신비주의요 그리스도중심의 신비주의요 십자가 고난의 신비주의였다. 그러나 이단으로 몰린 사람들을 동정한다는 이유 때문에 이용도 목사는 이단의 우두머리로 비방을 받게 되었고, 1933년 3월 15일 감리교회 중부연회에서는 목사직 휴직처분을 내렸다.
<신앙생활>지에 김인서가 이 사실을 기록함으로 교회사의 자료로 쓰임을 받고 있기 때문에 이단시비의 대상이 되어 온 것임을 앞에서도 밝혔다. 김인서가 1931년 처음 이용도를 평양서 만난 후에 1932년 5 월 호 실린 글에서 서울 현저동 집을 찾아가 직접 찾아가 만나 본 후 “성자(聖者)적인 생애를 존경할 만하다”고 하였다.37) 그를 아래와 같이 의인이라고 표현하였다: “우리에게 영웅이나 위인이 없어도 좋습니다. 그러나 이 땅에 의인만은 보내주셔야 하겠나이다. 행여 당신의 보낸 사람을 보았사오니 내 주는 저와 함께 하시옵소서.”38)
그러나 김인서는 새 교파 예수교회의 시조가 되었다는 것에 불만을 품고 1934년에 이단으로 단죄하였다.39) 장로교 22회 총회에서도 예수교회의 초대 선도감이 된 이용도 목사를 이단으로 정죄하였다. 그러나 마틴 루터도 로마카톨릭에서 쫓겨나서 프로테스탄트를 시작하였고, 감리교회의 창시자 존 웨슬리도 영국성공회로부터 떠나기를 싫어하여 죽을 때까지 영국성공회사제로 생각하였지만 영국성공회로부터 설교를 금지 당하고 쫓겨났을 때 1784년 영국성공회 감리교신도회(Methodist Society)에서 감리교회(Methodist Church)로 발전하게 되었다. 기성교회인 장로교회와 감리교회가 이용도를 따르는 무리들을 쫓아내니까 할 수 없이 예수교회를 창립하였던 것이다. 유능한 감리교회목사요 후에 강남대학교의 전신인 중앙신학교를 설립한 이호빈 목사도 감리사가 그의 감리교목회를 못하도록 담임목사직을 박탈하니까, 그리고 이용도의 간곡한 부탁으로, 이용도의 뒤를 이어 예수교회의 제2대 선도감이 되었던 것이다.40) 이호빈의 설교를 두 번이나 들어본 필자는 그의 영성의 깊이와 인격의 고매함에 크게 매료되었었다. 억울하게 누명쓴 이용도를 변호하고 그의 영성운동을 계승 발전시키고 신학교를 설립하여 후진 양성에 힘쓰시고 거대한 대학교로 발전시킨 것이다. 이호빈의 풍부한 영성과 인격과 신학이 오늘의 강남대학교를 만든 원동력이다.
여섯째로, 무교회주의자 김교신의 <성서조선>을 신도들에게 권하였다고, 최태용을 동정하였다고 무교회주의자라는 비판을 받았다. 이용도의 답변에 대한 이호빈의 증언에 의하면 “어떠한 때 일로서 마침 가졌던 <성서조선> 두세 권을 어떤 젊은이에게 나누어준 일이 있을 뿐 무교회를 찬송하거나 비방한 일이 없다”고 답변하였다.41) 김교신의 <성서조선>은 복음을 한국적 상황 속에 토착화하고 일제에 저항하는 민족주의적 신앙운동지였다는 점에서 교회사적으로 가치있는 신학운동으로 재평가가 되고 있으므로 문제될 것이 없다. 그러한 <성서조선>을 이용도가 나누어주었다는 것은 오히려 이용도의 신학사상의 수준이 높은 차원에 있음을 말해준다. 최태용의 운동은 오늘날 복음교회로 발전하였고 KNCC의 가맹교단으로 활발하게 발전하고 있는데 최테용을 동정한 이용도가 이단일 수가 없다.
일곱째로, 이용도목사가 이단시비에 말려든 것은 저 ‘피가름’이라는 것이다. 사랑의 융합을 통하여 주님과의 혈관적 연결을 이룬다고 함으로 이용도 목사를 한국적 피가름의 표현의 역사적 기원으로 민경배 교수는 언급한다.42) 그러나 이용도 목사는 문선명의 통일교원리강론 같은 교리를 체계화하지 않았다. 문선명의 통일교 원리강론에 의하면 인간의 타락은 선악과를 입으로 따먹은 것에서 비롯되지 않고 뱀이라는 사탄과의 간음행위로 인하여 잘못된 피를 받아서 타락하였기에 입을 가리지 않고 하체를 가리었다고 해석한다.43) 곧 사탄의 혈통을 받은 것이 인간의 타락이다. 따라서 초림의 예수가 영혼만 구원하고 육체를 구원하지 못한 것이기에44), 재림 주는 육체의 구원을 완성하기 위해서 오시는 데, 피가름을 통한 하나님 직계가족의 혈통관계를 맺음으로 영육 모두를 구원한다는 것이다.45) 그래서 재림 주 문선명의 피를 받기 위해서 합동결혼식을 거행한다. 그러나 이용도의 글 어디에 보아도 이러한 구원론을 전개하지 않는다. 그에게서 혈관적 연결이란 시적이고 상징적 신비적 언어이다. 시인으로 이용도는 많은 은유적 표현을 쓰고 있다. 예수를 영적 신랑과 성도를 영적 신부로 비유하여 아가서적 사랑을 은유적으로 많이 해석하였다. 그것을 지나치게 문자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이용도의 시문학 세계를 모독하는 행위라고 보여진다.
이용도는 너무나 큰 거인이고 종교적 천재여서 1930년대의 한국교회가 수용할 수 없었던 것이다. 무하마드 간디나 마틴 루터 킹이나 디트리히트 본회퍼를 받아들일 수 없던 시대가 그들을 암살시켰듯이, 1930년의 한국교회가 그를 감당할 수 없어서 죽였다. 그러나 역사가 그들을 다시 순교자로 추앙하듯이 66년만에 한국교회가 그의 한을 풀어주고 그 한을 달래 주면서 그를 위대한 의인이요 성자로 다시금 존경하는 것이다. 그래서 역사는 반드시 정의와 진리의 승리를 해석해내는 것이다. 사필귀정의 마력이 역사에 있는 것이다.


III. 루터적 신앙과 웨슬리적 사랑의 영성 운동:

A. 루터적 십자가신학 중심의 영성운동:

루터는 1545년 그의 라틴어저술편집 서문에서 자신의 자서전적 고백을 표현한다. ‘하나님의 의‘의 계시가 어떻게 복음이 되는 지를 몰랐는데 그것을 발견하게 되었음을 고백한다. 루터의 운명을 바꾸어 놓은 본문이 롬 1:17이다. 그 구절 전반부에 나타난 하나님의 義(iustitia Dei)는 능동적인 의(active righteousness), 곧 심판하시고 정죄하시고 저주하시는 義로만 생각하였다. 그 무서운 심판 앞에 죄인인 자신의 모습 때문에 큰 절망, 죽음에 이르는 병(Krankheit zum Tode)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나 그 말씀을 묵상하고 또 묵상하는 가운데 그 뜻이 전혀 다른 것임을 발견하였다. 죄인을 무서운 공포와 절망에 빠뜨린 죽음에 이르는 병에서 해방되는 순간을 경험한 것이다. 능동적인 의(active righteousness)가 아니라 수동적인 의(passive righteousness), 곧 무조건 용서하시고, 받아 주시고,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義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십자가 사건을 통하여 우리에게 베푸시는 엄청난 용서의 은총을 믿기만 하면, 오직 믿음으로만 의롭다 하심을, 수동적으로 낯선 손님 같은 義(aliena iustitia)를, 옷 입게 된다는 사실을 바울의 롬 1:17뿐 만 아니라 어거스틴의 ꡔ영과 문자ꡕ(De Spiritu et Littera)에서도 발견하게 되었다고 그의 라틴어 저술 편집 서문에서 고백한다.46) 그런데 어거스틴은 그렇게 객관적으로 전가하시고 부어주시는 은총(imputation)을 모호하게 강조하였는데, 자신은 보다 분명하게 주장한다고 말한다.47) 그래서 롬 1:17을 전에는 가장 미워하였는데 이제는 가장 사랑하게 되었으며 파라다이스(paradise)의 문이 되었다고 표현한다.48)
인간의 능동적인 선행과 노력은 아무런 효과가 없고, 인간의 이성으로 자연 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을 이해하는 중세 스콜라주의적인 사변도 하나님의 의와 사랑을 온전히 발견할 수 없으며, 오직 십자가의 은총을 믿을 때에만 구원이 가능함을 강조한다. “우리의 신학은 오직 십자가뿐이다”(crux est sola nostra theologia)라고 강조한다.49)이러한 신학적 전환의 회심체험이 그의 서재에서 일어났다. 루터의 서재가 탑에 있었는데 이것을 ‘탑의 경험’(Turmerlebnis)이라고도 부른다.50) 그래서 자신의 신학은 십자가의 신학임을 1518년 ‘하이델베르그 논쟁’(Heidelberg Disputation)에서 밝히고 있다.51) 의롭다하심의 은총은 법적이고(forensich), 우리 밖에서(von aussen), 주입되는 은총(eingegossenen Gnade: gratia infusa)이라고 루터는 해석한다.52)
이렇게 탑의 경험에서 고백한대로 [영과 문자]와 바울의 롬1:17에서 영향을 받았을 뿐 만아니라, 시편 제1강해 동안 ‘하나님의 의’의 개념을 새롭게 발견하게 된다. 시70편과 71편 주석에서 ‘하나님의 의’는 곧 구원이며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임을(fides Christi) 강조한다.53) 로마서 자체보다 시편과의 씨름에서 이런 변화를 가져오고 있으며, 몇 년 후에 로마서를 강해할 때는 이미 하나님의 의의 새로운 해석을 확실하게 보여 주고 있다.
따라서 루터는 다음과 같은 3단계로 의인화의 논리를 전개한다.

1. 인간은 죄인이다.(Man is a sinner;)
2. 하나님은 의로우시다.(God is just;)
3. 그러므로 하나님은 인간을 의롭다하신다.(God justifies man;)54)

하나님은 그의 의안에서 죄인인 인간을 의롭다하신다.
이용도의 메시지가 힘있고 사람들을 변화시킨 중요한 원인은 십자가의 복음을 외침에 있었다. 그의 설교의 대부분이 십자가의 고난을 묘사하는 드라마틱한 설교를 하였을 때 일제치하의 민족수난 속에서 아파하던 한국인의 심성을 위로하고 변화시켰던 것이다. 십자가를 통한 구속과 의롭다하심의 케류그마가 1930년대의 한국교회를 뒤집어 놓았다. 3년간의 짧은 부흥운동기간동안 수 백명이 넘는 수많은 감리교와 장로교의 목사들을 만드는 역사가 일어났다. 1928년 11월 10일 일기에 보면 다음과 같이 십자가를 묘사하고 있다.

예수의 모든 아름다운 성격은 그의 십자가에 모두 집중되었습니다. 그 피에 모였습니다. 그것을 바라볼 때에, 그 신의 성품을 바라볼 때에, 우리는 내 죄를 깨닫습니다. 그리고 죄에서 나오게 됩니다. 그 죄의 성품과 정욕으로 짓는 죄를 끊어버리게 됩니다. 그 후에는 성신이 늘 우리의 마음에 계십니다.55)

십자가는 우리를 속죄시키고 거듭나게 하고 성령이 내주 하게 되는 구원의 중심임을 강하게 강조한다.
그런데 그 당시의 교회와 그 당시의 목사들은 십자가의 예수가 아니고 괴상한 예수, 육체적 영광과 부귀를 좋아하는 예수를 설교한다고 이용도는 비판한다. 참 예수 곧 고난받으시는 예수를 죽여버렸고, 참 예수가 오면 피살될 수밖에 없다고 탄식한다.

저희의 요구는 예수는 육의 예수, 영(榮)의 예수, 부의 예수,
고(高)의 예수였고 예수의 예수는 영(靈)의 예수,
천의 예수, 빈의 예수, 비의
예수였나이다. 예수를 요구하느냐?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찾으라.
인의 예수, 너희가 세운 예수 말고.(1930. 1.20)56)

우리를 위해 그 살과 피를 모두 내어 주신 십자가가 우리를 살리는 생명임을 이용도는 강하게 주장하였다.

“저희들이 나의 살을 찢고 나의 피를 흘린 후가 아니면
안될 것이었음에 오, 나의 하나님, 아버지시여,
이는 당신의 살이요 당신의 피 시오니 이 살을
찢어 저희에게 먹여주시고
이 피를 흘려 저희들에게 마시게 하옵소서”
하셨던 것이다............
십자가에서 살을 찢기우시고 피를 흘리우신 후에야
오순절 다락방에서 참으로 회개하고 예수의 사람들이 되었다.
이제 저희는 예수의 피요 살이 되었느니라.57)
(예수 30호, 1931년 6월 18일)

예수의 피는 곧 생명임을 “생명에 접근하라”는 일기에서도 강조한다. 그래서 생명되는 그리스도의 피에 접촉되어야만 생명과 힘을 얻고 구원을 받음을 강조한다.

혈루증, 피는 곧 생명이다........
영의 혈루증, 영의 생명이 다 새어 나가면
사경에 이른다. 영의 생명이 새기 시작하면
무력, 불평, 번민, 고통, 비애,
절망 등이 뒤덮여 온다...........
네 생명이 새어 나오는 구멍을 찾아야 한다. 그래 그
구멍을 막아놓고 새로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어야 한다.
이 생명은 예수에게
접촉되어야 한다. 예수에게서
생명의 은혜가 나오는 것이다..........
주께 접촉, 주는 생명이요 힘이다. 주는 기쁨이요, 위로다.
주의 생명이 우리에게 통할 때에 우리의 영은 건전을 얻는다.58)

이러한 십자가신학에 근거하여 신앙의인화(信仰義認化)를 강조한 루터의 구원론을 이용도 목사는 4단계의 신앙시대 중 제3단계인 신앙시대에서 설명한다. 도를 닦고 선행을 실천함으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얻는다는 바울적, 루터적 진리를 이용도 목사는 따른다. 다음과 같이 오직 믿음으로 구원 얻는다는 루터적 해석을 수용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사느니라(롬1:17). 의인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다 믿음이 있어야 한다.
선생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학생이 배울 수 있고,
부부간에도 믿음이 있어야 가정을 이룬다.
의인은 하나님을 믿은 사람인
바 하나님을 믿음은 다른 모든 것을 믿는
믿음을 가지게 하는 원동력이다.
하나님을 믿어야 또한 나를 믿게 되나니
내가 나를 믿지 않고 어찌 살 수가 있겠는가!59)

루터의 운명을 바꾸어놓고 루터를 변화시킨 바로 그 롬1:17을 통하여 루터적 신앙의인화를 설명하고 있다.
십자가신학을 설교만 한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의 예수를 친히 따르는 평생 고난과 가난의 삶을 몸소 실천하였다. 마치 십자가신학만 외치고 십자가신학적 관과 형극의 길을 걸었던 루터와 같았다. 이용도는 제2의 루터였다. 이용도는 감리교단으로부터 목사직을 박탈당하였을 때 루터의 내주는 강한 성이요를 불렀다: “이 땅에 마귀 꽉 차서 성도를 삼키려하나 겁내지 말고 싸워라 진리가 이기리로다.”
루터는 롬8:17절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를 강조하였다. 그는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의 짐을 지는 예수의 제자가 될 것을 주장한다. 루터는 라이프찌히(Leipzig) 논쟁(1519)이후 죽음이 엄습하는 것을 느끼고 오직 십자가만을 붙들고 십자가위에서만 그의 신학을 수립하였다.60) 본회퍼는 이 루터의 십자가 신학을 값비싼 은혜(costly grace)라고 풀이한다. 루터가 수도원에서 안일하게 기도하고 명상하는 수도사적 경건(cheap grace)에 머무르지 않고 수도원 문을 박차고 나와서 세속 속에서 역사 속에서 종교개혁운동의 십자가를 지기로 결단한 것은 값비싼 은혜의 결단이라고 이해한다.61) 루터는 고난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고 믿는다. 고난을 통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명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에서 그는 “고난은 인간을 겸손하게 만드는 제단이 된다”고 말한다.62) 고난의 목적은 은혜요 정결함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은 성화의 교리와 연결된다. 그리스도의 형상을 본받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는 길은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 우리의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이 단계에서 그의 십자가신학은 성화의 차원으로 발전하고 있다. 십자가를 지는 것이 그에게는 성화다(sanctification).
이러한 루터의 값비싼 은혜의 개념은 이용도에게도 살아나고 있다. 이용도도 찾은 인생의 길은 오직 예수에 미치는 것이요 예수가 가신 고난의 길을 따르는 것임을 그는 발견하였음을 다음과 같이 고백하고 있다.

방황하는 나는 이제야 나의 길을 찾았나이다.
.........................................................
나는 지금까지 너무나 남의 세상에 살아왔습니다. 너무나 남의 눈을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나는 이제부터
아주 “예수쟁이“가 되겠습니다.
미치도록 믿으려 나이다.
이렇게 되도록 노력하는 것이 곧 나의 생활이 되겠지요.
세상에 똑똑하다는
칭찬을 받으면서 속으로는 무기력한 생활만 해!
차마 못 견딜 노릇인 줄 압니다.
나는 힘있게 살려 나이다. 주만 믿으며
오! 주여 어느 지경까지든지 주만
따라가게 하옵소서. 아멘.(1929. 8.23)63)
자신의 신앙적 영적 완성은 오직 예수를 본받아 골고다의 언덕에 오르는 십자가의 길을 걷는 것이라고 이용도는 이해하였다.

아! 나의 골고다는 가까웠는데
그래-도 아직 보이지 않누나
제사장의 무리여 나를 차거라
빌라도의 무리여 내게 채찍을 얹으라
그리하여 어서 속히 나로 하여금
나의 완성을 선언케 하라.<예수 22호>64)

루터가 참 신학자는 책을 읽고 명상하고 사변하는데서 만들어지지 않고 삶과 죽음, 비난당함과 고난 당함 속에서 만들어진다고 강조한다.65) 이용도도 가난함과 병도 죽음도 하나님의 은혜로 주시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주시는 것-가난함과, 병도, 죽음도, 다-”.66)
그리고 이용도에게 있어서 그 십자가는 성도의 개인적 실존적 차원만이 아니라 민족적 차원으로 발전하여 간다. 3.1운동 때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그 열정으로 민족을 뜨겁게 사랑하고 민족의 아픔을 함께 울고 민족의 부활과 역사적 재건을 위하여 십자가신학을 외쳤던 것이다. 그의 민족의 수난사를 해석하는 사관은 함석헌의 고난사관과 아주 흡사하다.

약소민족 우리들은 세상의 한 노예로 십자가 형틀을 지고 갑니다.
우리는 벙어리와 같이 우리의 맞을 매를 맞아 상하신
당신을 말없이 우러러 뵈올 뿐입니다.
이교의 지배자는 우리의 머리에 가시관을 씌우고 우리는 억지로
사회계급의 바늘 침상에 눕게 됩니다. 67)

아시아의 고난과 세계사의 고난의 십자가를 지고 비틀거리는 한민족은 십가가를 지신 예수와 너무나도 흡사하다고 이용도는 본 것이다. 이 한국이 아시아적 세계적 사명이 있음을 자각하고 있는점에서 함석헌의 사관과 유사하다.68)
윤성범 박사도 그의 논문 “이용도와 십자가신비주의”에서 이용도의 신비주의는 루터의 십자가신학적 요소를 강하게 갖고 있다고 주장한다.

흔히 이용도를 신비주의자라고 부르고 있다. 과연 그를 그렇게만
불러도 좋을지는 의문이 아닐 수 없다.
만일 그렇다면 모든 그리스도인
은 신비주의자가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특히 바울도 전형적인 신비주의자일 것이요,
마르틴 루터도 그렇다고 아니할 수 없다.
왜냐하면 루터는 십자가신학(theologia crucis)을
자기의 신학으로 택하였기 때문이다.
분명히 이용도는 영광의 신학(theologia gloriae)은 아니요,
십자가의 신학에 치중한 것이 사실이며,
그것을 더욱이 실존적으로 실감하게 된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분명히 이용도의 사상을 일이관지
(一以貫之)하는 정신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69)

루터의 십자가신학적 해석은 이용도 신비주의의 밑바닥에 흐르는 사상적 근원이다. 루터에게서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절규 속에서도 침묵하시고, 외면하시고 숨어 계신 하나님(Hidden God: Deus Absconditus)은 숨어 계시는 방법으로 현존하신다(Hidden presence of god: Deus Revelatus in Deus Absconditus).70) 여기서 루터는 하나님의 속성의 양면성 곧 계시하시는 하나님(Deus Revelatus)과 숨어계시는 하나님(Deus Absconditus)을 말한다. 에라스무스가 사랑의 하나님이 지옥을 어떻게 만들 수 있을까라고 질문할 때 루터는 사랑의 하나님(Deus Revelatus)에서는 이해가 안되지만 숨어계신 하나님(Deus Absdonditus)의 속성 속에서는 이해가 된다고 말하였다. 인간의 이성과 의지로는 도저히 이해가 안되는 하나님의 깊은 숨어계시는 의지와 뜻이 있다는 것이다. 십자가라는 옷을 입고 사랑과 자비의 하나님이 숨어 계신 하나님으로 현존하신다. R.Regin Prenter는 “모든 선한 것들은 십자가 안에 그리고 십자가아래 숨어있다”(omnia bona in cruce et sub cruce abscondita sunt)고 루터를 해석한다.71) 하나님의 자비는 하나님의 진노 속에 의존적으로 계시된다. 하나님의 분노와 자비가 동시에 계시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분노 중에는 두 가지가 있다. 형벌의 분노(ira severitas)와 자비의 분노(ira misericordiae)이다.72) 십자가는 자비의 분노다. 다만 신앙만이 계시된 분노를 나타내시는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의도를 식별한다. 신앙이 아닌 인간의 이성-중세 스콜라주의의 영광의 신학(theologia gloriae)-은 이것을 식별하지 못하고 형벌의 분노와 자비의 분노를 혼동한다는 것이다.73) 영광의 신학자들은 하나님이 강함과 영광과 능력 속에서만 계시되기를 원하고, 십자가 안에서의 포기와 패배-궁극적으로 승리하는-를 받아들일 수 없다고 루터는 해석한다.74) 루터는 또다른 변증법적 해석으로 십자가에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양면성을 보여준다. 곧 '하나님의 속성에 낮선 행위'(opus alienum)와 '하나님의 속성에 속하는 행위'(opus proprium)이다. 사랑의 하나님의 속성에서는 도저히 분노하고 정죄하실 것 같지 아니하나, 그렇게 정죄하고 분노하시는 것은 죄인들을 의롭다하시기 위함이다. 결국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속성을 보이시기 위해 하나님답지 않은 행위를 보이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십자가에서 부당하게 정죄 당하고, 연약하게 창피 당하고, 어리석게 패 배당하고, 철저히 죽음을 당하셨다. 바로 그 치욕스러운 십자가의 스캔들 속에 하나님의 의와 영광과 지혜와 능력과 구원이 숨어있는 방법으로 계시되었다.75)
이용도에게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알 수 없는 신비의 십자가다. 그가 당해야 하는 핍박과 모욕과 오해는 정말 이해되지 않는 십자가였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절규하여도 하나님은 침묵 속에서 숨어만 계시지 결코 나타나거나 계시하시지 않고 그의 생전에 그의 억울함을 풀어주지 않으셨다. 이용도는 이 십자가 속에서 숨어계신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불합리한 십자가의 역설 속에서 오히려 숨어계신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면서 그의 생의 최후를 맞아하는 여유 있는 마음으로 다음과 같이 최후의 일기를 남겼다.

형아! 나는 나의 일에 대하여 아무 수단도 방법도 없는 것을
알아다오 무슨 깊은 철학적 원리를 나에게 묻지 말어 다오.
죽음! 이것만이 나의 수단이오
방법이오 원리라고 할까! .....
어느 날이든지 나의 빛 없는 죽음! 그것이 나의
완성일 것이다. 형아! 나는 리(理)없이 광(光)없이 죽으려 한다.
나는 법 없이 조리 없는 운동에 제물이 되거든
형은 법적으로 조리있게 일하여다구! 이를
위하야 나는 먼저 떨어져 죽는 작은 밀알
한 알갱이가 되려 하노라.76)

불합리한 역설 속에서 십자가의 신비를 체험한 루터처럼, 불합리하게 억울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이용도는 하나님 없이 하나님 앞에 서는 십자가신학의 신비를 체험한 사람이다.
오늘의 한국교회 부흥운동은 이용도에게서 십자가신학을 배워야 한다. 성공과 축복과 기적보다 십자가를 외치고 전하는 부흥운동이 되어야 한다. 십자가정신으로 모든 것을 다 나누어 주고 버리며 오직 갈보리 산을 오르신 십자가의 예수만을 그리워하고 사모하며 그 뒤를 십자가를 지고 따르기를 원하였던 이용도정신을 우리는 다시금 배워야 한다.
그러나 루터에만 머무르지 않고 이용도는 종교개혁 영성의 한계를 지적하였다.

기약이 차서 개혁이 행해져 프로테스탄트의 신앙은 일어났다. 이는
인류가 그리스도이해를 향하여 진보한 신기원이었다.......그리하여
16세기의 개혁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4세기간 사람들의 신앙은
개혁자의 종교개혁이상의 진보가 있음을 알지 못한다........그러나
그후 4세기를 지난 오늘 인류의 영적 생명은 다른 새 양식을
요구하게 되었다.77)

그것이 바로 웨슬리적 사랑의 영성운동, 성화의 영성운동으로 나타난다. 그리스도의십자가를 믿는 정숙주의적 차원을 넘어서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는 행동주의적 차원으로 발전하여 간다.


B. 웨슬리적 성화(聖化) 추구의 영성운동:

웨슬리는 어거스틴의 은총의 양면성(imputaion & impartation)을 발전시킨다. 그러나 루터는 어거스틴의 한 면(imputation)만을 받아들였다. 맥그레스(Alister McGrath)는 루터가 어거스틴의 주관적 본성적 의(inherent and imparted righteousness)의 차원을 이해하지 못하였다고 지적한다. 종교개혁은 어거스틴의 재발견이요, 반 펠라기우스주의에 대한 도전이었지만 루터는 어거스틴의 법적으로, 객관적으로, 전가되고 옷 입혀지는 의만을 이해하였지, 의인(義人)으로 화하는 개념을 강조한 것을 이해하지 못하였다.78)
루터에게 선행은 의로워진 크리스천에게 자동으로 나타나는 좋은 열매이다. 의롭다 함을 얻는 것은 좋은 나무가 되는 것이요, 좋은 나무에서 저절로 선행의 열매가 맺힌다고 루터는 해석한다.79) 따라서 루터는 믿음을 강조한 로마서는 평가 절상하고 행함을 강조한 야고보서는 지푸라기 복음이라고 평가 절하하였다. 그러나 웨슬리는 야고보서도 중요시하였다. 야고보서가 말하는 행함은 로마서의 믿음을 전제한 행함이란 것이다.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은 것은 75세 때, 갈대아 우르를 떠날 때에 얻은 것이요 아브라함이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얻고 인정받은 것-야고보서가 주장하는 대로-은 100세 때 낳은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제물로 바칠 때의 행위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야고보서가 말하는 행함은 로마서의 믿음을 전제한 행함이요, 바울이 로마서에서 비판한 것은 믿음 이전의 행함이라고 웨슬리는 해석한다.
웨슬리는 루터적 모라비안주의를 공격하는 그의 논문, “Thought on the Imputed Righteousness of Christ”에서 그리스도의 전가하시는 의는 전혀 어떤 성결도 요구하시지 않고, 욕망과 온갖 부정결함을 제거하는 어떤 노력도 요구하지 않는다고 강조한다. 웨슬리는 이런 교리는 율법폐기론에 빠질 위험이 있다고 두려워했다. 웨슬리의 논적이었던 허비(James Hervey)80)는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완성하신 이래 어떤 성도도 율법을 성취할 필요가 없다고 보았다. 웨슬리는 이러한 율법폐기론은 하나님을 죄의 창조자-죄 짓게 만드는 분-로 만든다고 생각했다. 하나님의 의에 동참하는 것(impartation)은 우리의 죄악된 본성이 갱신되고 하나님의 형상, 곧 의로움과 성결함에 동참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81) 완전한 크리스천은 하나님의 본성의 파트너이며 동참자가 된다. 웨슬리는 말했다: “당신의 완전한 본성의 파트너로 나를 당신 안에 있게 하소서, 새로운 죄 없는 피조물로…….”82) 오직 사랑만이 하나님의 본성에 참여함을 확신시켜 준다. 그리고 하나님의 본성에 참여하는 완전성화가 죽기전에 지상에서 이루어질 수 있음을 웨슬리는 강조하였다.
어거스틴처럼 웨슬리에게 선행은 구원의 확신을 위해 필요하다. 구원을 확신하는 한 가지 방법은 영적이고 신비적이다. 곧, 성령이 인간의 영에게 확증시켜 주는 신비적, 영적 체험이다. 그러나 구원을 확신하는 또 하나의 방법은 선행이다. 또한 선행은 구원의 완성을 위해 필요하다. 구원의 시작은 믿음에 의해서 이루어지지만, 구원의 완성은 선행으로 이루어진다고 웨슬리는 해석한다. 그리고 선행은 구원의 풍성함을 위해 필요하다. 선행을 하는 것은 신앙이 성장하고 있음을 뜻한다.83) 웨슬리는 어거스틴이 말한 것처럼 말한다: “선한 생활은 사랑에 의해 역사 하는 참 신앙과 분리될 수 없다.”84) 구원의 필수조건-의인화와 거듭남-은 믿음으로만 이루어지지만, 구원의 충분조건-성화와 완전-은 믿음으로만 되어지지 않고 사랑과 선행으로 이루어진다. 그래서 선행을 강조하는 야고보서와 함께 마5-7장의 산상수훈을 중요한 기독교복음의 내용으로 강조한다.
산상수훈의 정신에서 웨슬리는 신앙의 본질(essence)은 내면적(inward)이지만 신앙의 증거(evidence)는 사회적(social)이라고 강조한다. 산상수훈의 빛과 소금해설 부분에서 웨슬리는 사회적 성화 아닌 성화를 모른다고 말하며 사회적 종교 아닌 기독교를 모른다고 말한다.85) 그러므로 감리교회는 어떤 새로운 종파를 만들기 위해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것이 아니라 교회를 개혁하기 위해서(to reform the church), 민족을 개혁하기 위해서(to reform the nation)라고 힘주어 웨슬리는 강조한다. 교회개혁과 민족개혁이 감리교정신이다. 기독교를 은둔자의 종교, 기도하고 명상하는 종교로만 만드는 것은 기독교를 파괴시키는 행위로 본다. 그래서 웨슬리 신학자 Albert Outler는 수직적이고, 내면적인 구원만을 강조하고 개인적 성화만을 강조하는 것은 불건전한 복음주의(Unhealthy Evangelism)이라고 해석하고, 개인적 성화와 사회적 수평적 외향적 성화를 모두 강조하는 것은 건전한 복음주의(Healthy Evangelism)이라고 해석하면서 웨슬리의 사상은 바로 건전한 복음주의라고 풀이한다.86)
웨슬리와 이용도는 너무나 유사하다. 웨슬리적 완전성화를 추구하며 산사람이다 명관조 목사가 보았듯이 완전성화를 이룬 성자라고 까지 여겨진다: “그는 참으로 주님께서 가신 그 길을 꼭 그대로 걸어 나가신 분임을 분명히 믿는 나는 그를 불러 우리의 성자라고 명언 단언하는 바이다.”87) 한국교회사에서 완전성화를 이룬 사람은 주기철, 손양원, 그리고 이용도가 아니겠는가?
웨슬리의 성화가 예수의 사랑가운데서 영적으로 성장하고 성숙하는 것처럼, 이용도에게 있어서도 영적 성장인 성화는 예수의 사랑으로 이루어짐을 말한다: “더욱 더 예수의 사랑을 아는 가운데 영의 성장이 있기를 바라노라.”88) 웨슬리나 이용도는 영혼의 성장과 성숙의 과정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러한 사랑은 신앙의 단계를 넘어선다. 웨슬리는 회개는 종교의 현관(porch)이요, 믿음은 종교의 문(door)이요, 성화 곧 사랑은 종교 자체(religion itself)라고 본다. 신앙의인화는 믿음으로 이루어지지만 성화는 믿음만으로는 안되고 사랑의 행함이 있어야 한다. 이용도도 제1단계는 베드로의 교회시대, 제2단계는 야곱의 수도시대, 제3단계는 바울의 신앙시대, 제4단계는 예수와 요한의 사랑시대라고 해석한다.89) 기독교의 진수는 믿음보다는 사랑이라는 확신이 그의 삶을 지배한 것은 요한복음적 이라고 볼 수 있고 또한 웨슬리적 이라고도 볼 수 있다. 웨슬리에게서도 믿음은 종교의 문이지만, 사랑은 종교자체이다. 루터를 넘어서려는 이용도 목사의 영성은 바로 웨슬리적인 것으로 발전한다. 웨슬리나 이용도에게서는 신앙이 영성의 출발이요 구원의 출발이요 필수조건이되, 사랑이 영성과 구원의 완성에 충분조건으로 나타난다.
그래서 웨슬리처럼 이용도도 선행과 사랑의 교리를 강조하는 산상수훈을 기독교의 핵심진리로 주장하고 이 산상수훈은 믿음이 없는 사람에게 강요하는 실천강령이 아니라 이미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고 거듭난 성도들에게 필요한 가르침이라고 강조한다.

마태 5, 6, 7장은 불신자나 초신자에게 이른 말씀이 아니요, 믿음으로
구원을 얻은 믿음의 사람에게 주신 말씀이다. 믿음에서 사랑에 속할
자에게 주신 말씀이다. 믿음이 사랑에서야 완전을 이루나니 사랑이
없이는 믿음을 완성할 수 없느니라. 사랑은 믿음의 생명이라. 믿음이
사랑에 속한 후에야 비로소 결실하나니, 결실이 없는 믿음은 아직
미완성품이다.90)

웨슬리처럼 사랑의 실천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된다고 생각하였다. 믿음보다 사랑을 더욱 강조한 점에서 두 사람의 사상이 일치한다. 이용도에게도 웨슬리처럼 믿음은 종교의 문이요(door), 사랑은 종교자체( religion itself)이다. 사랑 없는 신앙은 불꺼진 등과 같고, 맹인이 안경쓴 것과 같다고 지적한다.91)
그리고 웨슬 리가 성결을 강조하는 데 사용하는 가장 핵심적인 구절이요 이 구절 설교 때문에 영국성공회로부터 설교를 금지 당한 본문 히12:14을 이용도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한다: “하나님의 백성은 성별한 생활을 할 것이니라.(고후 6:14) 성결의 경험이 없으면 예수를 뵈올 수 없느니라.(희12:14)”92) 원래의 본문은 “모든 사람으로부터 화평함과 거룩함을 쫓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뵈올 수 없느니라“이다. 이 본문에서 웨슬리는 마음과 생활의 성결을 주장하였다.
이용도는 웨슬리처럼 경제적인 생활에서 철저히 제 소유를 제것이라고 생각 치 아니하고 하나님의 것이라는 청지기의식에서 분배와 균등의 최고이상을 실천하려고 하였다.

분배. 균등의 최고 이상은, 많이 거둔 자도 남은 것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이 없게됨에 있나니
이는 내 소유란 것을 생각지 않는 절대에의
작용으로야만 될 수 있나니라.
.............................................
나의 사랑은 죽이고, 그리스도의 사랑만 나타낼지어다. 네가 무엇을
사랑하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으로 직접 그를 사랑하시게 하라93)

청지기정신에서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나의 의지로는 안되고 그리스도의 은총과 사랑에 힘입을 때만이 가능함을 주장한다.
이용도는 웨슬리처럼 사랑은 지상에서 천국을 만들어 가는 가장 강한 원동력임을 주장한다. 자기애와 세속애는 지옥에 속한 사랑이요, 사람 속에 지옥을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에 대한 사랑은 천국에 속한 사랑이요 그 주님 사랑이 고상한 인격을 만들어 준다고 강조한다.

주님에 대한 사랑은 천국에 속한 사랑이라.
천국에서는 역시 최대의 세력을 가지고 있는 자이니,
실로 사람의 가운데 천국을 이루는 것은 이 사랑 이었느니라.
사랑은 사람의 생명이라. 고로 사랑은 곧,
사람 그것이었느니라....고로 그
지(智)가 아무리 고상하다고 해도 애가 저열하면
그는 비열한 인격이었느니라.94)
오늘의 한국교회부흥운동은 능력의 성령을 체험할 뿐 아니라 이용도와 웨슬리에게서 사랑으로 무르익는 인격적 성령도 체험해야 한다. 물질적 축복을 많이 받는 것만을 강조하지 말고 받은 축복을 철저히 나누어주는 사랑의 실천을 강조해야 한다. 이용도는 자기 집을 팔아 송창근 박사의 유학비를 지원하고 늘 항상 현저동 자기집에 식객들을 묵게 하고 식사대접을 하던 나눔과 상생의 실천자였다. IMF시대를 살면서 한국교회는 웨슬리와 이용도처럼 실직자와 노숙자들을 위해서 “할 수 있는 대로 모든 것을 나누어 주라”(give all you can!)는 말씀을 철저히 실천해야 한다. 또한 굶어죽어 가는 북한 백성들을 위해 나눔과 분배운동을 실천해야 통일을 이룩할 수 있다.


IV. 성 버나드적 성애(性愛) 와 성 프란치스코적 자연사랑의 신비주의:

A. 성 버나드(St. Bernard)적 성애적 신비주의:

이재정 총장이 지적했듯이 이용도는 에크하르트같은 범신론적 신비주의가 아니라 버나드같은 성애적 사랑으로 영적 신랑 그리스도를 사모하는 영성이다.95) 심일섭 교수도 버나드적 신비주의가 나타남을 주장한다.96) 버나드가 아가서주석을 통하여 성애적 그리스도사랑을 묘사하였듯이 아가서를 좋아하고 시를 쓰기를 좋아하는 이용도는 버나드적 신비주의운동가였다. 어거스틴의 참회록과 토마스 아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 받아를 번역하였고 신비주의적 영적 순례를 강조한다. 박봉배 박사도 이용도의 신비주의는 사랑의 신비주으로 집중되어있음을 강조하고 있다.97)
성 버나드는 그의 아가서주석에서 성도와 그리스도와의 사랑의 3단계를 해석한다. 첫째 단계는 회개의 입맞춤이다. 마치 어떤 여인이 감히 쳐다보지도 못하고 눈물로 자신의 죄를 회개하면서 예수의 발에 끊임없이 입맞추듯이 성도는 회개의 입맞춤을 예수의 발에 하여야 한다. 둘째 단계는 믿음의 입맞춤이다. 믿음으로 예수의 손에 입맞출 때에 주님이 평화와 기쁨을 주신다. 주님과 화해하는 것은 믿음의 입맞춤으로 이루어진다. 셋쨰 단계는 사랑의 입맞춤이다. 그 사랑의 입맞춤은 입맞춤의 절정이다. 그리스도의 입에 입맞추는 것이다. 그것은 사랑충만이요 성령충만이요 동시에 말씀충만의 경지이다. 많은 사람들이 제2단계에까지는 잘 오를 수 있으나 제3단계에까지 오르는 사람들은 극히 드물다고 해석한다.98)
이용도는 예수사랑을 눈물사랑으로 먼저 묘사한다. 성도도 예수처럼 눈물사랑을 배움으로써 성숙하고 성장해야함을 주장한다.

창 위에 떨어지는 그 눈물 사랑, 남이 모르게 그윽한 밤중에
새벽에 산에 거리에서 흘려 뿌리는 그 눈물 사랑을
좀 이해하라. 이는 곧 영생이니라.
그 사랑을 모르고 영생할 자 어디 있느냐?
예수를 아는 가운데 자라가라.
역사적으로 표면에 나타난 일만도 말고 하루
아침 당하신 못 박혀 죽으신
일만도 말고 삼일만에 부활하신 일만도 말고 그 중심에 감추어 있는
그 사랑의 정도를 아는 가운데 자라가라. 곧 영생에 들어가리라.99)

그 눈물 사랑 안에서 자라가라는 것은 점진적이고도 신비적인 성장과 성숙의 과정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그리스도를 닮아가라는 것이다.
예수는 이용도에게 있어서 생의 맛이 된다. 주님이 없으면 살맛이 없고, 주님이 계시면 살맛이 난다는 것이다. 주님이 이용도에게는 삶의 신바람이다. 신비주의에서는 오각을 통하여 주님을 맛보는 영적 미각을 강조한다.

나의 생활의 맛이
오직 주에게만 있었도다.
오! 나의 생의 맛이 되는 예수그리스도여!
가난하든지 부하든지 주님만 계셔 주옵소서
병들든지 성하든지 주님만 계셔 주옵소서
욕을 받거나 칭찬을 듣거나 주님만 계셔 주옵소서
고생스럽거나 평안하거나 주님만 계셔주옵소서
살거나 죽거나 주님만 계셔 주옵소서
그러면 모든 것은 의미 있고 생명이 있겠나이다.
세상으로 더불어 웃는 생활보다
주님으로 더불어 우는 생활이
그 눈물이 오히려 맛이 있나이다.(예수 47호)100)

이용도는 예수의 못 자국 표적을 사랑한다. 주님은 그렇게 나를 사랑하셨건만 자신은 아무 사랑의 표적이 없어서 안타까워한다. 그 안타까움 속에는 자신도 예수처럼 죽어서 그 사랑의 표적을 보여 주고자하는 뜨거운 열망이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나의 주를 나의 주를
그 손의 못 자국으로 알겠네
사랑의 표적
그 못 자국은 나를 사랑하신 표적
...............................
오, 그러나 그러나 나는 주를 사랑하는
아무 표적도 없다.
내 손을 보아도 사랑의 표적은 있지 않고
발을 보아도 거기에도 있지 않구나
나의 얼굴을 보아도
주를 사랑하는 표적이 없구나
...................
표적은 없으나 내가 주를 잊을 수는 없습니다.
아무 표적 없이
주를 사랑하오니
아, 나에게는 표적이 없는 사랑뿐(1932년 3월 25일)101)

프란치스코나 버나드처럼 사랑의 표적을 갖기를 간절히 열망한다.
그의 삶은 온통 예수사랑으로 충만하여 있다. 예수는 생명이기에 예수 없이는 못살고, 예수는 진리이기에 예수 없이는 알 수가 없고, 예수는 길이시기에 예수 없이는 행할 수 없고, 길과 진리와 생명이신 예수가 영원히 함께 하면 행복하다고 예수에 대한 깊은 사랑을 고백한다. 그래서 그의 신앙의 초점도 오직 예수요, 생활의 중심초점도 오직 예수임을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예수다! 우리의 신앙의 초점은 예수다!
소망에도 예수요 인내에도 예수요
기도에도 예수요 찬송에도 예수다
떠들어도 예수요 잠잠하여도 그저 예수뿐이다
생사에도 예수! 꿈에도 예수! 그리고 잠꼬대에도 예수다!
먹어도 예수요 입어도 예수다!
그저 우리생활의 중심초점은 예수뿐이다.(1931년 4월 19일)102)

본격적인 버나드적 요소는 그의 편지들 속에서 주로 나타난다. 성도는 영적 신랑 예수의 눈물과 피를 내어놓고 얻은 영원한 주님의 신부라고 묘사하고 있다. 십자가는 주님의 승전비요 기념비로 그 십자가의 사랑을 사모하면서 생각하고 또 생각하면서 주님의 사랑을 찾아가야한다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저 깊은 사랑의 내전에까지 찾아 들어가라. 그곳은 한번
들어간 자 나올래야 나올 수 없는 애(愛)의 지성소니라. 거기서
그대는 눈에는 주의 정체를 포옹하리라. 그리고 천국을 노래하며
그 귀한 영광을 얻은 그대의 눈에는 감사의 눈물, 진주와 같이
솟아날 것이니라. 게달의 장막같은 너는 솔로몬의 휘장같이
빛나고 고울 것이니 주 그 휘장 안에 계셔 사랑을 노래하실
것이니라. 마음을 고요히 하고, 말을 적게 하고, 고요히 고요히
그 품안으로만 기어 들어가시라 하노라.103)

여기서 사랑의 내전이라든가, 애의 지성소라든가, 주의 정체를 포옹하리라든가, 그 품안으로만 기어들어가시라든가 하는 표현이 성애적이다. 이것은 성 버나드가 성도와 그리스도의 사랑의 관계를 세단계의 입맞춤으로 묘사한 것과 같다. 이용도에게도 입맞춤과 사랑의 유방 같은 표현이 나온다. 다른 모든 장난감이 있고 떡이 있어도 아이는 계속 울다가 어머니가 오면 그 어머니의 젗통을 만짐으로 모든 눈물과 울음과 고통이 사라지듯이 성도는 주님의 사랑의 유방을 만져야 영적 위로와 안식을 얻는 다는 것이다: “ 그의 품에 안기라. 그리고 세상을 버리라. 주님의 사랑의 유방을 잡으라.”104) 예수 그리스도에게 유방이 어디 있겠는가? 이것은 시적이고도 영적인 상징이다. 그리스도에 대한 애절한 사랑을 그렇게 성적으로 묘사하여 본 것이다.
주님의 입맞춤에서 그 극치를 볼 수 있다. 마치 버나드의 입맞춤의 제3단계가 주님의 입에 입맞추듯이: “주의 사랑의 손이 그를 만지시나니 주의 사랑의 입술이 그대를 접물하시나니. 오 자매여 즐거워하고 기뻐하라.....그대의 추는 변하여 성이 되리니“105)
성애(聖愛)의 목욕이란 신비주의적 표현도 하고 있다.

오직 주님의 사랑! 자기가 버림을 당하며 자기편의 불리를
보면서도 그래도 긍휼히 여기며 사랑할 수 있는
그 천적애(天的愛), 무한애(無限愛),
성애(聖愛)에 목욕하여서만 가련한 인간의 심령은 생기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106)
지적인 사랑, 인간적 사랑에서 완전히 독립한 자가 아니면 성애에 목욕할 수 없다. 인간적 사랑에 실패한 자, 인간적 사랑을 자의든 타의든 완전히 떠난 자가 성애에 목욕하게 된다.
이용도는 그리스도의 피가 그의 심장에 끓어오르기를 열망한다. 이것은 피가름이라는 오해를 받기도 하였는데 그는 결코 통일교와 같은 피가름을 말한 적이 없다. 제2의 재림주에 의한 피가름을 받아야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통일교주장과는 전혀다르다. 그는 오로지 그리스도의 피가 그의 가슴과 삶 속에 넘쳐서 사랑의 사람이 되기를 염원하는 것뿐이다.

오, 주여 나에게 당신의 영이 없습니다. 당신의 사랑이 나의 안에
없습니다. 당신의 피는 어디에 흐르고 말랐나이까? 나의 심장에서
당신의 피가 끓어오르게 하옵소서. 오, 주여! 당신을 따라가노라고
하면서도 갈수록 당신에게서 먼 것만이 나타나오니 나는 어느
때에나 당신의 옷자락을 만져 보며 당신의 신들메에나마 접하여
보리이까?107)

주님의 옷자락이라도 만지며 주님의 신들메라도 메고 싶은 간절한 사랑의 차원에서 주님의 피를 받기를 원하는 성만찬적 사크라멘트적 사랑의 신비주의이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흔히 중세신비주의가 빠질 수 있는 그리스도의 중재 없는 신과의 합일, 그래서 자신이 자칭 하나님이라고 생각하는 신비주의가 이용도에게는 나타나지 않는다. 한국의 유사종교에서 나타나는 자칭 제2의 그리스도, 제2의 예수라는 신비주의도 없다. 그저 바울처럼, 루터처럼, 버나드처럼, 그리스도안에(en Christo) 신비주의다. 신랑 예수와 신부 성도의 신비주의이다. 에로틱한 성애적 표현이 있는 것은 아가서적 발상일 뿐이다. 그 합일은 그리스도 없는 하나님과의 합일이 아니라 그리스도안에서의 합일이다: “아, 오묘하도소이다. 합일의 원리여!”108)

B. 성 프란치스코적 자연사랑의 신비주의:

성 프란치스코가 가난과 고난을 사랑하고 자연을 특히 사랑하고 친구 삼았듯이 이용도는 가난과 고난을 사랑하고 자연을 벗으로 생각하는 자연사랑의 영성주의자였다. 프란치스코가 그렇게 주님의 십자가의 흔적을 지니기를 원하였듯이 이용도도 주님의 십자가를 그 몸에 지니기를 애절하게 사모하였다. 프란치스코처럼 가난과 고난의 자세로 주님을 따르기를 소원하였다.

당신을 완전히 따라가게 하옵소서
모든 세상의 껍데기를 다 벗어 던지고 프랜시스처럼 발가벗은
몸으로, 다만 주님만 따를 수 있게 해주옵소서.109)
이용도는 새와 더불어 대화하고 새에게도 설교하며, 이리와 더불어도 대화한 성 프란치스꼬처럼 자연을 친구삼아 자연을 애인삼아 사랑하고 대화하며 살았다.

자연은 나의 친구, 믿을 사람도 없고 사귈 사람도 없을 때
하늘, 산, 흐르는 물, 공중의 별, 밤의 산과 들,
초목, 곤충, 새들 이는 다 자연에
속한 것으로 나의 친구가 되나니 나는 이 친구를 보려
자연 속으로 들어갑니다.110)

인간이 타락하여 산과 나무와 자연을 훼손하고 범죄 하였음을 지적한다. 오직 인간이 심판을 면하기 위해서는 자연의 보호를 받아야 함을 강조한다. 생태학적 신학의 발상을 여기서 벌써 볼 수 있다. 자연의 청지기로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연을 맏기셨지만 인간은 자연을 지배하고 정복하고 말았다.

산아, 나무야, 바위야 나를 가리워 주의 진노의 눈에서 피하게 하여
주고, 모든 인간들에게서 숨기어 수치를 면하게 하여 다오. 그러나
일찍이 산에서 범죄 하여 산을 더렵혔사오매, 나는 산의 우너수가
되었고, 나무와 바위 아래서 내가 부정하였으매 저가 나를 멸시할
지라. 어찌 나를 덮어주며 가리워 주랴.111)

그래서 자연이 가련한 인생은 오직 그리스도의 품안에서만 영원한 안식과 평화와 구원을 누릴 수 있음을 이용도는 주장한다. 오직 유일한 구원의 섬이요 피신처는 에수 그리스도라고 고백한다. 역시 성 프란치스꼬도 자연을 사랑하였지만 가장 유일한 궁극적 사랑의 대상은 그리스도라고 고백한 것과 유사하다.

V. 예언자와 시무언의 영성운동:

A. 예언자적 영성운동:

이용도는 평생동안 예언자로 살았다. 초기에는 민족독립운동에 투신하여 애국심을 불태우는 사회적 성화의 예언자였다면, 후기 부흥사로써의 생애는 한국교회의 교권주의와 바리새주의와 물량주의에 항거하는 예언자였다. 그의 예언자적 기질을 한 마디로 표현해 주는 좋은 일기문이 있다.

용자의 입

주는 용자(勇者)이시니 그의 적은 종자(從者)
-그의 신들매를 풀기도 감당치
못할 요한도 용자중의 용자였다.
그는 당시 호랑이같은 헤롯, 이리와 같은
헤롯-그를 여지없이 책망하였다......
동강난 그 머리-소반에 담겨 죄인들의 앞에
나타났을 때 저희들은 가슴이 서늘했다.....
그 입. 저희들의 죄악을 책망하던
그 입은 여전히 벌리고 있었다. 다물지 않고 있었어.
오! 광야에 외치는
소리여, 말없이 벌리고 있는 그 입을 통하여
나오는 무성(無聲)의 대호(大呼)!
저희의 가슴을 서늘케 하였다.(1928. 11.10)112)

이 일기를 썼던 1928년에는 아직 부흥운동을 시작하지 않았을 때였고 교권주의자들로부터 박해를 받지도 않았을 때였다. 그런데도 그는 이미 이러한 예언자적 정신이 강하게 있었던 것이다. 1919년 삼일운동당시에 형성된 예언자적 기질이 여기에서도 나타났고, 그 이후의 부흥운동에서도 나타났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이용도는 한국의 예레미야라고 볼 수 있다. 그는 한국민족의 아픔을 눈물로 기도하였고, 한국교회와 한국교역자들을 향해 눈물로 외치는 눈물의 예언자였다.

눈물을 주소서
오늘의 우리는 눈물이 다 말랐습니다.
눈물 없는 곳에
되지 못한 것들만 무성하여 있습니다.
눈물은 살균력이 있습니다.
원망 불평 이기 등은 전염병과 같아서
자신을 죽이고 또 남의 가슴에
살촉을 박아 죽게 하는 악독한 병균입니다.
이 모든 균들은 눈물로서 죽일 수가 있습니다. (1927. 12.6).113)


B. 시무언의 영성운동:

그가 자신의 아호를 시무언이라고 지으면서 너무 기막힌 상황이 전개될 때는 차라리 침묵과 명상으로 주님과만 사귀고 주님만으로 위로를 얻는다. 그는 통성기도를 통하여 부흥의 불을 붙이기도하면서 능력의 성령을 체험하게도 하면서도 거기만 머무르지 않고 인격적 성령을 체험하는 성숙한 영성훈련을 위해서 침묵 속에서 명상하는 것을 강조하였다. 보통 한국부흥사들에서 찾아 볼 수 없는 동방수도사와 같고 동양도사와 같은 높은 경지를 체험한 탁월한 영성의 대가였다.
김인서에게 쓴 편지에서 핍박과 박해 속에서 차라리 말하지 않는 시무언으로 승리하려는 자세를 확연하게 보인다.

나의 입을 향하여 나의 영은 침상침묵하고 속삭였나이다.
그리고 다시 시무언을 부르짖나이다.
오 나의 입술아 너는 삼가 자중하라 경히 사람을
이름 짖지 말자. 주 일찍이 누구를 헤아려
이름짓지 아니하였느니라. 오
- 나의 혼아 네 누구관대 사람을 판단하느냐?
완전한 판단자는 다만 - 위가 계실 뿐이니라.114)

시무언은 그리스도의 침묵과 고난을 그의 침묵과
그의 고난과 함께 연결 지어 생각하였다.
오! 악하고 패역한 세대여!
...........................................
너는 번잡을 좋아하였으니
침묵을 싫어하였구나
너는 팔방미인이라 일편단심 정절자를 멸시하였구나
..............................................
그러나 오주(吾主) 너를 이긴 대왕이 아니냐
너를 이기느라고 욕먹고 뺨맞고
미친놈이라고 오해를 받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고 조소받고
가시관 받고 못에 찔리고 창에 찔리어
피와 물을 쏟기에까지 이르셨던 것이 아니냐115)

또 다른 일기에서도 역시 같은 형태의 표현을 하고 있다. 그의 침묵과 그의 고난을 연결시키면서 그리스도의 침묵과 고난을 상기시킨다.

말로 정을 닛는 인간들은
말업서 정업다하며
정업스니 마음 또한 업다하도다.
..................................
친구야 웨 말이 업느냐고
내 너를 탓하지 안노니
날더러 뭇지를 마러라
웨 말이 업섯드냐고
말업는 나그네마음 더욱 간절하온 것을
x x x
생명의 길은 좁고 험한 길
사망의 길은 넓고 화사한 길
....................................
성의(聖意)에 따라나는 집을 다 헷치엇노라
나제는 왼종일
핍박을 밧고
저녁에 도라와
쉴곳 업고나
공중에 나는 새도
깃드릴 곳 잇건만
의인의 귀한 몸
붓칠 곳 업네116)

이용도가 자신의 또 다른 호를 심조(心鳥)라고 만들었다. 마음의 새다. 이 마음의 새라는 호를 붙여 쓴 일기문에는 학생심(學生心)이란 제하의 일기를 쓴다. 마음의 새는 선생의 마음이 아니라 학생의 마음을 갖는 것이다.

종래는 선생의 마음을 가졌었는 고로 나의 배우고
깨달은 것이 극히 적었노라.
동시에 나는 교만에만 빠졌었노라.
이는 큰 마귀였도다. 나는 이제 깨달았노라.
저 어린애, 걸인, 천녀, 곤충, 금수, 초목!
이는 다 나의 선생임을 깨달았노라.
......내가 선인 지인에게 배움보다
악인에게서 배움이 더 많았나니라.
심조야 배우라, 열심히, 겸비한 마음으로 배우라.117)

가르치는 선생의 마음은 큰 마귀라고 표현한 것은 탁월한 통찰력이다. 악인에게서 더 많이 배운다는 것은 천재적 발상이요 심오한 영적 해석이다. 심조 이용도는 열심히 날아다니면서 배우기에 힘쓰는 마음의 새가 되기를 뜨겁게 열망하는 겸손한 구도자요 겸손한 성화훈련의 수행자이다.
이용도형께 바친다는 서운(曙雲)의 시는 제목이 “심조(心鳥)”이다.

마음의 새, 그는 하느님의 손에 앉어서
머리를 숙여 맑게도 피리를 붑니다.
고요히 펴는나래, 자유의 첫 종소리-
마음의 새는 하느님의 우슴 속에 젖어있습니다.
........................................................
칼 같은 빛에 어더맞은 마음의 새
뜨거운 사랑에 데여 뻐서진 마음의 새
아-그는 빛에 및이고 사랑에 및였습니다.
그리하야 두 팔을 펴고 빙글빙글돌며 춤추나니
바알세부에 걸렷다는 이단의 일흠이 더욱 달지요
.........................................................
모래바람에 어더맞고, 독수리에게 뜯기면서도
그는 눈물을 씻고 즐겁게도 피리를 붑니다.
(1933년 5월 31일)118)

핍박과 박해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진리의 피리를 불면서 날아가는 새라는 것이다. 이용도는 온갖 이단의 비방 속에서도 예수의 진리 안에서 자유함을 얻었기에 자유롭게 날면서 진리를 선포한다는 것이다.
이용도는 자신을 말없이 이름 없이 조용히 핀 고독한 야화, 고독한 백합화로 표현한다. 그렇게도 인기와 명성이 대단하였으나 이단으로 몰리고 면직 당하고 병까지 얻으니 아무도 그를 찾지 않고 외면 당하는 고독한 가시밭의 백합화로 생각하였다.

아, 요란한 대로변 가시밭에
한 송이 백합화가 되었구려
고요히 이름 없이 지나갈 고독한 야화(野花)!
이제는 소문 놓고 노방에 찢길
이름 좋은 그러나 역시 고독한 백합화로구나(1932.12)119)


VI. 한국적 영성운동:

A. 한국적 심성에 호소하는 “한풀이”의 영성운동:

그는 서양을 혹독하게 비판하고, 배우려고 하지 않고 가르치려만 하는 교만한 선교사들을 혹독하게 비판한다. 상대적으로 기독교는 동양에서 한국에서 완성된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서양악기 풍금을 학습도 없이 배웠을 뿐 아니라 한국악기 가야금도 학습도 없이 배웠다. 서양의 기독교보다 동양의 기독교가 훨씬 더 성공하리라고 예언한다. “서양의 기독교는 동적, 동양의 기독교는 정적.....이제 신비적인 것은 동양인이 찾아야겠다....찬송보다 기도! 기쁨보다 눈물!...동양에서 서양적 기독교는 실패,....동양적이란 것은 요한발견적인 것이다.”120)
이용도는 제국주의 옷을 입은 서양의 기독교를 혹독하게 비판하고 예수가 아시아로 오시기를 초대한다. 물질주의와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와 향락주의에 물들지 아니한 순수하고 깨끗안 아시아의 심성 속에서 예수의 영성이 더욱 피어오를 것을 예언하고 있다.

위대한 영의 소유자 예수여
세계는 지구 정복에 주린 구라파의 욕심 앞에 놀라 떨고 섰습니다.
제국주의는 맘몬의 손에 들어가서
부정한 환희의 춤을 추고..........
저 구라파 천지에는 당신이 유하실 곳이라고는
옥두간도 남지 않았습니다.
오시옵소서 그리스도여
발길을 돌려 이리로 오시옵소서
아세아에서 당신의 처소를 잡으십시오121)

특히 한국인의 감성적 심성에 잘 맞게 호소하는 부흥운동을 전개하였다. 한국적 성령춤의 신바람도 개발하였다. 고난만 당하여 온 한국적 한풀이를 위해 찬송과 기도와 설교를 눈물과 울음으로 장시간 이끌어가는 한국적 카리스마를 개발하여 간 것이다. 유동식교수가 지적하였듯이 그는 한국적 무교적 심성에 잘 토착화하여 간 모성적 성령운동의 지도자였다. 고난과 가난과 한을 달래고 위로하고 치유하고 해방시키는 신바람을 일으키는 성령운동의 지도자였다.122)


B. 한국적 부흥운동의 틀을 형성한 영성운동:

세계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한국적 부흥회 스타일을 형성한 사람이 이용도다. 설교도중에 찬송을 부른다던가, 통성기도를 시킨다던가, 준비찬송을 많이 시킨다던가, 안수기도를 밤새도록 한다던가, 설교를 3-4시간이상 계속한다던가, 은혜를 사모하면서 이곳 저곳 이 교회 저 교회를 몰려 다닌다든가 하는 한국적 부흥운동은 이미 이용도에게서 모두 시작된 것을 볼 수 있다. 물론 길선주와 김익두에게서도 이런 면이 없지는 않았지만 이용도에게 와서 본격화 체계화되었다.


C. 민중적 영성운동:

이용도는 민중지향적 목회자요 부흥사였다. 가난하고 눌리고 소외된 자를
자기 몸처럼 아끼고 돌보는 민중사랑의 목사였다. 그는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평등함을 주장한다. 흑백갈등의 문제를 취급하는 그의 일기에서 다음과 같이 인간평등적 차원에서 백인들의 교만함을 지적하고 있다.

오! 백인아! 교만을 버리라.
너희의 앞에 올 진노를 남에게 면하라.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그를 대접하라. 일찍이 너희가 흑인을 그리
대접하였으니 앞으로 너희도 그 대접을 받으리라
오! 백인아! 겸비하게
엎디어 울지어다. 남을 위하여 우는 가증한 울음을 그치고
너희를 위하여 울지어다.(예수 9호)123)

흑인들은 이미 고난을 당하였으니 더 이상 당할 고난이 없지만 백인들은 흑인들을 억압하였으니 그 형벌을 받을 것이라는 것이다. 흑인들은 육신적은 고난을 당하였지만 백인들은 앞으로 영적인 고난과 형벌을 받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이용도는 주님이 계신 곳으로 가기 위해 새벽 4시에 일어나 주님을 만나기를 원하였는데 그 주님이 계신 곳은 다름아니라 가난한 민중, 병든 민중, 죄인인 민중 가운데 계심을 말한다.

주는 가난한 가운데, 죄인들 가운데 계셨고 나는 의인들 가운데
있나이다.
지금도 당신의 마음과 당신의 영은 가련한 자들 중에 계시지요!
주님을 찾아 보기 위하여 주의 영을 찾아
만나기 위하여는 내가 마땅히 모든 병자, 빈자,
죄인들 중에 들어가야 될 줄을 알건만 그러면서도 나는
왜 그렇게까지 못합니까.(1932년 6월 10일)124)

이용도도 민중의 친구가 되기를 열망한다. 예수처럼 민중을 섬기는 작은 예수가 되기를 열망하였다.




그러므로 그의 영성신학에서는 한국교회의 주류를 형성한 웨슬리적 경건주의의 요소가 근원을 이루고 있고, 개신교신학의 중심인 루터의 십자가신학적 요소가 강하게 나타나 있으며, 한국적 토착화신학적 요소가 깊히 자리잡고 있고, 민중신학적 한과 한풀이의 요소가 뼈저리게 배어 있으며, 버나드적 성애 신비주의와 프란치스코적 자연사랑 신비주의의 극치가 드러나고 있고, 예언자적 영성의 기질이 독특하게 돋보인다. 따라서 이용도는 한국의 경건주의 부흥운동의 아버지일 뿐아니라 한국신학의 아버지이다. 그에게서 한국교회의 영성과 신학이 이미 형성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 이후의 한국교회의 영성운동과 신학운동은 그가 만들어 놓은 영성과 신학의 재해석일 뿐이다. 여기서 그의 신앙과 사상의 깊이와 넓이와 높이와 크기를 우리는 감히 짐작할 수 있다.
이제 위에서 살펴 본대로 그에게서는 이단적 요소를 찾아볼 수 없다. 그래서 그의 명예가 복권되었다. 그의 명예가 복권되었으니 그가 초대 선도감이 되었고, 그후 이호빈 목사가 2대 선도감으로 이끌었던 예수교회공의회도 이단이 아니므로 이제는 기독교 대한 감리회가 이 교단도 받아들여야 하지 않겠는가? 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이용도의 영성의 특징을 집중적으로 요약한 시, 감동적인 시를 결론적으로 소개하고자 한다.

굶는 자들과 함께 굶어
당신의 몸은 항상 주렸었지요
헐벗은 자들을 입혀 주시노라고
당신의 입은 옷은
언제나 남루하였었지요
믿음에 조는 자들을 깨우시려고
당신은 밤잠을 못 주무셨었지요

외로운 자들을 위로하시려고
당신의 눈은 언제나 눈물
받은바 사명을 다하시려고
동지섣달에 땀으로 목욕
주님의 사업에 충성을 다하시더니
그는 필경 피를 토하고
가시였습니다.
내가 간절히 기다리고 바라는 것은
만사에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여전히 지금도 완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로 하여금 존귀케 하려함이라
<빌 1장 20절>

이용도목사가 마지막으로 원하는 찬송이 되어 여학생들이 숨질 때까지 열심히 불렀다는 찬송을 소개하고자 한다.

주의 주실 화평 믿음 얻기 위해 너의 정성껏 기도했나
주의 제단 앞에 모두 바치기전 복을 받을 줄 생각 마라
주의 제단에 산 제사 드린 후에 주 내 맘을 주장하여
주의 뜻을 따라 그와 동행하면 영생복락을 누리겠네....

그렇게 눈물이 피 방울이 되도록 정성껏 기도하시다가, 그렇게 주의 뜻을 따라 그와 동행하기 위해 십자가의 길을 걷다가, 그렇게 주의 제단에 자신의 몸을 송두리채 땀과 눈물과 피를 다해 바친 심조, 시무언 이용도 목사는 이제 ‘이단‘이라는 억울한 ’한’에서 해방되어 영생복락을 누릴 것이다.


< 참 고 도 서 >

<제1차자료>

이용도. [이용도 목사 서간집]. 변종호 편저. 이용도목사전집 제1권. 인천: 초석출판사. 1986.
이용도. [이용도 목사 일기]. 변종호 편저. 이용도목사전집 제2권. 인천: 초석출판사. 1986.
이용도. [시무언](이용도목사 글모음). 예수교회 엮음. 서울: 다산글방. 1993.
이용도. “생명에 접근하라.” <예수>. 에수교회. 제1호. 4쪽.
이용도. “어거스틴의 참회록1.” <예수>. 예수교회. 제1호. 13쪽.
이용도. “형제여.” <예수>. 예수교회. 제3호. 3쪽.
이용도. “어거스틴의 참회록3.” <예수>. 예수교회. 제3호. 11쪽.
이용도. “일기에서.” <예수>. 예수교회. 제4호. 3쪽.
이용도. “어거스틴의 침회록4.” <예수>. 제4호. 7쪽.
이용도. “일기에서.” <예수>. 제5호. 3쪽.
이용도. “어거스틴의 참회록5.” <예수>. 제5호. 13쪽.
이용도. “일기에서.” <예수>. 제6호. 3쪽.
이용도. “어거스틴의 참회록6.” <예수>. 제6호. 12쪽.
이용도. “일기에서.” <예수>. 제7호. 3쪽.
이용도. “어거스틴의 참회록7.” <예수>. 제7호. 11쪽.
이용도. “일기에서.” <예수>. 제11.12호. 3쪽.
이용도. “어거스틴의 참회록11.” <예수>. 제11.12호. 35쪽.
이용도. “은혜의 여적.” <예수>. 제13호. 7쪽.

<제2차자료>

민경배. “이용도 신학이 성령운동에 미친 영향.” [이용도와 한국교회의 개혁운동]. 이용도 목사 연구 논문집 제1권. 서울: 장안문화사. 1995. 309-39.
민경배. [한국기독교회사](신개정판). 서울: 연세대학교출판부. 1993.
박봉배. “이용도의 사랑의 신비주의와 그 윤리성.” <신학과 세계>. 제4호. 서울: 감리교신학대학출판부. 1978. 51-71.
박종천. “시무언 이용도의 삶을 통해 본 한국의 예수.” [이용도와 한국교회의 개혁운동]. 이용도 목사 연구 논문집 제1권. 서울: 장안문화사. 1995. 26-57.
변선환. “이용도와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이용도와 한국교회의 개혁운동]. 이용도 목사 연구 논 문집 제1권. 서울: 장안문화사. 1995. 193-250.
변종호 편. [이용도 목사 전]. 이용도목사전집 제2권. 인천: 초석출판사. 1986.
성백걸. “사랑과 정의의 사도, 이용도의 삶과 사상.” [이용도와 한국교회의 개혁운동]. 이용도 목사 연구 논문집 제1권. 서울: 장안문화사. 1995. 76-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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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길섭. “한국교회의 개혁자 이용도.” <신학과 세계>. 제4호. 서울: 감리교신학대학 출판부. 1978. 12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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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성범. “이용도와 십자가신비주의.” <신학과 세계>. 제4호. 서울: 감리교신학대학출판부. 1978. 9-30.
이재정. “21세기를 향한 한국교회의 과제.” [이용도 목사의 영성과 예수운동]. 서울: 성서연구사. 1998. 137-48.
이세형. “시무언 이용도 목사의 예수론.” [이용도 목사의 영성과 예수운동]. 서울: 성서연구사. 1998. 179-208.
정지련. “성령론적 관점에서 본 이용도의 신앙운동.” [이용도 목사의 영성과 예수운동]. 서울: 성서 연구사. 1998. 117-32.
최인식. “이용도의 포스트 프로테스탄티즘.” [이용도 목사의 영성과 예수운동]. 서울: 성서연구사. 1998. 225-50.
피터스. 박종수 옮김. “시무언, 한국 기독교 신비주의자.“ [이용도 목사의 영성과 예수운동]. 서울: 성서연구사. 1998. 15-116.
1) 국민일보 1999년 3월 13일.

2) 송길섭, “한국교회의 개혁자 이용도,” <신학과 세계>. 제4호. (서울: 감리교신학대학출판부, 1978), 125-56..

3) 변종호 편저, [이용도목사 전], (서울: 초석출판사, 1986), 23. 1919년 3월1일 약 2개월간 유치장생활, 1920년 2월 11일 소위 기원절 사건으로 반년간 감옥생활, 1921년 성탄절 불온 문서사건으로 반년간 감옥생활, 1922년 가을 태평양회사건으로 2년징역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감옥생활을 하였다.

4) 변종호 편저, 26.

5) 김인서, “이용도방문기,” [김인서전집], 5권, (서울: 신망애사, 1973), 181.

6) 변종호, 33.

7) 변종호, 42.

8) 변종호편, 66.

9) 유동식, [한국감리교회사], (서울: 도서출판 기독교대한감리회 유지재단, 1994), 570.

10) 이용도가 번역한 참회록은 잡지 <예수>에 연재되었고, 그것을 합쳐서 예수교회가 편집하여 출판한 것이 예수교회엮음, 이용도목사글모음 [시무언], (서울: 다산글방, 1993), 145-76에 들어있음.

11) 변종호, 69.

12) 변종호, 73.

13) 변종호, 78.

14) 빅토 웰링턴 피터스, 박종수 역, [시무언, 한국기독교신비주의자], (서울: 성서연구사, 1998), 76.

15) 변종호, 90.

16) 변종호, 122.

17) 변종호, 135.

18) 변종호, 145.

19) 변종호, 180.

20) 변종호, 191-92.

21) [전기], 101-02.

22) 변종호, 128.

23) 변종호, 131.

24) 피터스, 82.

25) 피터스, 83.

26) 피터스, 83.

27) 이호빈, “내가 본 이용도 목사,” [시무언], 187.

28) 심일섭, “한국기독교이단사의 비판적 재조명”(이용도를 중심으로), [이용도와 한국교회의 개혁운동](이용도목사연구논문집 제1권), (서울: 장안문화사, 1995), 24-25.

29) 이호빈, 187.

30) <기독신보>, 1933년 3월 21일자, 민경배, [한국기독교회사], 443에서 재인용.

31) 이호빈, 187.

32) 민경배, 443.

33) [서간집], 177-78.

34) 이호빈, 189-90.

35) 이호빈, 191.

36) [서간문], 177-78.

37) 김인서, “이용도 목사 방문기,” [김인서전집], 5권, 181.

38) 김인서, 185.

39) 김인서, “용도교회의 내막조사발표,” <신앙생활> vol. 3, no. 3, 3. 민경배, [한국기독교회사], (서울: 연세대학교출판부, 1993), 441에서 재인용.

40) 이호빈, 192.

41) 이호빈, 187.

42) 민경배, 437.

43) 세계기독교통일신령협회, [원리강론], (서울: 성화사, 1985), 77. 이하 [원리강론]으로 표기함.

44) [원리강론], 151.

45) [원리강론], 385-89.

46) Martin Luther, Luther's Works (St. Louis: Concordia Publishing House, 1987), vol.34, 336-37. 이하 LW로 표기함.

47)LW, vol. 34, 336-37.

48) LW, vol.34, 337. Mcgrath, 336.

49) Martin Luther, Dr. Martin Luther's Werke, Kritische Gesamtausgabe (Weimer, 1883~), 5. 176. 32-3. 이하 WA로 표기함.

50) WA 54, 179-87. Alister E. McGrath, Reformation Thought (Cambridge, MA: Basil Blackwell, 1988), 73.

51) WA, 1. 354. 17-21.

52)Von Reinhart Staats, "Augustins 'De Spiritu et Littera' in Luthers
reformatorischer Erkenntnis," Zeitschrift Fuer Kirchengeschichte, vol. 98, no.1,
(Verlag W. Kohlhammer Stuttgart Berlin Koeln Mainz: 1987), 35.

53)WA 3,458. WA 3, 463-64.

54)McGrath, "The Righteousness of God," 75.

55) 이용도, [시무언](이용도 목사 글모음), (서울: 다산글방, 1993), 47.

56) 이용도, [시무언], 61.

57) 이용도, [시무언], 72.

58) 이용도, [시무언], 73-74.

59) [일기], 1927년 2월 1일, 20.

60) McGrath, Luther's Theology of the Cross, 169.

61) Dietrich Bonhoeffer, The Cost of Discipleship,(New York: The MacMillan Company, 1959), 39.

62) LW 42: 44.

63) 이용도, “나의 길, [시무언], 55.

64) 이용도, [시무언], 38.

65) 'vivendo immo moriendo et damnando fit theologus, non intellegendo legendo aut speculando'(삶, 혹은 오히려 죽음과 정죄받는 것이 신학자를 만든다. 이해하는 것, 읽는 것, 혹은 사변하는 것이 신학자를 만드는 것이 아니다.) WA, 5, 163, 28-29.

66) 변종호편, [이용도목사일기], (인천: 초석출판사, 1986), 50.

67) [일기], 67. 1929년 12월 21일.

68) 루터의 십자가신학과 함석헌의고난사관을 비교한 것을 보려면 필자의 졸고 “루터의 십자가신학과 함석헌의 고난사관 비교연구,” [박대인박사은퇴기념연구논문집], (서울: 감리교신학대학교출판부, 1997), 70-123을 보라.

69) 윤성범, “이용도와 십자가신비주의,” <신학과 세계>, 제4호. (서울: 감리교신학대학출판부, 1978), 9.

70) 1519년까지 루터는 간접적인, 숨어 계신 방법으로 게시하시는 하나님을 말하였으나, 1525년 그의 [노예의지론](De Servo Arbitrio)에서는 아예 전혀 그의 숨어 계신 뜻을 인간에게 알리지 아니하시는 숨어 계신 하나님을 말한다. 인간의 의지는 노예신세이므로 하나님의 의지와 뜻을 전혀 알 수 없는 세계도 있다는 것이다. 여러 면에서 하나님은 자신을 열어 계시하시지 않는 역사의 수수께끼가 많다는 것이다. 이를 하나님의 마스크(mask of God)이라고도 부른다.

2016.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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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1.17.